시나리오 '노 캐럿'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나와 닮은 사람이 있었다. 닮았지만 다른 사람. 외모는 같을지 몰라도 그 속에 들어 있는 감정은 많이 다른 사람. 그 사람은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온갖 감정이 느껴졌다. 우울함, 한심함, 분노, 슬픔, 연민.

그리고 곧 무감정한 표정이 되었다.

그 어떤 감정보다 가장 견디기 힘든 감정이었다. 차라리 화를 내줬다면, 차라리 동정을 해줬다면, 차라리 비웃어 주었다면. 하다못해 애써 무시를 해줬다면. 그러나 그런 일말의 노력도 없이, 흐릿한 눈은 초점을 잃었다. 서서히 부옇게 힘을 잃어가던 눈은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망막에, 내가 비추어지기는 할까. 나는 그녀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사람일까.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비웃음조차 사라진 이 공간에서, 오로지 자기혐오만이 고개를 들었다. 구역질이 나올 거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없던 힘을 짜내어 화장실을 나왔다. 차가운 공기만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언니는 또 새벽부터 출근한 모양이다. 아이돌도 아니면서 아이돌보다 훨씬 부지런한 사람이다. 나는 왜 언니처럼 부지런하지 못할까. 유전자를 먼저 다 가지고 간 걸까. 어쩌면 나보다 언니가 더 아이돌에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내 방에 있는 나미쨩의 사진에 눈길이 갔다. 나의 우상. 나의 아이돌.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나미쨩을 생각하며 아이돌의 꿈을 키우곤 했는데. 언제부터였을까? 점점 그녀의 사진을 보는 시간이 적어졌다.

멍하니 그녀의 사진을 보다가 알람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연습실에 갈 시간이다. 도저히 연습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나는 이제 아이돌이고, 프로니까.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서는 프로가 될 수 없다. 곧바로 가방을 챙겨 연습실로 향했다.

 

 

 

그래, ……. 2곡째에는 그게 좋다고 생각해.”

댄서들과 편하게 대화하는 미코토 씨를 보며 무릎을 움츠렸다. 댄서들과 안면이 있는 사이여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녀의 실력이 워낙 출중하여 자연스레 의견을 경청하게 된다. 아마 예전에 같이 일했을 때도 그랬겠지. 뭐든 잘하는 사람이니까.

살며시 손을 뻗어보았다. 당연히 닿지 않는다. 내 팔은 짧고, 내 손은 작으니까. 손가락 사이로 그녀와의 거리를 가늠해보지만, 멀게만 느껴진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같은 이름을 공유한다 해도, 그녀의 눈빛이 내게 오는 일은 없겠지.

문득 그녀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같이 유닛 활동을 하게 될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사무실에서 기다리던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던 미코토 씨를 보았다. 갈색과 백금색이 어우러진 머리를 휘날리며 인사를 건네던 모습은 보며 아름다운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저 유닛 활동에 대한 기대감이 조금 올라갔을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를 제대로 보게 된 건 연습실에서 처음 연습을 했던 때였다.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으로 춤을 추는 그 모습, 그 자태. 눈앞에서 펼쳐진 천상의 가무를 보며 나는 더없는 황홀함을 느꼈다. 나미쨩의 노래를 들은 뒤로 겪은 가장 큰 충격이었다.

마지막 스텝을 끝낸 뒤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옥색과 갈색이 뒤섞여 미려하게 빛나는 그 눈동자에 나의 얼굴이 비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나미쨩을 보고 아이돌을 꿈꿨듯이, 미코토 씨를 보며 아이돌이란 이렇게 돼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내가 담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고 있지만 인식되지 않는다. 흐릿한 눈동자에는 오로지, 아이돌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내가 아니라, 아이돌에 대한. 내가 아닌.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고, 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아마 아무도 모르겠지. 언니도, 프로듀서도 모를 것이다. 미코토 씨는 나와 SHHis를 함께 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부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래도, 그래도 해야 한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혼자서라도 다시 춤추기 시작했다.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려는 것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저기, 죄송해요! 미코토 씨가 위에서 턴 하려는 것 같아서요!”

리프트 위에서 펜슬 턴을 하려는 그녀를 보고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올라가고 있었고, 리프트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스태프들이 의사소통하는 소리에 묻혀 전달되지 않았다.

안 돼, 보이질 않아……. 멈춰야 해, 멈춰야 해, 멈춰야 해!”

이 상황에서 리프트를 멈출 방법이 뭐가 있을까. 다급하게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나와 미코토 씨의 위치를 보았다. 미코토 씨는 이미 거의 다 올라간 상황이었고, 나는 아직 올라가는 중이었다. 미코토 씨는 떨어지면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위치였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떨어져도 죽지는 않는다. 조금, 아프겠지만…….

……, 돌자…….”

여기서 펜슬 턴을 한다.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내가 먼저 위험한 행동을 하면 스태프들이 리프트를 중지할 테고, 그녀도 무사히 내려올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어쩌면, 미코토 씨가 나를 볼지도 모른다.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온몸에 급격히 피가 돌기 시작했다. 좀 더 동작을 크게 하면, 좀 더 많이 다치게 되면 더 높은 확률로 나를 보게 되지 않을까. 일부러 뛰어내릴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너무 지나친 행동이다. 어디까지나 미코토 씨가 위험한 짓을 하는 걸 막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나를 위한 게 아니라.

마음을 굳게 먹은 뒤 크게 돌았다. 발바닥에 피가 날 정도로 연습한 펜슬 턴은 리프트 위에서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하지만 공간이 너무 좁다. 넓은 연습실에서만 연습한 탓에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는 익숙하지가 않았다. 팔과 다리가 난간에 부딪혔고, 이내 몸의 균형을 잃었다. 앗 하는 사이에 내 몸은 리프트 밖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놀람과 당황이 섞인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긴 목소리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마침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를 잡았다. 분명히 그녀의 목소리였고, 분명히 나의 이름이었다.

니치카쨩……?”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의식이 가라앉았다.

 

 

 

 

노 캐럿 시나리오를 보고 떠올라서 썼습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시나리오 내내 니치카는 미코토의 이름을 부르지만 미코토가 니치카의 이름을 부른 건 리프트에서 떨어질 때 단 한 번뿐이더라구요.

앞으로의 시나리오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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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녀는 그저 웃을 뿐이었습니다. 비웃을 뿐이었습니다. 탁한 보랏빛 눈동자로 저를 주시하던 그녀는 이내 몸을 돌렸습니다. 그리곤 휴게실을 나가며 덧붙였습니다.

완벽하게 그 노래를 소화하기 위해 노력했겠지만 헛수고야. 완벽해지려는 노력은 완벽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그곳을 바라보던 저는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또 그녀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또다시 그녀에게 미움을 받아버렸습니다. 저는 그저, 그녀에게 인정받고 싶을 뿐이었는데. 그녀와 함께 무대에 서면 족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꼬였을까요.


◇            ◇            


너희들! 유닛을 할 생각이 있긴 한 거냐?”

언제나 그랬듯 엄격한 말이 쏟아졌다. 오늘도 적당히 흘려들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나를 직접 호명했다.

특히 니노미야! 칸자키는 그래도 너에게 맞추려는 노력이라도 하는데 넌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뭐라고?”

지금의 너는 칸자키보다 훨씬 못해. 알고 있는 거냐? 데뷔도 한참 일찍 한 녀석이, 이제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후배에게 맞출 줄 모른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내가……. 란코보다 못하다고? 이 내가? 말도 안 된다. 비록 오디션 때는 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마니시 부장의 변덕 때문이다. 본래라면 절대 질 리가 없는 승부였다고!

그렇게 협조할 생각이 없으면 그만 둬라! 나도 협조하지 않는 녀석은 가르치고 싶지 않다!”

순간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 베테랑 트레이너를 노려봤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며 외쳤다.

나라고 하고 싶어서 하는 유닛인 줄 알아? , 그래. 그만두지! 그만 둔다고!!”

베테랑 트레이너에게 소리를 지른 뒤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를 갈며 무작정 건물 밖으로 향했다. 온갖 잡념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이게 다 란코 때문이다. 칸자키 란코와 만난 뒤 내 인생이 망가져 버렸다. 나를 따라하는 그 빌어먹을 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란코가 내 인생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2018년 7월 15일 동네 페스타 제3회 어나더 스테이지 첫 출전

「Assimilate」 흑서&사현의 다크 일루미네이트 팬픽 트윈지

A5 71p 인쇄본 / 표지 컬러 무광 / 5000원

글 흑서 & 사현 / 표지 일러스트 나예







그런데 대체 내게 무엇을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끈덕지게 권유는 하는 걸까? 몇 달 동안 같은 교실을 쓰는 반 친구도 나를 잘 알지 못하는데, 어제 처음 본 사람이 내게 가능성을 보았다고?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자꾸 가능할거라고 하는데,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알아? 당신이 아는 건 내 외모와 성격 약간 정도야. 고작 그 정도 가지고 내가 아이돌에 적합하다고 하는 거야?”

다소 큰 소리로 말하지 남자는 조금 놀랜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 채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저는 호죠 씨가 꼭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 호죠 씨는, 아이돌을 동경하며 열심히 땀을 흘리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내가? 땀을 흘렸다고? 열심히? 이 사람은 대체 무얼 본 걸까.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는 건가. 어느 쪽이든 기분 나쁘다.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아는 척 하는게 너무나도 기분 나빴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난 노력 같은 거 한 적 없어. 아이돌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게 전부야. 다른 누군가와 착각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노력이라고! 알아? 수술이 성공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노력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다고!”

크게 쏘아붙이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너무 큰 소리로 화를 내 버렸다. 아픈 부분을 건드렸다고 해도 그는 어제 처음 본 사람이다. 다소 심했다고 생각하며 사과의 말을 생각하는데 그가 목을 긁으며 입을 열었다.


◇            ◇            


やかな色 纏波紋

선명한 색을 휘감은 파문은

風受けて った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어

 

우리는 같이 입을 열었고, 동시에 숨을 내뱉었다. 입을 떠난 소리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선율과 어우러져 하나의 음악이 되었고 관객들의 곁으로 가서 내려앉았다.

동시에 우리는 몸을 움직여 정해진 동작을 취했다. 우리의 몸짓은 허공에 흐르는 음악을 두르며 춤이 되어 관객들의 망막에 새겨졌다.

처음 네 마디가 끝나고 반주가 흘러나오는 동안, 천천히 안무를 하면서 관객석을 둘러보았다. 멍하니 우리를 바라보던 그들은 곧 소리를 지르며 호응을 해 주었다. 처음 듣는 노래, 처음 보는 춤, 처음 보는 아이돌이지만 그들은 파란색 콘서트 라이트를 흔들며 환호하였다.

빛나는 조명, 솟아오른 무대, 열광하는 사람들. 텔레비전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존재들이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지금까지 품고 있었던 긴장감과 열등감이 하찮게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다





2017년 6월 25일 동네 페스타 제2회 어나더 스테이지 첫 출전

「가련한 사랑」호죠 카렌X타케우치P 팬픽 개인지

A5 61p 인쇄본 / 표지 컬러 무광 / 5000원

글 사현 / 표지 일러스트 퓨엔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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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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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켜서 달력을 본다. 22. 2월의 둘째 날. 새해도 어느덧 한 달이나 지났다. 슬슬 새해에 참배를 하며 했던 다짐이 흐려질 시기다. 사실 인간의 결심이란 사소한 것에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인간이란 매우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애초에 결심을 하지 않으면 된다. 기대를 하지 않으면 배신도 당하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기에 나는 나 자신을 자각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새해 다짐이란 걸 한 적이 없다.

다만 작년엔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겪었고, 아이돌이라고 하는 새로운 빛을 찾기도 했다. 빛을 향해 함께 계단을 올라가는 동료들도 생겼고, 나와 같은 어두운 빛을 가진 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렇기에 나 자신의 기조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고, 새해 다짐이란 걸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바람은 두 가지. 하나는 아이돌로서 지극히 당연한 바람이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것. 톱 아이돌이라 불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수많은 아이돌의 로망이라 할 수 있는 그 호칭을 손에 넣어 유일무이한 인간이 된다. 아직 넘어야 할 벽이 많지만, 땅을 기는 인간이 하늘을 나는 꿈이라도 꿔 보는 건 죄가 아니지 않나. 태양을 향해 날갯짓하는 이카로스처럼 한 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바람은……. 아니다. 그만두자. 지금의 분위기를 보니 도저히 이루어질 거 같지가 않다. 나는 고개를 들어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안즈는 편안한 자세로 숙면을 하고 있었고 리카와 미레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코우메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부정한 존재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저주가 걸린다. 함부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좋다.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보았다. 지금 사무실에 있는 건 방금 스케쥴이 끝난 우리 LittlePOPS . 다들 연초부터 바빠서 좀처럼 보기가 힘들다.

, 바쁜 건 좋은 거다. 톱 아이돌에 좀 더 가까워지는 길이기도 하고. 평소라면 납득하고 휴식을 취하거나 사색에 잠겼을 테다. 하지만 오늘은 22. 내일은 23. 23일이다.

다시 한 번 멤버들을 훑어보았다. 각자 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사실 평소와 같은 모습이다. 전혀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나는, 아니 날짜가 평소와 같지 않은데.

불현듯 란코의 얼굴이 떠올랐다. 폰을 꺼내서 란코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이번에 고향인 쿠마모토에서 열리는 행사에 간다는 내용이었다. 이틀 동안 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끝나면 23일 저녁. 밤에 다시 도쿄로 돌아오기에는 무리일 테니 빨라도 4일에 돌아올 예정이다.

4. 3일이 아니고 4일이다. 하필 4일이다. 고작 하루 차이로 나와 란코를 갈라놓다니, 운명의 신이란 어찌 이리도 잔혹한가. 신이 내리는 시련을 뛰어넘는 것이 인간의 역할이지만, 나는 신화 속 영웅이 아니기 때문에 시련의 고통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멘탈이 다소 무너진 느낌이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스카쨩……. 집에…… 가는 거야……?”


알고 싶지 않은 무언가와 대화를 하고 있던 코우메가 말을 걸어왔다. 경계하면서 고개를 돌려봤는데 다행히 코우메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내 망막에 비치지 않을 뿐, 사실 코우메 옆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존재론을 외치고 다니는 내가 무언가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지는 건 굉장한 모순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론 감성이 이성을 이길 때도 있는 법이다. 인간은 감성의 생물이니까.


아아. 오늘은 조금 사색에 잠기고 싶어서 말야. 나의 존재론에 관한 고찰이 떠올라서. 먼저 가볼게.”

……. 내일 봐…….”


소매를 흔들며 배웅을 해주는 코우메를 뒤로한 채 사무실을 나섰다. 긴 복도를 걸으며 가고 있는데 앞쪽에서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다.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나. LiPPS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프레데리카를 제외한 네 사람과는 유닛 활동을 해본 적이 있어 나름대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와는 조금 파동이 맞지 않지만, 기본적으로는 좋은 동료들이다.


, 아스카 쨩이잖아.”

안녕~”

오랜만이네. 퇴근하는 길이야?”


다섯 멤버가 각자 인사를 걸어왔다.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곤 그들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같은 인사, 평소와 같은 눈빛, 평소와 같은 태도다. 역시. 기대를 하지 말았어야 했나. 기대하지 않으면 배신을 당할 일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야.

하지만 기대는 나 혼자서 만든 허상. 이들에게 잘못은 없다. 그렇기에 배신당한 내 기분을 이들에게 돌려줄 필요는 없지. 속으로는 쓰게 웃어도 겉으로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평소처럼. 평소와 같게.


. 내 존재에 관한 회의감이 들어서 말야. 잠시 타인과의 접촉을 끊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해졌어.”

피곤해서 먼저 가보겠다는 거지? 알았어. 푹 쉬어.”

내일 봐!”


LiPPS 멤버들을 뒤로 한 채 걸었다. 혼자서 계속 걸었다. 집에 도착해서 책상에 놓인 달력을 보았다. 23일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바보같이.”


달력을 덮었다. 최근 나답지 않은 인연을 많이 얻어서 망각하고 있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아웃사이더라는 사실을. 이 사회의 통속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나와 어울리지 않는 타인과의 접촉으로 인해 나 자신이 많이 변한 걸까. 작년에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걸 기대하다니. 날짜란 결국 상대적인 것이고 내게 있어 특별한 날이 타인에게도 특별할 리가 없을 텐데. 오히려 상대방에게 있어 그 날은 불행한 일을 겪은 부정적인 기념일일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역시, 나의 기념일을 축하해 줄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다.

……감았던 눈을 떴다. 고찰하다 보니 잠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벽에 걸려있는 시계의 시침은 121 사이에 있었다. 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의 기념일을 위해, 혼자서 조용히 읊조렸다.


생일 축하해. 아스카.”


혼자서 외치고 나니 조금 싱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 전엔 배신감까지 들었는데. 마음을 고쳐먹으니 이리도 간단한 거였나. 역시 고독은 사람을 완전하게 만든다. 항아리에 든 독충 중에 살아남은 한 마리가 가장 독이 강한 것처럼.

 

 

 

붙임머리를 달고 옷을 입으며 거울을 보았다. 시니컬한 니노미야 아스카가 서 있었다. 몇 달 정도 돌아간 느낌이다. 어젯밤에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대로 출근하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 활동하고 있는 유닛인 LittlePOPS는 꽤나 밝은 느낌의 유닛이다. 프로인 만큼 확실히 밝은 가면을 쓰고 가야겠지.

집을 나선 뒤로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는 날이었다. 회사에 도착하고, 동료들을 만나고, 프로듀서와 함께 로케이션 장소로 가서 공연을 하고, 밥을 먹고, 방송국에 가서 촬영을 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온다. 오늘따라 유독 안즈가 동료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많이 보이긴 했지만, 때론 그런 날도 있는 거겠지. 리카와 미레이가 좀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날이 추워서 그런 거겠지.

정문을 지나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늘 내내 마음 한구석에서 자리 잡고 있던 생각 하나를 곱씹었다. 이대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복도를 지나, 사무실 문을 열면, 갑자기 숨어 있던 동료들이 나타나 케이크와 함께 축하해 주는 거야. 서프라이즈 파티. 갑작스러운 걸 좋아하는 녀석들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두근거리는 마음과는 달리 내 머리는 냉정해지라고 되뇌었다. 기대를 하지 마. 배신감만 더 커질 뿐이야. 평소에 주변 사람에게 네 생일을 알리기는 했어? 전혀. 오늘이 생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기껏해야 란코 정도일걸? 생일을 알려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무슨 결과를 바라는 거지? 한심하군. 넌센스 조차 되지 못해.

그렇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복도를 지났고, 맨 앞에 서 있던 프로듀서가 사무실 문고리를 잡았다. 그 어느 때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문고리가 돌아갔고……. 프로듀서는 안으로 들어갔으며, 안에 있던 다른 아이돌은…….

소파에 앉아서 과자를 먹고 있었다.


, 수고했어. 화과자 먹을래?”


슈코가 우리를 향해 화과자를 건넸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전혀 먹을 기분이 아니었기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옆에 있던 소파에 털썩 걸터앉았다. 슈코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시키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급격하게 피로가 밀려왔다.

여러 가지 잡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그보다는 피곤함이 제일 컸다. 생각과 감각이 한데 엉켜 새까맣게 굳어 내 눈을 가렸고 그 상태 그대로 어둠이 가져다 준 편안함에 몸을 맡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깨 쪽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눈을 떴다. 무릎에는 담요가 한 장 덮여 있었고 옆에는 안즈가 있었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걸 보니 어느새 밤이 된 모양이다.


자고 일어나니까 다들 퇴근했나 봐. 우리도 가야지.”


크게 하품을 하며 안즈가 말했다.


프로듀서는 먼저 가 버린 건가. 하여튼, 어른이란.”


보통 사무실에서 잠들면 프로듀서가 퇴근하기 전에 깨워주고 가는데 오늘은 그냥 갔는지 안즈 뿐이다. 잠시 프로듀서에 대한 불만을 풀어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시간이 약인 걸까. 기분이 많이 나아진 상태다. 어째서 인간은 밤이 되면 잠을 자야 하는지 종종 불만을 품곤 했지만, 오늘만큼은 셀레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녀가 친 밤의 장막 덕분에 인간은 잠을 자게 되었으니까.

안즈가 천천히 인형을 챙기는 동안 먼저 짐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생각하며 문고리를 돌렸다. 이따 밤에 란코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언가 터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여러 번 울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리카와 시키, 프레데리카, 그리고 슈코가 손에 폭죽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카나데와 미카, 미레이, 코우메와 함께 프로듀서가 케이크를 든 채 서 있었다. 케이크에 꽂힌 초의 개수는 정확히 14개였다.

그리고……. 나와 가장 가까운 곳. 그들의 제일 앞에는 언제나 그렇듯 검은색 고스로리 옷을 입은 란코가 서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한 손을 이마에 대고 한 손을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후후후. 영혼의 공명자여! 그대의 탄생을 축복하기 위해 날개를 펼치고 공간을 넘어 여기에 왔노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란코. 분명 오늘까지 쿠마모토에 있는 거 아니었어……?”

, 거짓말이었다는 거지. 사실 행사는 오전에 끝났답니다.”


어느새 폭죽을 던져버린 시키가 웃으며 대답했다. 말하는 걸로 미루어보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천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연기도 천재일 줄이야. 정말 멋지게 속아 넘어갔다.


그러니까 말야.”


잠시 숨을 고른 시키가 작은 목소리로 하나, .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생일 축하해. 아스카!””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여전히 멍해 있던 나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표정을 관리하려 했으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하여간, 인간의 몸이란 불합리하다니까. 완벽하게 통제 할 수 없는 육체라니.


생일이라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단순히 내가 태어난 날에 지나지 않지. 타이밍이 어긋났다면 하루 전이나 이튿날에 태어났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내가 생일이 달랐다면 나라는 인간이 달라졌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2일에 태어났든, 4일에 태어났든 나는 여전히 니노미야 아스카고, 아이돌을 하고 있을 거야. 사람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보단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니까. 그런 의미에선 생일보단 사망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태어나는 건 내가 정할 수 없지만, 죽는 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뭐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난 아직 살아있는 인간이야. 언젠간 죽겠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겠지. 정해지지 않은 사망일을 생각하는 것보단, 이미 정해져 있는 생일을 축하하는 게 더 생산적일지도 모르겠군.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 준 너희들의 성의도 고려해서 말야. 그러니까.


다시 호흡을 골랐다. 조금은 진정이 됐다. 이제는 표현만 하면 된다. 가슴 깊은 곳부터 머릿속까지 가득 채운 이 감정을.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 표현할까. 아니다. 오늘만큼은 솔직해지자. 담백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말하자. 지금 짓고 있는 솔직한 미소와 함께.


고마워.”

 




2018. 02. 03. 니노미야 아스카의 생일을 축하하며.

사실 3일에 맞춰서 올리려고 했는데 무려 일주일이나 늦어졌네요 흑흑

여튼 늦었지만 아스카 생일 축하한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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