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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8.22 [SHHis] 단 한 번만이라도

시나리오 '노 캐럿'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나와 닮은 사람이 있었다. 닮았지만 다른 사람. 외모는 같을지 몰라도 그 속에 들어 있는 감정은 많이 다른 사람. 그 사람은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온갖 감정이 느껴졌다. 우울함, 한심함, 분노, 슬픔, 연민.

그리고 곧 무감정한 표정이 되었다.

그 어떤 감정보다 가장 견디기 힘든 감정이었다. 차라리 화를 내줬다면, 차라리 동정을 해줬다면, 차라리 비웃어 주었다면. 하다못해 애써 무시를 해줬다면. 그러나 그런 일말의 노력도 없이, 흐릿한 눈은 초점을 잃었다. 서서히 부옇게 힘을 잃어가던 눈은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망막에, 내가 비추어지기는 할까. 나는 그녀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사람일까.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비웃음조차 사라진 이 공간에서, 오로지 자기혐오만이 고개를 들었다. 구역질이 나올 거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없던 힘을 짜내어 화장실을 나왔다. 차가운 공기만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언니는 또 새벽부터 출근한 모양이다. 아이돌도 아니면서 아이돌보다 훨씬 부지런한 사람이다. 나는 왜 언니처럼 부지런하지 못할까. 유전자를 먼저 다 가지고 간 걸까. 어쩌면 나보다 언니가 더 아이돌에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내 방에 있는 나미쨩의 사진에 눈길이 갔다. 나의 우상. 나의 아이돌.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나미쨩을 생각하며 아이돌의 꿈을 키우곤 했는데. 언제부터였을까? 점점 그녀의 사진을 보는 시간이 적어졌다.

멍하니 그녀의 사진을 보다가 알람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연습실에 갈 시간이다. 도저히 연습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나는 이제 아이돌이고, 프로니까.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서는 프로가 될 수 없다. 곧바로 가방을 챙겨 연습실로 향했다.

 

 

 

그래, ……. 2곡째에는 그게 좋다고 생각해.”

댄서들과 편하게 대화하는 미코토 씨를 보며 무릎을 움츠렸다. 댄서들과 안면이 있는 사이여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녀의 실력이 워낙 출중하여 자연스레 의견을 경청하게 된다. 아마 예전에 같이 일했을 때도 그랬겠지. 뭐든 잘하는 사람이니까.

살며시 손을 뻗어보았다. 당연히 닿지 않는다. 내 팔은 짧고, 내 손은 작으니까. 손가락 사이로 그녀와의 거리를 가늠해보지만, 멀게만 느껴진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같은 이름을 공유한다 해도, 그녀의 눈빛이 내게 오는 일은 없겠지.

문득 그녀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같이 유닛 활동을 하게 될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사무실에서 기다리던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던 미코토 씨를 보았다. 갈색과 백금색이 어우러진 머리를 휘날리며 인사를 건네던 모습은 보며 아름다운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저 유닛 활동에 대한 기대감이 조금 올라갔을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를 제대로 보게 된 건 연습실에서 처음 연습을 했던 때였다.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으로 춤을 추는 그 모습, 그 자태. 눈앞에서 펼쳐진 천상의 가무를 보며 나는 더없는 황홀함을 느꼈다. 나미쨩의 노래를 들은 뒤로 겪은 가장 큰 충격이었다.

마지막 스텝을 끝낸 뒤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옥색과 갈색이 뒤섞여 미려하게 빛나는 그 눈동자에 나의 얼굴이 비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나미쨩을 보고 아이돌을 꿈꿨듯이, 미코토 씨를 보며 아이돌이란 이렇게 돼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내가 담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고 있지만 인식되지 않는다. 흐릿한 눈동자에는 오로지, 아이돌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내가 아니라, 아이돌에 대한. 내가 아닌.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고, 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아마 아무도 모르겠지. 언니도, 프로듀서도 모를 것이다. 미코토 씨는 나와 SHHis를 함께 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부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래도, 그래도 해야 한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혼자서라도 다시 춤추기 시작했다.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려는 것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저기, 죄송해요! 미코토 씨가 위에서 턴 하려는 것 같아서요!”

리프트 위에서 펜슬 턴을 하려는 그녀를 보고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올라가고 있었고, 리프트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스태프들이 의사소통하는 소리에 묻혀 전달되지 않았다.

안 돼, 보이질 않아……. 멈춰야 해, 멈춰야 해, 멈춰야 해!”

이 상황에서 리프트를 멈출 방법이 뭐가 있을까. 다급하게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나와 미코토 씨의 위치를 보았다. 미코토 씨는 이미 거의 다 올라간 상황이었고, 나는 아직 올라가는 중이었다. 미코토 씨는 떨어지면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위치였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떨어져도 죽지는 않는다. 조금, 아프겠지만…….

……, 돌자…….”

여기서 펜슬 턴을 한다.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내가 먼저 위험한 행동을 하면 스태프들이 리프트를 중지할 테고, 그녀도 무사히 내려올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어쩌면, 미코토 씨가 나를 볼지도 모른다.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온몸에 급격히 피가 돌기 시작했다. 좀 더 동작을 크게 하면, 좀 더 많이 다치게 되면 더 높은 확률로 나를 보게 되지 않을까. 일부러 뛰어내릴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너무 지나친 행동이다. 어디까지나 미코토 씨가 위험한 짓을 하는 걸 막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나를 위한 게 아니라.

마음을 굳게 먹은 뒤 크게 돌았다. 발바닥에 피가 날 정도로 연습한 펜슬 턴은 리프트 위에서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하지만 공간이 너무 좁다. 넓은 연습실에서만 연습한 탓에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는 익숙하지가 않았다. 팔과 다리가 난간에 부딪혔고, 이내 몸의 균형을 잃었다. 앗 하는 사이에 내 몸은 리프트 밖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놀람과 당황이 섞인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긴 목소리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마침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를 잡았다. 분명히 그녀의 목소리였고, 분명히 나의 이름이었다.

니치카쨩……?”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의식이 가라앉았다.

 

 

 

 

노 캐럿 시나리오를 보고 떠올라서 썼습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시나리오 내내 니치카는 미코토의 이름을 부르지만 미코토가 니치카의 이름을 부른 건 리프트에서 떨어질 때 단 한 번뿐이더라구요.

앞으로의 시나리오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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