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요이 사쿠야는 그녀의 주인과 함께 환상향으로 온 지 몇 년이 지나도 늙지 않았다. 언제나 윤기가 흐르는 은발을 휘날리며 얼룩 하나 없는 단정한 메이드복을 입고 뭇 남성들을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용모를 자랑하던 완벽하고 소쇄한 메이드. 몇 없는 인간 친구였던 하쿠레이 레이무나 키리사메 마리사, 코치야 사나에가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에도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마리사가 얼굴에 생긴 주름을 매만지며 사쿠야에게 부러운 듯 말한 적이 있다.

너는 여전히 소쇄하구나.”

사쿠야는 말없이 웃었다.

왜 그녀는 늙지 않을까.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논리를 펼쳤다. 시간을 멈추기 때문에 자신의 시간조차 멈춘 것이다. 사실 다른 사람처럼 늙었는데 어떻게든 완벽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 감추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미 우리가 알던 이자요이 사쿠야는 죽었고 지금 돌아다니는 사람은 2대째 사쿠야라는 음모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하쿠레이 레이무가 노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전혀 늙지 않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결국 한참 전에 레밀리아가 사쿠야를 흡혈귀로 만들었다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사쿠야가 얼마나 자신의 주인을 지극히 모시는지, 레밀리아가 얼마나 자신의 종자를 끔찍이 아끼는 지 환상향에 거주하는 인요라면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오후. 안개 때문에 멀리 보이지 않아 눈을 찌푸리며 앞을 보고 있던 문지기 홍 메이링은 천천히 들려오는 발소리에 긴장하며 전방을 주시했다. 그러나 눈에 익은 은발의 메이드가 보이자 긴장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몇 시간 전에 인간 마을에 장을 보러 가신다더니 조금 늦게 오셨네, 메이링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다녀오셨어요. 조금 늦으셨네요.”

. 수고가 많구나. 메이링.”

사쿠야는 상쾌한 미소로 답례를 해 주었다. 잠시 그녀를 지켜보던 메이링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사쿠야씨! 왜 다 젖었어요?”

왜라니? 비 오는 날에 옷이 젖는 건 당연하잖니.”

그렇지만 평소엔 안 젖었잖아요!”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에 우산도 쓰지 않고 우의도 입지 않은 사람이 물에 젖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사쿠야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시간을 멈추는 정도의 능력을 가진 그녀의 능력이라면 비 오는 날에도 거의 젖지 않은 채로 외출할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했다. 비에 젖은 사쿠야라니, 메이링이 수년간 홍마관의 문지기를 하면서 본 적 없는 광경이다.

오랜만에 비를 맞고 싶어서 그랬어.”

그러나 사쿠야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굉장히 편안한 어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금방 속아 넘어갈 듯한 빼어난 연기. 하지만 기를 읽을 수 있는 메이링은 쉽사리 속지 않았다.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러나 본인이 그렇다고 말하니,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메이링에게 인사를 건넨 사쿠야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현관을 지나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홍마관 안에서 각자의 일을 하던 요정 메이드들이 그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관인 사쿠야가 혼자서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을 멈출 수 있는 그녀는 항상 시간을 멈춘 채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같이 있지 않은 이상,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오늘까지는.

자기들끼리 뒤에서 수군거리던 요정 메이드들은 급히 제비뽑기를 하여 대표를 한 명 선출했다. 재수 없게 걸린 한 요정이 투덜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기, 사쿠야님!”

? 무슨 일이니?”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사쿠야는 잠시 그 요정을 바라보다가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모퉁이에 숨어 이쪽을 보고 있는 요정들이 있었다. 하여간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들이라니까. 평소에는 일도 안 하고 자기들끼리 장난만 치는 요정들의 모습이 짜증나기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꼭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였다.

오늘따라 걷고 싶어서 그렇단다.”

대표로 나선 요정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쿠야는 잠시 무릎을 굽혀 그 요정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다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젖은 옷을 벗고 말끔히 목욕재계를 한 뒤 거울 앞에 섰다. 머리를 단정히 빗고 메이드복을 단정하게 입은 뒤 마지막으로 메이드용 헤드 드레스를 쓰는 것으로 몸단장을 마무리했다. 평소에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사쿠야지만, 오늘만큼은 더욱 완벽하게 하려는 듯 잘못된 점이 없는지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홍마관의 가장 높은 곳으로 향했다.

레밀리아의 방 앞에 도착하자 먼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고 규칙적인 노크 소리가 두 번 울려 퍼졌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다시 두들겼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사쿠야는 세 번째로 방문을 두드리는 대신 큰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일어날 시간입니다.”

일어났어.”

그제야 안에서 대답이 들렸다. 사쿠야는 레밀리아의 목소리가 방금 잠에서 깬 목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역시 알고 있는 것일까. 사쿠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완벽하고 소쇄한 메이드의 얼굴로 돌아가 방문을 열었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레밀리아 스칼렛의 등이 보였다. 언제나 위엄 있게 펼쳐져 있던 날개가 축 늘어져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난 비가 싫어.”

레밀리아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물론 흡혈귀가 비를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흡혈귀는 태생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종족이지만, 그만큼 약점도 많았다. 마늘, 정어리 머리, 부러진 호랑가시나무, 볶은 콩 같은 것들이 모두 흡혈귀의 약점이었다. 여기에 햇빛과 더불어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흐르는 물이었다. 흐르는 물은 흡혈귀에게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흡혈귀는 강이나 바다를 건널 수 없었고 비가 오는 날에는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전형적인 흡혈귀인 레밀리아가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긴 하죠.”

당연히 사쿠야 또한 레밀리아가 비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무언가 달랐다. 아무리 비가 오는 날이라 해도 이렇게 레밀리아가 축 늘어진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완벽하고 소쇄한 종자로서 주인의 기분을 좋지 않은 상태로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저와 아가씨가 처음 만난 날도 비가 오는 날이었잖아요. 첫 만남과 같은 날씨라니, 로맨틱하지 않나요?”

사쿠야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 그들이 환상들이 하기 전, 바깥 세계에서 레밀리아와 처음 만났던 그 날을. 그 날도 오늘처럼 비가 세차게 쏟아지던 날이었다.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두 인요는 서로를 향해 웃었고, 전력을 다해 격돌했다.

그야 네가 날 잡으려고 작정했으니까 비 오는 날을 골라서 쳐들어 온 거잖아.”

부정하진 않을게요.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맞잖아요.”

나 잡으려고 비 오는 날에 찾아온 놈들이 세 자리가 넘는다.”

과거에 한 이름 날렸던 악마사냥꾼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이기 위해 사냥꾼들은 한낮이나 비 오는 날에 악마의 본거지로 쳐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그렇게 해도 레밀리아를 쓰러뜨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그래서 전 비가 좋아요. 아가씨와 만나게 해 준 고마운 날씨니까요.”

그래도 난 싫다. 싫은 건 싫은 거야.”

멍하니 앞을 보던 레밀리아가 손바닥을 펴더니 작은 창을 만들었다. 어리둥절한 사쿠야가 말리기도 전에 창문을 향해 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창문이 깨졌고 틈새를 통해 비가 들어왔다. 자연스레 창가에 앉아 있던 레밀리아의 손등에도 빗물이 묻었다. 순간 작은 소음과 함께 피부가 녹아내렸다. 깜짝 놀란 사쿠야가 재빨리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호들갑 떨지 마. 조금 따가운 정도니까.”

사쿠야는 레밀리아의 의자를 뒤로 당겨 빗물이 들어오는 범위 밖으로 꺼낸 뒤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빗물과 피로 범벅이 된 손등을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조금씩 닦아내자 안쪽에서 새하얀 뼈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안쪽에서부터 새살이 올라오고 있었다.

금방 재생될 텐데.”

그녀의 말처럼 상처는 곧 회복되었다. 흡혈귀는 약점이 많지만, 그 약점에 잠깐 노출된 정도로 죽지 않는다. 만약 강력한 재생력이 없었다면 이미 흡혈귀는 멸종되었을 터. 그들은 쉽게 죽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종족이었다.

오늘따라 빠르게 움직이는구나. 사쿠야.”

……아가씨가 부상을 입으셨는데 느릿느릿할 수는 없죠.”

그래. 빨리 움직여야지. 그래야 내 종자답지.”

순간 사쿠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려왔다. 그녀는 잡고 있던 레밀리아의 손을 놓고 자신의 손을 뒤로 감추었다.

아가씨. 오늘따라 이상하시네요.”

글쎄. 난 그저 비를 맞아보고 싶었을 뿐이야. 우리가 처음 만난 날처럼.”

자신이 했던 말을 인용해서 대답하자 사쿠야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다. 대신 재생이 끝난 손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고통을 느끼고 싶으신 건가요? 아가씨는 그런 취향이 아니었잖아요.”

가끔은 나도 그런 취향이 되는 날이 있어. 대략 500년에 한 번 정도?”

난생처음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레밀리아가 오늘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미소였다. 사쿠야는 떨리는 두 손을 꽉 잡았다. 레밀리아의 시선이 사쿠야의 다리에 머물렀다가 팔을 거쳐 다시 눈으로 향했다.

그런데 사쿠야. 왜 나이프는 하나도 안 차고 있는 거야?”

저도 나이프를 가지지 않고 다니는 날이 있답니다. 대략 100년에 한 번?”

태어나서 처음이라는 말이군.”

아가씨처럼요.”

둘 다 첫 경험인가? 두근거리는데.”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사쿠야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 상태에서 사쿠야의 눈을 바라보자 자연히 레밀리아가 사쿠야를 올려다보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곧바로 사쿠야가 무릎을 꿇어 높이를 맞췄다. 두 인요가 같은 높이에서 서로의 눈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레밀리아는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를 보았고, 사쿠야는 반쯤 감긴 붉은 눈동자를 보았다.

인간들을 첫 경험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잖아? 나도 그런 기분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서 굉장히 기쁜걸.”

축하해요. 아가씨. 저도 모처럼 가슴이 뛰네요.”

레밀리아가 웃었다. 사쿠야도 따라서 웃었다. 두 인요는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겨우 웃음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쿠야는 무릎을 가볍게 털고 나서 방을 나섰다.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레밀리아에게 인사를 하는데, 레밀리아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사쿠야.”

. 아가씨.”

지금 행복하니?”

잠시 아무 말을 하지 못하던 사쿠야는 오늘 가장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행복해요.”

……그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는 사쿠야를 부르지 않았다.

 

 

레밀리아의 방에서 나온 사쿠야는 복도를 계속 걸었다. 가는 길마다 요정 메이드들이 그녀를 보고 쑥덕거렸으나 정작 본인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발걸음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홍마관에서 가장 낮은 곳이었다.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방 하나. 마치 남에게 보여주면 곤란한 것이라도 있는 듯 깊숙이 숨겨진 곳이었다.

육중한 철문을 밀자 쇠와 벽돌이 갈리며 나는 마찰음이 사쿠야의 귀를 긁었다. 불빛 하나 없는 방 안에 성한 물건은 커다란 침대 하나뿐이었다. 그 외에는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서지고 찢어진 잔해들만이 가득했다. 사쿠야가 눈을 찌푸리며 침대 쪽을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이상함을 느끼고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녀의 목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끼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장난은 그만두세요. 작은 아가씨.”

아깝다. 한 발만 더 디뎠다면 목이 툭 하고 날아갔을 텐데.”

서늘한 기운이 사라지자 사쿠야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 손에 붉게 타오르는 검을 쥔 플랑드르 스칼렛이 있었다. 오색창연하게 빛나는 날개를 흔들던 플랑드르가 도약하자 순식간에 문 앞에서 침대까지 이동했다.

재미없어. 재미없다구. 밖에는 비도 오고.”

어쩔 수 없지요.”

장난에 금방 염증을 느끼고 침대에 누워서 바동거리는 플랑드르를 보자 사쿠야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분명 평소의 작은 아가씨다. 다소 축 늘어지긴 했지만 그건 바깥에 비가 오기 때문이겠지.

그런 작은 아가씨를 위해 특별히 향림당에서 사탕을 사왔답니다.”

침대에서 사쿠야의 앞으로 이동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마치 새로운 마도서를 발견한 마리사처럼 눈 속에 별빛을 담고 사쿠야를, 아니 정확히는 사쿠야가 손에 든 봉지를 바라보는 플랑드르였다.

사탕! 사탕! 사탕!”

자자, 사탕은 없어지지 않으니까요. 천천히 드세요.”

향림당에서 비정기적으로 판매하는 바깥세계의 사탕은 환상향에서 굉장히 인기가 높은 품목이었다. 향림당의 점주 모리치카 린노스케는 뛰어난 발명품들이 아니라 고작 설탕 덩어리에 불과한 이 물건이 가장 인기가 많은 상품이라는 사실에 한숨을 내쉬곤 했지만, 손님들은 사탕 언제 들어오느냐고 성화를 부릴 뿐이었다. 사쿠야는 나름 향림당의 단골이었기 때문에 미리 예약해놓을 수 있었고, 타이밍 좋게 오늘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탕이 그렇게 좋으신가요?”

! 내 귀생 최고의 즐거움이야!”

양손 가득 사탕을 들고 씹어 먹느라 정신이 없는 플랑드르를 사쿠야는 포근하게 웃으며 지켜보았다. 문득 생각이 떠오른 사쿠야가 플랑드르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오늘같이 비 오는 날이 싫으신가요?”

?”

양 볼이 터지도록 사탕을 물고 있던 플랑드르가 급하게 사탕을 깨물었다. 잠시 천장을 보고 생각하면 플랑드르는 이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물론 싫어!”

그런가요…….”

하지만 이렇게 사쿠야가 사탕을 사오는 날이라면, 좋아!”

그녀는 의외라는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플랑드르의 해맑은 미소에서 진심을 읽은 사쿠야도 따라서 웃었다.

그렇군요. 고마워요. 작은 아가씨.”

그러나 사쿠야의 미소는 조금 전에 레밀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미소였다.

 

이번에는 플랑드르가 갇혀 있는 지하실보다는 조금 위에 있는 대도서관으로 향했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마녀 파츄리 널릿지가 그녀를 맞이했다. 전에 만났던 두 사람과는 달리, 파츄리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앞에 놓인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사쿠야?”

내일 아침까지만 해주세요. 환상향 최고의 마법사시잖아요.”

아무리 내가 대마법사라고 해도 환상향 전역에 비를 내리게 하는 건 힘들어.”

분명히 파츄리는 환상향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의 마법사다. 특히 속성을 다루는 마법에서는 그녀를 따라올 마법사가 없었다. 앨리스는 인형술의 대가이고, 뱌쿠렌은 자기 강화 마법에 특화된 마법사였다. 마리사는 고화력 중심의 마법을 연구하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는 파츄리를 따라올 마법사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환상향 전체에 비를 내리게 하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죄송해요. 그래도 제가 이렇게 개인적인 부탁을 하는 건 처음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지금까지 파츄리가 사쿠야에게 무얼 사오라고 부탁하거나 알아보라고 시킨 적은 많았지만 사쿠야가 직접 파츄리에게 사적인 일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해주겠다고 해도 거절하던 사쿠야다. 모처럼 해준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저번에 빌려주신 책 잘 읽었어요. 갖고 온다는 걸 깜빡했네요. 제가 지금 다시 외출해야 해서 그런데 좀 가져가 주시겠어요?”

오늘은 참 여러 가지를 부탁하는구나. 그래. 이런 날은 처음이니까. 나중에 소악마를 보낼게.”

아뇨. 파츄리님이 직접 해주세요.”

파츄리가 고개를 홱 돌려 사쿠야를 노려보았다.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움직이지 않는 대도서관이라는 별명이 붙은 마녀를 움직이려 하다니, 그녀의 절친한 친구 레밀리아조차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사쿠야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파츄리는 깜짝 놀랐다. 그 어느 때보다 사쿠야의 눈빛은 진지했다. 자신의 의지를 꺾을 수밖에 없는 눈빛이었다.

알았어. 내가 갈 게. 가면 되잖아.”

감사합니다. 파츄리님.”

다시 환하게 웃는 사쿠야를 보며 괜한 짓을 했나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 파츄리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가시게요?”

햇빛이 있는 동안 건초를 만들라고 하잖아.”

그럼, 1층까지는 같이 갈까요?”

두 인요는 천천히 홍마관을 걸었다. 복도를 거닐던 요정 메이드들의 눈이 두 배로 휘둥그레졌다. 복도를 걸어 다니는 메이드장과 마녀라니. 항상 홍마관에서 시간을 멈추고 다니는 사쿠야와 도서관에서 나오지 않는 파츄리였는데. 요정 메이드들은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을지 심각하게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1층으로 올라온 사쿠야가 걸음을 멈추고 옆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걷고 있던 파츄리도 자연스레 그쪽을 바라보았다. 홍마관에 몇 없는 창문이 있는 장소였다. 세찬 비가 창문에 부딪치며 자신의 몸을 망가뜨리는 광경을 사쿠야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비의 상태를 보고 있는 것일까. 파츄리는 자신의 마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가 걱정이 들었다.

좀 더 세게 내려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 정도면 문제없어요.”

고개를 내젓는 사쿠야의 표정을 보아하니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렇다면 왜 비를 보고 있지? 파츄리도 사쿠야를 따라 뚫어지게 비를 바라보았다.

빗소리만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비를 보고 있자니 조금 감성적인 기분이 들었다. 파츄리는 모처럼 옛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와 레밀리아가 처음 만난 날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었지.”

파츄리님도요?”

. 물론 그때도 내가 마법으로 내리게 한 비였지만 말야. 다짜고짜 쳐들어오기에 비를 뿌려줬어.”

그때나 지금이나 정말 못 말리는 녀석이야, 하고 파츄리가 그리운 듯 덧붙였다. 어느새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는 두 친우의 관계란, 정말 특별한 것이겠지. 사쿠야는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동시에 약간의 질투심이 들었다.

우리 홍마관 식구들은 다들 비가 오는 날에 아가씨랑 만났군요. 메이링도 비슷한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쟤는 그냥 의식주를 제공해준다고 하니까 좋다고 온 게 아닐까?”

두 인요가 함께 킬킬거렸다. 지금쯤 문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의 귀가 제법 가려울 것이다. 그것도 양쪽 다. 내친김에 낮잠을 너무 많이 자니 근무태만이니 허구한 날 마리사에게 뚫리니 하며 메이링의 뒷담을 계속했다.

그렇게 창문 앞에서 한참을 떠들다가 갑자기 사쿠야가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회중시계를 꺼내 보는 게 아닌가. 떨리는 손에서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느껴졌다.

왜 그래, 사쿠야. 괜찮아?”

한 번도 본 적 없는 메이드장의 이상한 행동에 파츄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사쿠야는 손을 내저었으나 여전히 낯빛이 좋지 않았다.

괜찮아요. 시간이 지체된 거 같으니 슬슬 가죠.”

대화를 멈춘 두 인요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파츄리가 계속 사쿠야를 힐끔 쳐다보았으나 사쿠야는 조용히 갈 길을 재촉했다. 이윽고 목적지인 계단 앞에 도착했다. 파츄리는 이 계단을 올라가야 했고, 사쿠야는 계단을 지나 현관으로 가야 했다. 파츄리가 먼저 계단을 올라가며 사쿠야에게 말했다.

몸 상태가 안 좋으면 너무 무리하지 마. 레미한테 일러둘까?”

아뇨. 아가씨에겐 말해주지 말아 주세요. 걱정을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역시나. 파츄리가 예상했던 대답이 들렸다. 파츄리도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기에 그녀를 향해 손을 한 번 흔들고 사쿠야의 방으로 향했다. 계단 앞에 서서 파츄리가 올라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사쿠야는 몸을 돌렸다.

…….”

지금까지 참아왔던 격통이 그녀를 덮쳤다. 조금 전 파츄리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억지로 참았지만, 슬슬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숨이 턱턱 막혔으나 벽을 잡고서라도 걸었다.

마침내 저 앞에 현관이 보였다. 사쿠야는 메이링이 보일 만큼 앞으로 갔다. 붉은 머리카락이 장식하고 있는 초록색 등이 보이자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보니 또 졸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쿠야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보는 모습이 졸고 있는 모습이라니, 정말 메이링다웠다.

사쿠야는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진 벽과 광적일 만큼 붉은색 장식으로 치장된 자신의 집을. 친구들은 이 집을 볼 때마다 주인 놈의 악취미라며 비웃었지만 사쿠야는 이 집을 사랑했다.

친구들, 인가.”

먼저 간 레이무와 사나에가 떠올랐다. 이제 남겨질 마리사를 떠올렸다. 평범한 인간들에겐 요괴로, 요괴들에겐 특이한 인간으로 취급받던 자신과 같은 처지의 친구들. 요괴와 인간의 경계에서 마지막에는 인간으로 끝을 맺은 친구들. 이제 사쿠야의 차례였다.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회중시계의 초침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멈출 듯한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이미 시침과 분침은 멈춘 지 오래였다.

아가씨. 작은 아가씨. 파츄리님. 메이링.”

사쿠야는 자세를 바로잡고 허리를 굽혔다. 양쪽 스커트를 잡고 우아하게, 공손하게.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마음을 담아.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사쿠야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시간을 멈췄다.

 

 

 

무언가를 느낀 메이링이 잠에서 깨어났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 현관 안쪽을 살펴보았으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잘못 느낀 건가. 하지만 어딘가 모를 찜찜함이 가슴 한구석에서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메이링은 조만간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 직감했다.

 

사탕을 먹던 플랑드르가 갑자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봉지 안에 들어 있던 모든 사탕이 가루가 되었다. 멍하니 부서진 사탕을 보다가 플랑드르 자신도 깜짝 놀랐다. 왜 갑자기 능력을 썼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사쿠야의 방에 도착한 파츄리는 책상에 놓인 책을 들다가 그 자리에 놓여 있던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를 읽은 파츄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알고 있는 신체 강화 마법을 전부 자신에게 걸었다. 그리고 수부를 응용해 비에 젖지 않게 물방울로 자신을 감싼 뒤 급히 홍마관을 나섰다.

 

깨진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비를 계속 바라보던 레밀리아는 다시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빗물은 그녀의 손등을 파고들어 깊은 상처를 남겼다. 흘러내린 피는 바닥에 고인 채로 꿈틀거렸다. 그녀는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두 날개를 활짝 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흡사 피가 서린 듯했다.

 

 

 

파츄리가 급히 도착한 곳은 홍마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물길 이었다. 그러나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물이 넘쳐흘러 큰 강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반대편에, 이자요이 사쿠야가 누워 있었다. 파츄리는 재빨리 강을 건너 사쿠야에게로 달려갔다.

편안하게 누워있는 사쿠야의 가슴에 귀를 대 보았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코에 손을 갖다 대었다. 공기가 움직이는 느낌이 나질 않았다. 파츄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쿠야가 남긴 쪽지를 봤을 때 겨우 참았던 감정이 속에서 들끓었다.

파츄리님. 이렇게 쪽지로 알려 드리는 것을 부디 용서하시길.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말할 용기가 나질 않았고, 또 아가씨가 엿들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죽으러 갑니다. 인간으로서 수명이 다 되었음을 직감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제가 죽는 걸 그냥 놔두지 않겠지요. 아마 저를 흡혈귀로 만들 거에요. 물론 저는 아가씨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인간으로서 죽고 싶습니다. 그걸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파츄리님 뿐입니다. 아가씨가 오지 못하는 빗속, 강 건너에 있는 제 시체를 태워주세요.”

비와 함께 흐르는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마음을 다잡은 파츄리는 하늘에 있는 먹구름을 조종해 사쿠야의 시신이 있는 부근만 비가 내리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자 그 부분에만 햇볕이 내리쬐게 되어, 마치 하늘에서 천사가 강림한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악마의 종자가 죽는데 천사가 데리러 오다니, 이런 기묘한 모순이 또 어디 있겠는가. 파츄리는 쓰게 웃었다.

그럼. 웃기는 일이지. 악마의 종자는 악마가 데리러 와야 하지 않겠어?”

순간 파츄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절대 헷갈리지 않을 목소리였건만, 오늘만큼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여기서는, 절대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였다.

안 그래, 파체?”

그러나 그 목소리가 자신의 애칭을 불렀을 때, 파츄리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홍마관의 마녀. 지식과 그늘의 소녀, 움직이지 않는 대도서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의 근원, 화담의 마법사. 자신을 지칭하는 수많은 명칭이 있었지만, 그녀를 파체라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레미, 어째서……!”

친우의 모습을 확인한 파츄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 있는 흡혈귀의 모습이란 상상 이상이었다. 빗방울이 하나하나 몸에 닿을 때마다 살이 녹아내렸다. 끊어진 혈관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재생되었고 돋아난 살과 피는 또다시 흘러내렸다. 레밀리아가 걸어온 길은 살점과 피가 뒤엉겨 끔찍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운명을 보았지. 근데 날아오다가 날개가 다 녹아서, 걷다 보니 좀 늦었네.”

언제나 자랑스럽게 펼치던 두 날개도 지금은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뭉개져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계속 걸어왔단 말인가. 파츄리는 레밀리아가 빗속에서 서 있는 걸로도 모자라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사실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 그래. 네 능력을 잊고 있었구나. 아니, 그것보다, 대체. 안 아파?”

말을 더듬던 파츄리가 힘들게 질문을 내뱉었다. 같이 살게 된 이후로 처음 보는 친우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레밀리아는 웃었다.

아프지. 엄청 아파. 죽을 만큼 아파.”

레밀리아가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이윽고 강 앞에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세차게 흐르는 강을 건널 엄두는 나지 않는지 거기서 더 앞으로 오진 않았다.

하지만, 사쿠야는 더 아팠을 거야. 죽을 만큼 아프다 해도, 죽는 것보다 아프지는 않을 테니까.”

그녀는 잠시 강을 살펴보았다. 지금도 아파 죽을 것만 같은데, 강에 뛰어들게 된다면 어떨까. 상상도 하기 싫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홍마관에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몸을 말리고 의자에 앉아 사쿠야가 타주는 홍차를…….

사쿠야는 나 때문에 더 일찍 죽었어. 다른 인간들처럼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겼으면 되었을 것을, 내가 완벽하고 소쇄한 종자라는 이명을 붙여줬기 때문에 언제나 완벽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사용해 노화조차 막은 거야. 고작 그런 것 때문에!”

힘찬 도약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었다. 빗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속도로 흐르는 강물은, 상상 이상이었다. 레밀리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늘을 가득 메우는 고함과 함께,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다. 발이 없어지면 무릎으로, 무릎이 타 들어가면 손으로, 손이 떨어져 나가면 팔로, 팔마저 녹아내리면 다시 재생된 발로.

사쿠야의 옆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파츄리의 앞에, 레밀리아가 천천히 강에서 기어 나왔다. 뭉개진 전신의 모습은 이게 레밀리아라는 흡혈귀인지 알아보기도 힘든 수준이었다. 아니, 살아 있는 생물이기는 한 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빌어먹을. 내가 다시는 이 짓거리 안 한다.”

어느새 발을 재생한 레밀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파츄리가 비를 뿌리는 것을 멈추고 모든 마력을 모아 여섯 빛깔의 현자의 돌을 주변에 띄웠다. 영롱하게 빛나는 현자의 돌은 금방이라도 강력한 마력을 내뿜을 것만 같았다.

레미. 넌 내 친구지만, 사쿠야도 소중한 친구야. 친구의 마지막 부탁을 헛수고로 만들 순 없어!”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파체.”

찰나의 순간, 레밀리아는 파츄리의 앞에 서 있었다. 파츄리가 반응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레밀리아의 손톱이 번뜩였고, 현자의 돌은 두 동강이 난 채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파츄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지근거리에 접근한 이상 네게 승산은 없어.”

망연자실한 표정의 파츄리를 놔두고 레밀리아는 천천히 사쿠야에게 다가갔다. 비에 젖은 사쿠야의 시체를 보자 그 날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사쿠야와 만날 그 날. 빗속에서 서로 웃으며 싸우던 그 날을. 사실 그녀는 오늘 사쿠야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부터 이미 그 날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 날도 오늘처럼 비가 왔었지. 사쿠야.”

그리고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고, 종자로 삼았다. 너는 말했지.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나는 항상 비 오는 날을 싫어했어. 당연하지. 흡혈귀니까. 너와 만나기 전에는 비가 조금만 와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잠만 잤단다. 하지만 너와 만난 이후로는 나도 비를 조금씩 좋아하려고 노력했어. 너는 항상 비를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사쿠야의 목을 쓰다듬었다. 아직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전히 새하얀 살결은 물어뜯기 딱 좋은 상태였다. 레밀리아는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대었고, 파츄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너는 비 오는 날에 태어나, 비 오는 날에 가는구나.”

불길이 피어올랐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사쿠야를 금방 집어삼켰다. 시체를 태운 불꽃은 더이상 태울 것이 없어지자 금방 사그라졌고, 그 자리에는 그을린 회중시계만이 있을 뿐이었다. 레밀리아는 허리를 굽혀 회중시계를 집어 들었다.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조금씩 비치기 시작했다. 파츄리는 레밀리아의 옆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얼굴에 물방울이 묻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미. 우는 거야?”

그냥 비야.”

비는 이미 그쳤는데.”

레밀리아는 파츄리를 쳐다보지 않은 채로 담담히 말했다.

악마는 울지 않아.”

그렇구나.”

그녀의 말을 들은 파츄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금방 마음을 가다듬은 파츄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악마라 해도 소중한 이를 잃는다면 울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레밀리아가 손에 든 회중시계를 열었다. 수명이 다 되었는지 이미 멈춘 뒤였다. 그녀는 시계에 새겨진 시간을 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럴지도.”

 

 

 

이자요이 사쿠야가 죽었다. 시체가 없었기에 빈 관을 가지고 간단히 장례를 치렀다.

그녀의 장례식에 수많은 인요들이 찾아왔다. 홍마관의 마당을 인요들이 가득 메웠으나 그중에 그녀의 주인이자 홍마관의 주인인 레밀리아 스칼렛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동생인 플랑드르조차 그녀의 관을 안고 펑펑 울고 있었는데.

장례식은 홍마관에 거주하는 마녀 파츄리 널릿지의 주관 아래 무사히 끝났다. 늙은 몸을 이끌고 온 키리사메 마리사는 이제 친구들이 모두 갔다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이를 갈며 홍마관의 가장 높은 곳을 쳐다보았으나 홍마관의 주인은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다시 비가 내렸다. 레밀리아는 자신의 방에 앉아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직 고치지 않은 창문을 통해 비가 들어왔다. 그녀는 손을 뻗어 비를 잡았다. 살점과 피가 한데 엉겨 괴기하게 녹았다.

아파.”

그래도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손이 녹고, 재생되고, 다시 뭉개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을 계속 지켜보기만 하였다. 이 정도는 사쿠야가 느꼈던 고통에 비하면, 사쿠야를 잃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 비가 싫어.”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레밀리아는 홀로 중얼거렸다.

난 비가 좋아.”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활짝 웃었다.

 

그 뒤로 문지기였던 홍 메이링이 홍마관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호칭은 여전히 문지기였고, 레밀리아가 외출할 때 같이 다니지도 않았다. 홍마관에서 메이드장이라는 이름이 다시 쓰이는 일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비 오는 날이면 사쿠야의 무덤 근처에서 레밀리아를 볼 수 있다는 괴소문이 퍼졌다. 피를 철철 흘리며 가만히 서 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은 믿지 않았다. 흡혈귀가 어찌 흐르는 물 아래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소문이 퍼지면 호기심이 강한 누군가가 조사해보기 마련이다. 참지 못한 누군가가 레밀리아에게 가서 직접 물어보았다. 레밀리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난 비가 좋아.”

 

 

 




2015년에 쓴겁니다. 몇월에 썼는지는 잘...

선배님이 주최하신 팬픽 대회에서 2등 했었네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제가 지금까지 쓴 동방프로젝트 팬픽 중에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작품이 아닌가 하네요.

마지막에 파츄리와 레밀리아가 나누는 대사는 Devil may cry 3 엔딩에서 단테와 레이디가 나누던 그 대사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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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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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요. 그 사람을 보면 제 심장이 뛰기 시작한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첫 인상은 ‘예쁜 사람’ 이었습니다. 짧은 남색 머리에 하늘색 교복을 입은 그 사람의 눈동자는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조금씩 시선을 내려 보니 밑에는 오뚝하게 솟은 콧날이, 그 아래는 새빨간 입술이 있었습니다. 피처럼 붉은 입술은 요염하기 짝이 없어, 입고 있는 교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구석에 홀로 앉아 있는 저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걸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손에 든 종이와 제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아마 제가 누군지 확인하는 거겠지요. 이윽고 제 이름을 발견했는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안녕. 네가 아리스구나. 잘 부탁해.”

“타치바나 입니다!”

 

무의식적으로 내뱉고 난 뒤 아차 싶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갑자기 소리를 지르다니요. 그것도,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아 홀로 구석에 있는 처지인 데도요. 겨우 말을 걸어준 사람에게 쌀쌀맞게 대하다니, 너무나도 어린아이 같잖아요.

 

“흐음, 이름이 싫은가 보구나?”

 

하지만 그 사람은 크게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걸어주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서로 통성명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야미 카나데야.”

 

카나데. 하야미 카나데. 저는 그녀가 떠나간 뒤에도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되뇌었습니다. 막 아이돌로 데뷔를 한 제게 있어 처음으로 이름을 알게 된 동료였으니까요. 첫 무대를 앞두고 긴장한 채로 구석에 앉아 있는 제게 먼저 말을 걸어준 건 오로지 그녀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첫 무대를 무사히 끝냈고, 다른 동료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와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도 많이 있어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아리스, 이제 친구가 많이 생겼구나? 혼자 대기실 구석에 앉아 있을 때가 어제 같은데.”

“그 얘기는 이제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타치바나 입니다!”

 

그녀는 저를 만날 때마다 곧잘 놀리곤 했습니다. 데뷔 무대 때의 제 모습을 얘기하는 건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에요. 새 아이돌이 들어올 때마다 저 얘기를 한다니까요. 정말 지치지도 않나 봅니다.

 

“이야, 카나데. 아리스랑 사이좋구나!”

“절대 아니에요!”

“아, 얼굴 빨개졌대요~”

 

옆에 있던 시키 씨와 프레데리카 씨가 히죽거리며 놀렸습니다. 씩씩거리며 두 사람은 쫓아가다가 문득 옆에 있던 거울을 보았습니다.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제 얼굴이 보였습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 정도라면 놀림감이 될 만하겠네요.

항상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그녀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라 힘이 빠졌습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저는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겠지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항상 그랬지만, 그녀를 마주할 때면 더욱 간절해져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카나데 씨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다니요. 어린아이를 항상 놀리기만 하는 유치한 사람을요. 박학다식한 후미카 씨나 자연스레 어른스러움이 배여 나오는 미나미 씨 같은 어른이 되어야 할 텐데, 카나데 씨 같은 어른이 되면 안 되겠죠.

그렇게 다짐을 하며 아이돌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동경하던 후미카 씨와 미나미 씨와는 같은 유닛이 되어 친밀한 관계가 되었고 많은 점을 배웠습니다. 처음 생각하던 대로 두 분은 정말 배울 점이 많은 어른이었어요. 물론 나머지 구성원인 아이코 씨와 유미 씨도 어른스러운 분들이었죠.

활동을 하며, 배우기도 하며 차분히 생각을 해보니 역시 카나데 씨 같은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좀 더 인텔리하고 쿨한 타치바나 아리스가 되어야 해요. 그게 제 아이돌로서의 목표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여전히 카나데 씨를 볼 때면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카나데 씨가 매번 저를 ‘아리스’ 라고 부를 때면 이제는 습관처럼 ‘타치바나 입니다!’ 라고 대답하곤 했지만, 은연중에 저를 이름으로 불러주길 바랬습니다. 저를 아리스라고 불러줄 때마다,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가득 찬 느낌이었습니다. 나이가 비슷한 친구들도 아리스라고 부르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에요.

이 느낌 때문일까요. 카나데 씨와 얘기를 할 때 멍하게 카나데 씨를 바라보는 빈도가 늘었습니다. 주로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시선이 멈춰요. 어떤 스케줄이 있는지에 따라 입술의 색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어떠한 색이더라도 카나데 씨의 입술은 매력적이었습니다. 옅으면 옅은 대로, 짙으면 짙은 대로요.

특히 카나데 씨가 「Tulip」을 센터에서 부를 때는 정말이지,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빨갛고 도톰한 그 입술을, 노래의 가사처럼……. 카나데 씨의 공연을 본 날은 하루 종일 머릿속에 「Tulip」의 가사가 울려 퍼졌습니다.

공연을 본 다음 날, 사무실에서 카나데 씨와 만났습니다. 그녀는 평소처럼 제게 장난을 치며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갑자기 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는 그녀의 팔을 쳐내며 소리쳤습니다.

 

“언제까지 어린아이 취급을 할 거에요!”

 

사무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라 제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수십 개의 눈이 저를 쳐다보자 퍼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조심스레 눈을 그녀의 얼굴 쪽으로 돌렸습니다. 카나데 씨의 놀란 표정을 보는 순간, 저는 눈을 감고 뒤를 돌아 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누군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한 채 밖으로 달렸습니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방구석에 박힌 채 양 팔로 무릎을 감싸 안았습니다. 돌연 눈물이 흘렀습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마음껏 울고 또 울었습니다. 넘쳐흐르는 이 감정은, 울지 않고서는 풀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필 바로 다음날에 LiPPS와 함께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기로 되어 있었어요. 정말 가기 싫었지만, 프로가 사적인 일로 공적인 일을 그르치면 안 되겠지요. 마음을 굳게 먹고 대기실로 향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오자마자 장난을 쳤을 시키 씨와 프레데리카 씨, 슈코 씨가 구석에서 속닥거리고 있었습니다. 제 눈치를 보면서요. 화장을 하던 미카 씨가 몇 번이고 말을 꺼내려고 했으나, 이내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카나데 씨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제 슬슬 준비하지 않으면 늦은 시간인 데도요. 카나데 씨가 이렇게 늦은 적은 처음이라, 프로듀서도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PD님께 출연자 중 한 명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가할 수 없다는 걸 알리려는 찰나, 대기실의 문이 열렸습니다.

 

“미안해. 많이 늦었지?”

 

모두가 기다리던 카나데 씨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먼저 프로듀서에게 고개를 깊게 숙인 뒤 LiPPS 멤버들에게도 사과의 뜻을 건넸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지요. 무표정한 얼굴은 평소와 별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살짝 그늘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제는 미안했어. 앞으로 언행에 주의할게.”

 

잠시 제 표정을 살펴보던 카나데 씨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습니다. 주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습니다.

 

“……타치바나.”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제 안의 무언가가 멈춰버린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저를 구성하는 부품 중 하나가 고장이 난 것 같았어요. 그 때문일까요, 제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방송에서도 계속 멍하게 있었습니다. 시키 씨와 프레데리카 씨가 능숙하게 이야기를 주도했기 때문에 큰 사고가 나지는 않았습니다만, 끝나고 나서 프로듀서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대로 집에 돌아온 저는 오늘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타치바나. 틀림없는 제 성입니다. 저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다른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언제나 카나데 씨에게 저를 타치바나라고 불러달라고 투정을 부렸지만, 막상 정말로 타치바나라고 불리니 기분이 미묘했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미묘한 기분이 아닙니다. 이 기분은. 틀림없이. 슬픔이라고 불리는 감정입니다.

고개를 들어 방 안에 있는 거울을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타치바나 아리스가 거기 있었습니다. 어른인 척 하지만, 어른이 되고 싶지만, 결국은 어린아이인. 타인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한, 틀림없는 어린아이같은 타치바나 아리스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인정해야 합니다.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솔직해져야 합니다. 나는 하야미 카나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머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녀와 같은 높이에서 보고 싶었기 때문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그녀의 입술을 만지고 싶었기 때문에 그녀만을 바라보았고, 그녀가 나를 동등한 시선에서 바라봐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어린아이 취급에 화가 났고,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그릇된 행동 때문에 저와 카나데 씨의 사이는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다시 화해를 하고, 더욱 가까워 질 수 있을까요. 저는 냉정하게 해답을 찾으려고 했으나, 결국 또다시 어린아이처럼 울고 말았습니다.

정말 좋은데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건 왜 일까요.

 

 



 

언제부터였을까. 그 아이를 보면 내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 것은.

그 아이에 대한 첫 인상은 ‘귀엽지만, 어딘가 딱딱한 아이’였다. 검은색 머리에 파란색 리본을 달고 군청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작은 입을 꼭 다문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짙은 금색 눈동자는 테이블 위에 놓인 타블렛 PC를 향해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문득 오늘 처음으로 무대 위에 서게 되는 아이돌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구나. 저 아이인가. 저렇게 어린아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아직 나이가 적어서 그런지 긴장한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긴장을 다소 풀어줄 필요성을 느껴 출연진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었다. 타치바나 아리스. 이게 저 아이의 이름이구나.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안녕. 네가 아리스구나. 잘 부탁해.”

“타치바나 입니다!”

 

툭 하고 터져 나오는 반응에 조금 놀랬다. 하긴, 초면인데 바로 이름으로 부르는 건 좀 그랬나? 하지만 저 나이 때의 아이들을 친근하게 이름으로 불러주는 걸 더 좋아하지 않던가. 문득 그녀의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타치바나 아리스. 아리스. 음, 그런 건가.

 

“흐음, 이름이 싫은가 보구나?”

 

정곡을 찔린 건지 의자에 앉아있던 아이의 몸이 움찔거렸다. 확실히 초등학생이라면, 아리스라는 이름은 놀림거리가 되기에 충분하겠지. 다소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겠고. 어쩔 줄 몰라서 당황하는 아이에게 나는 자기소개를 건넸다.

 

“나는 하야미 카나데야.”

 

그리고는 오늘 서게 될 무대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타임테이블도 하나씩 짚으며 설명해주고, 모르는 것도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다. 초등학생 치고는 이해력이 빠른 편이라 설명하기도 편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같은 346 프로덕션의 아이돌이니, 자주 볼 일이 있겠지. 가볍게 생각하며 아리스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 뒤로도 종종 그 아이와 만나며 인사를 나누었고, 이것저것 대화를 할 시간도 있었다. 얼마 뒤 나는 동료 아이돌인 시키와 슈코, 프레데리카, 미카와 함께 LiPPS라는 유닛을 만들게 되었는데, 다들 아리스를 너무 좋아해서 자주 보게 되었다.

 

“에, 아리스? 토끼 안 좋아해? 아리스잖아?”

“아리스가 토끼를 싫어하다니. 말도 안 돼.”

“아리스가 아리스가 아니게 되어버렸네.”

“싫어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는 관계없잖아요!”

 

물론 놀리는 걸 좋아한다는 말이다. 시키와 슈코와 프레데리카는 요즘 아리스를 놀리는 게 인생 최고의 낙이다. 저 재미로 출근을 하고 레슨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처음에는 미카가 제동을 걸어줬지만, 이제 그녀는 지쳤다. 구석에서 측은한 눈빛을 보내는 게 전부다. 
나? 나는 물론 말릴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나도 놀리고 싶은 쪽이니까.

 

“우리 아리스, 이제 친구가 많이 생겼구나? 혼자 대기실 구석에 앉아 있을 때가 어제 같은데.”

“그 얘기는 이제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타치바나 입니다!”

 

나와 아리스가 처음 만난 얘기를 꺼내면 아리스의 얼굴을 항상 빨개진다. 그녀가 좋아하는 딸기처럼 새빨개진 얼굴은 정말로 귀엽다. 저 정도로 빨갛게 잘 익은 딸기라면, 먹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이야, 카나데. 아리스랑 사이좋구나!”

“절대 아니에요!”

“아, 얼굴 빨개졌대요~”

 

역시 시키와 프레데리카야. 저런 점을 귀신같이 포착한다니까. 결국 아리스가 울상이 되어 나를 바라볼 때까지 놀리는 건 계속되었다. 그래도 넷 중에는 내가 제일 덜 놀리는 편이고, 또 나를 가장 먼저 알게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울상이 되면 항상 나를 바라본다. 그러면 나는 멤버들을 다독거려 놀리는 걸 그만두고 아리스를 달래는 것이다. 이 패턴이 요즘 일상이 되었다.

어느덧 아리스도 유닛에 들어가게 되었다. 멤버는 미나미와 후미카, 유미, 그리고 아이코. 하나같이 성격이 부드러운 아이돌이다. 우리들과 있을 때처럼 놀림받는 일은 없겠지.

그렇게 유닛 활동을 시작하게 되자 그녀와 만나는 일이 뜸해졌다. 시키와 슈코와 프레데리카는 유닛을 처음 결성했을 때처럼 다시 미카를 놀리기 시작했고, 나도 한 번씩 도와주었다. 미카가 고통 받는 모습을 보며 웃다가, 문득 무언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미카를 덜 놀려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미카를 아무리 놀려도 아쉬움은 채워지지 않았다. 무엇일까. 사소한 아쉬움이었지만, 한 번 의문을 가지자 내 머릿속을 꽉 채우게 되었다.

해결하지 못한 의문을 품은 채, 혼자 얼굴을 찡그리며 휴게실에서 음료를 마시다가 에인헤랴르 다섯 명과 만나게 되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다가 문득 중심에 있는 아리스에게 눈길이 갔다. 그녀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말이 툭 튀어나왔다.

 

“레슨은 지치지 않고 따라가고 있니, 아리스?”

“윽……. 잘 하고 있어요!”

 

예전에 미친 듯이 연습을 하다가 지쳐서 레슨실 바닥에 너부러진 일이 떠올랐는지 아리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너무 지쳐서 쿨한 모습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바닥에 누워 있던 모습이 참 귀여웠는데.

 

“……아리스, 정말 잘 하고 있답니다…….”

“그래? 후미카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평소에 아리스에게 잘 해주는 후미카의 말이라 크게 신빙성이 없지만 일부러 믿어주는 척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는 편이 아리스에게 더 잘 먹힐 테니까.

 

“진짜에요!”

 

역시나. 바로 반응이 온다. 이래서 아리스가 좋다니까. 그 후로도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가 리더인 미나미가 팀원들을 인솔하여 떠나갔다. 다시 찾아온 정적 속에서 음료를 홀짝거리다가 문득 아쉬움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쉬움의 정체가, 아리스를 놀리지 않았던 거였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리스가 유닛 활동을 한다고 나와 자주 만나지 못한 이후부터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확실하다.

갑자기 내 안에서 아리스라는 존재가 크게 느껴졌다. 이렇게 크게 느껴질 줄은 몰랐는데, 어느새 이토록 커진 걸까. 나는 열이 나는 오른쪽 귀를 매만지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에게 느끼는 이 감정은 뭘까. 사랑일까? 아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정도라면……. 그럴지도.

불현듯 아리스의 입술이 떠올랐다. 아직 어린아이라는 티가 물씬 풍기는, 작고 방울진 입술. 방송에 나가기 위해서 화장은 하지만 입술은 칠하지 않는다. 아직 아무것도 바른 적 없는 그 순결한 입술에,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카나데? 계속 쉴 거야?”

 

슈코가 문틈으로 머리만 쏙 내민 채로 내게 물었다. 슈코가 찾으러 올 정도로 시간이 흘렀나.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시간을 많이 허비한 모양이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

 

오른손으로 귀를 쓸어내리며 슈코에게 말했다. 이렇게 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가진 채로 돌아간다면, 다른 아이들이 눈치 챌지도 모른다.

나의 혼란스러움과는 무관하게 시간을 흘러갔고, LiPPS의 공연 날이 되었다. 리더이자 센터인 나는 무대의 중앙에 서서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빨갛게 칠한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차분한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마지막 가사와 함께 조용히 눈을 감았고,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관객들과 천천히 눈을 마주치며 웃어주다가 구석에 있는 관계자석에 이르게 되었다. 특별한 스케쥴이 없는 동료 아이돌이 모두 거기에 있었다. 한명씩 눈으로 인사를 건네다가 가장자리에 앉은 아리스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눈이 아니라 눈 약간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한참을 보다가, 그녀의 눈이 향한 곳이 내 입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드디어 깨달았다. 아, 이 아이는 나를 좋아하고 있구나, 하고.

공연이 끝나고, 멤버들과 간단히 뒤풀이를 하고, 집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을 알아버린 이상, 예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다. 나의 마음은 숨길 수 있지만, 아리스는 그렇지 않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내게 직접 말하는 날이 오겠지.

서로 좋아하니 괜찮지 않겠어? 마음 한구석에서 달콤한 유혹을 건넸다. 그러더니 멋대로 아리스와 얼굴을 마주보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아리스의 옅은 입술이 내 붉은 입술에…….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엔 아리스가 너무 어리다. 그녀의 나이는 이제 12살. 아직 중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다. 본인은 또래에 비해 성숙하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아이다. 성숙하다는 것은 본인의 생각일 뿐이다.

어린 소녀는 여러 가지 착각을 하곤 한다. 동경과 존경, 친밀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한다. 나에 대한 아리스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친밀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동경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이런 말을 하는 게 건방져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름 스타일도 좋고 외모도 예쁜 편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우선은 집에 가서 자자. 자고 내일 생각하자. 계속 고민하기에는 오늘 공연장에서 체력을 너무 많이 썼다. 나를 바라보는 아리스의 태도를 볼 때, 아직까지 직접적인 고백을 할 때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고로 천천히 생각을 할 시간이 있다.

그러나 일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다음 날 사무실에서 휴식을 취하던 도중 아리스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아리스를 본 멤버들은 평소처럼 열심히 놀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나는 평소처럼 하지 않으면 아리스가 의심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느 때처럼 장난을 걸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리스가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언제까지 어린아이 취급을 할 거에요!”

 

사무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아리스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아리스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막지 못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프로듀서만이 그녀의 뒤를 쫓았을 뿐이다. 순간 나도 쫓아갈까 생각했지만, 일이 더 복잡해질 것 같아 그만두었다.

집에서 목욕을 하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역시, 이대로는 안 된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그녀와 거리를 두어야 할 것 같다. 조금씩, 천천히 거리를 두어 자연스레 마음이 멀어지게 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타인과 거리를 두는 건 내가 잘 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마음을 먹었으나, 가슴 한 쪽이 아려왔다.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마음이 납득하지 못했다.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래. 차라리 여기서 울자. 눈물과 함께 미련을 씻어 내리자.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감정소모를 너무 많이 했던 걸까. 늦잠을 자고 말았다. 나답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나섰다. 촬영장까지 가며 오늘 해야 할 말을 천천히 고르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며 연습을 해 보았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라는 생각이 들 때쯤 촬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침내 대기실에 도착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 문을 열었다. 수많은 눈이 내게 쏟아졌다. 나는 프로듀서와 멤버들의 눈을 보며 사과의 인사를 건넸다.

 

“미안해. 많이 늦었지?”

 

한쪽 구석에서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시선을 그쪽으로 향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슈코를 마지막으로 멤버들과의 대화가 끝이 났고, 드디어 가장 중요한 순간이 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굳은 얼굴을 보는 순간, 다 흘려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다시금 몰려왔다. 조금만 힘을 빼면 무표정한 가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떼며 감정을 구겨 넣었다.

 

“어제는 미안했어. 앞으로 언행에 주의할게.”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숨기지 못한 기대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 너무나도 그녀다워서, 하마터면 살짝 미소를 지을 뻔 했다. 안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내가, 미소를 지어서는 안 된다.

 

“……타치바나.”

 

무너졌다. 그녀의 표정이 무너졌다. 내가 어떤 의미로 그녀를 불렀는지, 그녀 자신도 잘 이해한 듯했다. 됐다. 그러면 되었다.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벽을 쌓았으면, 된 거다.

방송을 진행하는 내내,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말실수를 해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멍하니 있다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도 절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진행상 어쩔 수 없이 봐야할 때만 봤을 뿐, 그 이외에 사적인 움직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윽고 방송이 끝났고, 저녁을 같이 먹자는 멤버들의 권유를 거절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멍하니 침대에 기대어 있다가 앞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속마음을 철저히 숨긴 채, 남들과의 거리만을 고집하는 하야미 카나데가 있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을 텐데. 누군가 와서 내 손을 잡아주고 수갑을 채워주길 원하고 있을 텐데. 언제나 그 손을 놓고 금방 사라져버리기만을 한다. 내일이 오지 않는 장소에서, 단 둘이서 밤 새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을 감춘 채로.

이제 아리스와의 관계는 끝이 났다. 이제 우리는 같은 회사에 있는 동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단지 같은 일을 하는 사무적인 관계. 거짓된 미소를 띄고, 마음에도 없는 말로 서로를 장식하는 사이.

나는 손을 놓았고, 우리의 관계는 사라졌다.

 

 

 

 

 

제목은 다들 아시겠지만 카나데의 솔로곡 Hotel Moonside와 아리스의 솔로곡 in fact의 첫 가사를 섞은 겁니다.

본문에도 두 노래의 가사가 아주 조금씩 섞여 있습니다.

이번엔 카나데와 아리스의 이야기를 써 보았습니다.

뭔가 애매하게 끊긴 것도 같지만, 의도한 겁니다. 그저 갈등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이후에 다시 친해져서 연인이 될 지, 영원한 직장동료가 될 지는 열린 결말로 놓아두겠습니다.

 

 

 

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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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기업인 미시로 프로덕션의 한 건물. 두 소녀가 작은 휴게실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다소 가라앉은 공기로 보아 두 사람 사이의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이윽고 작은 소녀가 큰 소녀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니까 카나데 씨가 방해된다는 거예요!”


허리까지 오는 짙은 갈색 머리를 푸른색 리본으로 묶은 소녀는 언뜻 보면 성숙해 보였지만, 아직 앳된 얼굴이 그녀의 미성숙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분명 미소녀라 부를 수 있을 만했고, 성장하면 더욱 미인이 될 가능성이 엿보였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딴청을 부리는 큰 소녀는 짧은 남색 머리에 하늘색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교복이 어색할 정도로 성숙함이 흘러넘쳤다. 사복을 입고 거리에 나간다면 그 누구도 그녀가 성인임을 의심하지 않을 정도였다.


매번 그렇게 방해하실 거예요?”


작은 소녀, 타치바나 아리스는 큰 소녀, 하야미 카나데에게 소리쳤다. 항상 어린아이 취급을 받기 싫어하는 그녀였지만, 지금의 모습은 영락없이 떼쓰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카나데는 그런 아리스의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역시 놀리는 재미가 있는 귀여운 아이였다.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뿐이야. 아리스.”

후미카 씨랑 같이 있을 때마다 방해하는 게 카나데 씨가 하고 싶은 일인가요? 그리고 타치바나 입니다!”


아리스가 화를 내는(혹은 떼를 쓰는) 경우는 몇 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일은 주로 후미카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 점을 카나데는 잘 알고 있었기에 매번 방해를 했던 것이다.


방해한다니 말이 좀 심한걸. 나도 후미카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반쯤은 네가 당황하거나 화내는 귀여운 모습을 보고 싶은 거지만. 카나데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미시로 프로덕션에는 수많은 동료 아이돌이 있지만, 아리스만큼 놀리는 재미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굳이 한 명 꼽자면 미카일까. 카나데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훔쳤다.


둘이서 함께 할 시간도 많잖아요! 지난주엔 쇼핑도 같이 갔다면서요!”

쇼핑? , 물론이지. 후미카랑 같이 옷을 사는 건 아주 즐거운 일이었어. 너도 아시다시피 그 아이는 아름답지만 잘 꾸미고 다니지 않으니. 이것저것 옷을 입혀보는 건 정말 재밌었단다.”


카나데는 잠시 지난주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유닛 활동을 하던 도중 후미카의 부탁으로 인해 쇼핑을 갔던 때를. 후미카가 먼저 말을 꺼냈으나 나중엔 자기가 더 신이 나서 후미카에게 이것저것 입혀보았다.


, 너는 이 느낌을 모르겠구나?”

우으…….”


카나데는 능숙하게 말을 돌리며 아리스를 놀려댔다. 미시로 프로덕션 아이돌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히는 마이페이스와 말솜씨를 가진 카나데다. 통제불능의 유닛이라 불리는 LiPPS를 그나마 제어할 수 있는 리더인 그녀다. 또래에 비해 성숙하다고 하나 아직은 어린아이인 아리스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리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찾다가 항상 들고다니던 태블릿PC가 떠올랐으나 연습실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혀를 찼다. 그래도 기세는 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계속 카나데를 노려보았다. 그때 휴게실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리스 쨩과 카나데 씨는……. 먼저 간 모양이네요.”


순간 두 사람 모두 흠칫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듣는 사람은 편안하게 해 주는 작은 목소리는, 틀림없이 후미카의 목소리였다. 둘이서 이야기를 하러 간 걸 먼저 간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카나데가 휴게실 밖으로 나가 그녀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렇군요 후미카 쨩! 그러면 같이 운동이라도 하지 않을래요?”

운동은 좀, 힘들겠지만……. 같이 걷는 정도라면 괜찮을 거 같아요.”

좋네요! 그럼 걸어볼까요!”


열혈소녀의 우렁찬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로 시선을 돌려 눈빛을 교환했다. 항상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지만, 이번만큼은 뜻이 일치했다.


우선 저 불청객부터.”

처리하죠.”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카나데와 아리스는 비장한 각오로 휴게실을 나갔다.

 





제목이 좀 그런데 저 제목 말고 떠오르는 게 없어서.......

카나아리후미는 엽편으로 짤막하게 쓰는 게 즐거워요.

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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