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켜서 달력을 본다. 22. 2월의 둘째 날. 새해도 어느덧 한 달이나 지났다. 슬슬 새해에 참배를 하며 했던 다짐이 흐려질 시기다. 사실 인간의 결심이란 사소한 것에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인간이란 매우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애초에 결심을 하지 않으면 된다. 기대를 하지 않으면 배신도 당하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기에 나는 나 자신을 자각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새해 다짐이란 걸 한 적이 없다.

다만 작년엔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겪었고, 아이돌이라고 하는 새로운 빛을 찾기도 했다. 빛을 향해 함께 계단을 올라가는 동료들도 생겼고, 나와 같은 어두운 빛을 가진 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렇기에 나 자신의 기조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고, 새해 다짐이란 걸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바람은 두 가지. 하나는 아이돌로서 지극히 당연한 바람이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것. 톱 아이돌이라 불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수많은 아이돌의 로망이라 할 수 있는 그 호칭을 손에 넣어 유일무이한 인간이 된다. 아직 넘어야 할 벽이 많지만, 땅을 기는 인간이 하늘을 나는 꿈이라도 꿔 보는 건 죄가 아니지 않나. 태양을 향해 날갯짓하는 이카로스처럼 한 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바람은……. 아니다. 그만두자. 지금의 분위기를 보니 도저히 이루어질 거 같지가 않다. 나는 고개를 들어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안즈는 편안한 자세로 숙면을 하고 있었고 리카와 미레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코우메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부정한 존재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저주가 걸린다. 함부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좋다.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보았다. 지금 사무실에 있는 건 방금 스케쥴이 끝난 우리 LittlePOPS . 다들 연초부터 바빠서 좀처럼 보기가 힘들다.

, 바쁜 건 좋은 거다. 톱 아이돌에 좀 더 가까워지는 길이기도 하고. 평소라면 납득하고 휴식을 취하거나 사색에 잠겼을 테다. 하지만 오늘은 22. 내일은 23. 23일이다.

다시 한 번 멤버들을 훑어보았다. 각자 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사실 평소와 같은 모습이다. 전혀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나는, 아니 날짜가 평소와 같지 않은데.

불현듯 란코의 얼굴이 떠올랐다. 폰을 꺼내서 란코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이번에 고향인 쿠마모토에서 열리는 행사에 간다는 내용이었다. 이틀 동안 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끝나면 23일 저녁. 밤에 다시 도쿄로 돌아오기에는 무리일 테니 빨라도 4일에 돌아올 예정이다.

4. 3일이 아니고 4일이다. 하필 4일이다. 고작 하루 차이로 나와 란코를 갈라놓다니, 운명의 신이란 어찌 이리도 잔혹한가. 신이 내리는 시련을 뛰어넘는 것이 인간의 역할이지만, 나는 신화 속 영웅이 아니기 때문에 시련의 고통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멘탈이 다소 무너진 느낌이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스카쨩……. 집에…… 가는 거야……?”


알고 싶지 않은 무언가와 대화를 하고 있던 코우메가 말을 걸어왔다. 경계하면서 고개를 돌려봤는데 다행히 코우메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내 망막에 비치지 않을 뿐, 사실 코우메 옆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존재론을 외치고 다니는 내가 무언가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지는 건 굉장한 모순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론 감성이 이성을 이길 때도 있는 법이다. 인간은 감성의 생물이니까.


아아. 오늘은 조금 사색에 잠기고 싶어서 말야. 나의 존재론에 관한 고찰이 떠올라서. 먼저 가볼게.”

……. 내일 봐…….”


소매를 흔들며 배웅을 해주는 코우메를 뒤로한 채 사무실을 나섰다. 긴 복도를 걸으며 가고 있는데 앞쪽에서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다.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나. LiPPS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프레데리카를 제외한 네 사람과는 유닛 활동을 해본 적이 있어 나름대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와는 조금 파동이 맞지 않지만, 기본적으로는 좋은 동료들이다.


, 아스카 쨩이잖아.”

안녕~”

오랜만이네. 퇴근하는 길이야?”


다섯 멤버가 각자 인사를 걸어왔다.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곤 그들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같은 인사, 평소와 같은 눈빛, 평소와 같은 태도다. 역시. 기대를 하지 말았어야 했나. 기대하지 않으면 배신을 당할 일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야.

하지만 기대는 나 혼자서 만든 허상. 이들에게 잘못은 없다. 그렇기에 배신당한 내 기분을 이들에게 돌려줄 필요는 없지. 속으로는 쓰게 웃어도 겉으로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평소처럼. 평소와 같게.


. 내 존재에 관한 회의감이 들어서 말야. 잠시 타인과의 접촉을 끊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해졌어.”

피곤해서 먼저 가보겠다는 거지? 알았어. 푹 쉬어.”

내일 봐!”


LiPPS 멤버들을 뒤로 한 채 걸었다. 혼자서 계속 걸었다. 집에 도착해서 책상에 놓인 달력을 보았다. 23일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바보같이.”


달력을 덮었다. 최근 나답지 않은 인연을 많이 얻어서 망각하고 있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아웃사이더라는 사실을. 이 사회의 통속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나와 어울리지 않는 타인과의 접촉으로 인해 나 자신이 많이 변한 걸까. 작년에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걸 기대하다니. 날짜란 결국 상대적인 것이고 내게 있어 특별한 날이 타인에게도 특별할 리가 없을 텐데. 오히려 상대방에게 있어 그 날은 불행한 일을 겪은 부정적인 기념일일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역시, 나의 기념일을 축하해 줄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다.

……감았던 눈을 떴다. 고찰하다 보니 잠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벽에 걸려있는 시계의 시침은 121 사이에 있었다. 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의 기념일을 위해, 혼자서 조용히 읊조렸다.


생일 축하해. 아스카.”


혼자서 외치고 나니 조금 싱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 전엔 배신감까지 들었는데. 마음을 고쳐먹으니 이리도 간단한 거였나. 역시 고독은 사람을 완전하게 만든다. 항아리에 든 독충 중에 살아남은 한 마리가 가장 독이 강한 것처럼.

 

 

 

붙임머리를 달고 옷을 입으며 거울을 보았다. 시니컬한 니노미야 아스카가 서 있었다. 몇 달 정도 돌아간 느낌이다. 어젯밤에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대로 출근하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 활동하고 있는 유닛인 LittlePOPS는 꽤나 밝은 느낌의 유닛이다. 프로인 만큼 확실히 밝은 가면을 쓰고 가야겠지.

집을 나선 뒤로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는 날이었다. 회사에 도착하고, 동료들을 만나고, 프로듀서와 함께 로케이션 장소로 가서 공연을 하고, 밥을 먹고, 방송국에 가서 촬영을 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온다. 오늘따라 유독 안즈가 동료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많이 보이긴 했지만, 때론 그런 날도 있는 거겠지. 리카와 미레이가 좀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날이 추워서 그런 거겠지.

정문을 지나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늘 내내 마음 한구석에서 자리 잡고 있던 생각 하나를 곱씹었다. 이대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복도를 지나, 사무실 문을 열면, 갑자기 숨어 있던 동료들이 나타나 케이크와 함께 축하해 주는 거야. 서프라이즈 파티. 갑작스러운 걸 좋아하는 녀석들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두근거리는 마음과는 달리 내 머리는 냉정해지라고 되뇌었다. 기대를 하지 마. 배신감만 더 커질 뿐이야. 평소에 주변 사람에게 네 생일을 알리기는 했어? 전혀. 오늘이 생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기껏해야 란코 정도일걸? 생일을 알려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무슨 결과를 바라는 거지? 한심하군. 넌센스 조차 되지 못해.

그렇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복도를 지났고, 맨 앞에 서 있던 프로듀서가 사무실 문고리를 잡았다. 그 어느 때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문고리가 돌아갔고……. 프로듀서는 안으로 들어갔으며, 안에 있던 다른 아이돌은…….

소파에 앉아서 과자를 먹고 있었다.


, 수고했어. 화과자 먹을래?”


슈코가 우리를 향해 화과자를 건넸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전혀 먹을 기분이 아니었기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옆에 있던 소파에 털썩 걸터앉았다. 슈코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시키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급격하게 피로가 밀려왔다.

여러 가지 잡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그보다는 피곤함이 제일 컸다. 생각과 감각이 한데 엉켜 새까맣게 굳어 내 눈을 가렸고 그 상태 그대로 어둠이 가져다 준 편안함에 몸을 맡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깨 쪽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눈을 떴다. 무릎에는 담요가 한 장 덮여 있었고 옆에는 안즈가 있었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걸 보니 어느새 밤이 된 모양이다.


자고 일어나니까 다들 퇴근했나 봐. 우리도 가야지.”


크게 하품을 하며 안즈가 말했다.


프로듀서는 먼저 가 버린 건가. 하여튼, 어른이란.”


보통 사무실에서 잠들면 프로듀서가 퇴근하기 전에 깨워주고 가는데 오늘은 그냥 갔는지 안즈 뿐이다. 잠시 프로듀서에 대한 불만을 풀어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시간이 약인 걸까. 기분이 많이 나아진 상태다. 어째서 인간은 밤이 되면 잠을 자야 하는지 종종 불만을 품곤 했지만, 오늘만큼은 셀레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녀가 친 밤의 장막 덕분에 인간은 잠을 자게 되었으니까.

안즈가 천천히 인형을 챙기는 동안 먼저 짐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생각하며 문고리를 돌렸다. 이따 밤에 란코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언가 터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여러 번 울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리카와 시키, 프레데리카, 그리고 슈코가 손에 폭죽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카나데와 미카, 미레이, 코우메와 함께 프로듀서가 케이크를 든 채 서 있었다. 케이크에 꽂힌 초의 개수는 정확히 14개였다.

그리고……. 나와 가장 가까운 곳. 그들의 제일 앞에는 언제나 그렇듯 검은색 고스로리 옷을 입은 란코가 서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한 손을 이마에 대고 한 손을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후후후. 영혼의 공명자여! 그대의 탄생을 축복하기 위해 날개를 펼치고 공간을 넘어 여기에 왔노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란코. 분명 오늘까지 쿠마모토에 있는 거 아니었어……?”

, 거짓말이었다는 거지. 사실 행사는 오전에 끝났답니다.”


어느새 폭죽을 던져버린 시키가 웃으며 대답했다. 말하는 걸로 미루어보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천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연기도 천재일 줄이야. 정말 멋지게 속아 넘어갔다.


그러니까 말야.”


잠시 숨을 고른 시키가 작은 목소리로 하나, .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생일 축하해. 아스카!””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여전히 멍해 있던 나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표정을 관리하려 했으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하여간, 인간의 몸이란 불합리하다니까. 완벽하게 통제 할 수 없는 육체라니.


생일이라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단순히 내가 태어난 날에 지나지 않지. 타이밍이 어긋났다면 하루 전이나 이튿날에 태어났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내가 생일이 달랐다면 나라는 인간이 달라졌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2일에 태어났든, 4일에 태어났든 나는 여전히 니노미야 아스카고, 아이돌을 하고 있을 거야. 사람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보단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니까. 그런 의미에선 생일보단 사망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태어나는 건 내가 정할 수 없지만, 죽는 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뭐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난 아직 살아있는 인간이야. 언젠간 죽겠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겠지. 정해지지 않은 사망일을 생각하는 것보단, 이미 정해져 있는 생일을 축하하는 게 더 생산적일지도 모르겠군.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 준 너희들의 성의도 고려해서 말야. 그러니까.


다시 호흡을 골랐다. 조금은 진정이 됐다. 이제는 표현만 하면 된다. 가슴 깊은 곳부터 머릿속까지 가득 채운 이 감정을.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 표현할까. 아니다. 오늘만큼은 솔직해지자. 담백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말하자. 지금 짓고 있는 솔직한 미소와 함께.


고마워.”

 




2018. 02. 03. 니노미야 아스카의 생일을 축하하며.

사실 3일에 맞춰서 올리려고 했는데 무려 일주일이나 늦어졌네요 흑흑

여튼 늦었지만 아스카 생일 축하한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Posted by sahyun
,

, 그대도 그리모어를? 그런 금단의 책을 타인에게 드러내다니…….”


란코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참기가 힘들지만, 귀엽다고 말을 하면 더 부끄러워하겠지. 물론 더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보고 싶다만, 여긴 다른 사람도 있는 카페다. 눈이 많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나는 상관없어. 너와 함께라면, 나의 새로운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거든.”

?”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조금 내리자 양손으로 꼭 붙잡고 있는 그림 일부가 보였다. ‘상처받은 악희, 내 이름은 브륜…….’ 라는 글자와 함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란코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등 뒤에는 검은 날개를 휘날리는 그림은 가히 악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자태였다.

역시 신은 죽었다. 니체의 유명한 말을 곱씹으며 쓰게 웃었다. 있어 보이는 것처럼 흉내만 내는 나와는 달리, 란코는 뭐든 진짜다. 어디서든 주목을 받는 수려한 용모, 팬들을 절로 끌어들이는 청아한 목소리, 스스로의 옷을 디자인 할 정도로 빼어난 그림 실력, 그리고 무엇보다 빛나는 순수함까지. 이렇게 타고난 재능만으로도 타인을 압도하는데 심지어 노력가이기도 하다. 시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언어도 매일 밤 사전을 보며 공부를 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그녀와 친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 다시 한번 외쳐본다. 신은 죽었다. 저렇게 완벽한 사람이 두 발로 걸어 다니는데, 내가 어떻게 신의 존재를 믿을까.


새로운 문…….”


란코가 잠시 내 말을 되새기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특유의 웃음소리로 화답해주었다. 듣기만 해도 마음이 절로 안정되는 목소리다.


좋다! 때가 되면 그대를 내 약속의 세계에 초대하마!”


손을 펼치는 그녀를 보며 나도 미소를 지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완전함을 원한다그렇기에 나는, 내가 가지고 싶은 재능을 모두 가진 그녀를 친애하고 또 존경하며 그리고 갈구한다. 내가 그녀에게 완벽함을 배우려는 의미도 있지만, 그녀의 곁에서 언제나 그 완벽함을 보고 듣고 느끼고 싶기에. 나는 항상 그녀의 옆자리에 있기를 원한다.


어디, 보여다오! , 이건 단죄검의 목걸이……!”


나의 모자란 그림 실력을 보고 핀잔을 주기는커녕, 화들짝 놀라며 나의 아이디어를 칭찬해주는 란코의 모습은 실로 지상에 내려온 천사와도 같았다. , 본인은 천사보다는 마왕이나 타천사를 좋아하니 천사 같다고 하면 싫어하려나? 아니면 내가 한 말이라고 좋아해주려나. 갑자기 엄청나게 신경 쓰여서 심란해졌다. 내가 홀로 심각해하자 한참 내 노트를 보던 란코가 나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 아스카. 내가 말을 잘못하기라도……?”


평소의 힘찬 목소리가 아니라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란코가 정말로 당황하거나 했을 때 나오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다. 평소의 란코도 귀엽지만, 이 상태의 란코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귀엽다. 나는 표정을 펴고 대답을 건넸다.


안심해도 돼. 란코. 네 입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언어는 내게 있어 축복과도 같은 것이니까. ‘잘못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지.”

……. , 후후후. 역시 이 세계를 구원할 사도로다. , 나와 함께 어둠의 날개를 펼치자!”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말을 쏟아내는 란코를 보며, 다시금 웃음을 지었다. 란코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미소를 짓게 된다. 학교에서 으레 하고 다니는 형식적인 미소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아아, 또다시 가슴 속에서 감정이 요동친다. 세계를 냉정히 바라보는 관측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감정이. 두뇌를 멈추게 하며 이성을 무디게 하는, 감정의 극한. 희망보다도 뜨겁고 절망보다도 깊은 것.


란코.”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사랑이다.

 

 

 




제목의 'Endless Possibilities'를 보시면 알겠지만, 신데렐라 극장 애니메이션 13화의 뒷이야기를 아스카의 시선에서 아주 짧게 써 보았습니다. 'Endless Possibilities'는 13화의 제목이죠.

'희망보다 뜨겁고 절망보다도 깊은것'은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모 캐릭터가 하는 대사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상황에 어울릴거 같아 썼습니다.

원래 극장 13화 보고 뽕이 차서 바로 쓰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사정과 다크소울 때문에 늦어졌네요.

앞으로도 계속 짧은 아이디어를 이런 식으로 짧은 엽편으로 써서 올릴 예정입니다.





Posted by sahyun
,

아이돌,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그 사람의 말에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깜짝 놀라서 튕기듯 고개를 들었고, 다시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는 내게 한없이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아이돌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할 준비가 되었냐고.

노력.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단어였는데, 지금은 미묘한 심정이다. 내가 노력을 싫어하게 된 계기가 없어진 셈이니까

결국 중요한 건 나의 마음가짐이다. 몇 년 간 노력을 부정하던 내가 노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노력을 할 수 있겠는가. 노력해서……. 아이돌이 될 마음이 있는가.

나는…….”

. 그 사람. . 노력. 연습. . 희망. 아이돌. 무대. .

하고 싶어. 아이돌.”

수 년 간 하지 못했던 그 말을, 마침내 꺼냈다.

그곳에는,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을 겁니다.”

나의 프로듀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몇 번이고 나뉘었다가 합쳐진 세 사람의 목소리는 아득히 먼 곳을 향해 올라가다가 잠시 멈추었다. 2절이 끝난 것이다. 간주가 흘러나오는 동안 잠시 숨을 고르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베테랑인 린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고, 다소 지쳐 보이는 나오는 린의 미소에 화답하듯 살짝 웃어주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웃었지만 표정은 어땠을지 모르겠다. 온몸에 흘러넘치는 감정은,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종류이니까.

이제 길었던 간주가 끝나고 다시 마이크를 잡을 때가 되었다. 간주의 끝을 고하는 솔로 파트는 내가 하게 되어있다. 이 부분은 노래의 여러 가사 중에서도 내 마음에 가장 와 닿았던 부분이었는데, 실제로 부르기 위해 마이크를 잡고 있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どこかれてた

빛나는 것을 어딘가 두려워했었던

あの自分にただ

그 날의 자신에게 그저

 

한 소녀를 떠올렸다. 빛나는 무대 위 아이돌을 동경했지만 결코 다가가지 못했던 소녀. 노력의 가치를 부정하며 홀로 병실에 남겨진 소녀를. 자신은 안 될 거라며 고개를 젓는 소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ずっと / / いて

계속 / 앞을 / 향해


계속하라고 외치는 나와, 앞을 가리키는 린과, 그곳을 향해 가라는 나오. 세 사람의 마음을 담아 다시 노래했다.

 

じてえてあげたいよ

믿으라고 전해주고 싶어

 

호죠씨라면, 가능할 겁니다.’

나를 설득하던 프로듀서의 말이 떠올랐다. 믿음이라는 두 글자와 함께 떠오른 그 말. 세월이 흘러 변해버린 나를 보고도 믿어준 프로듀서. 그를 떠올리자 마음이 따뜻해지며 살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Posted by sahyun
,

언제부터였을까요. 그 사람을 보면 제 심장이 뛰기 시작한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첫 인상은 ‘예쁜 사람’ 이었습니다. 짧은 남색 머리에 하늘색 교복을 입은 그 사람의 눈동자는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조금씩 시선을 내려 보니 밑에는 오뚝하게 솟은 콧날이, 그 아래는 새빨간 입술이 있었습니다. 피처럼 붉은 입술은 요염하기 짝이 없어, 입고 있는 교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구석에 홀로 앉아 있는 저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걸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손에 든 종이와 제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아마 제가 누군지 확인하는 거겠지요. 이윽고 제 이름을 발견했는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안녕. 네가 아리스구나. 잘 부탁해.”

“타치바나 입니다!”

 

무의식적으로 내뱉고 난 뒤 아차 싶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갑자기 소리를 지르다니요. 그것도,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아 홀로 구석에 있는 처지인 데도요. 겨우 말을 걸어준 사람에게 쌀쌀맞게 대하다니, 너무나도 어린아이 같잖아요.

 

“흐음, 이름이 싫은가 보구나?”

 

하지만 그 사람은 크게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걸어주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서로 통성명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야미 카나데야.”

 

카나데. 하야미 카나데. 저는 그녀가 떠나간 뒤에도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되뇌었습니다. 막 아이돌로 데뷔를 한 제게 있어 처음으로 이름을 알게 된 동료였으니까요. 첫 무대를 앞두고 긴장한 채로 구석에 앉아 있는 제게 먼저 말을 걸어준 건 오로지 그녀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첫 무대를 무사히 끝냈고, 다른 동료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와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도 많이 있어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아리스, 이제 친구가 많이 생겼구나? 혼자 대기실 구석에 앉아 있을 때가 어제 같은데.”

“그 얘기는 이제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타치바나 입니다!”

 

그녀는 저를 만날 때마다 곧잘 놀리곤 했습니다. 데뷔 무대 때의 제 모습을 얘기하는 건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에요. 새 아이돌이 들어올 때마다 저 얘기를 한다니까요. 정말 지치지도 않나 봅니다.

 

“이야, 카나데. 아리스랑 사이좋구나!”

“절대 아니에요!”

“아, 얼굴 빨개졌대요~”

 

옆에 있던 시키 씨와 프레데리카 씨가 히죽거리며 놀렸습니다. 씩씩거리며 두 사람은 쫓아가다가 문득 옆에 있던 거울을 보았습니다.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제 얼굴이 보였습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 정도라면 놀림감이 될 만하겠네요.

항상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그녀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라 힘이 빠졌습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저는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겠지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항상 그랬지만, 그녀를 마주할 때면 더욱 간절해져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카나데 씨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다니요. 어린아이를 항상 놀리기만 하는 유치한 사람을요. 박학다식한 후미카 씨나 자연스레 어른스러움이 배여 나오는 미나미 씨 같은 어른이 되어야 할 텐데, 카나데 씨 같은 어른이 되면 안 되겠죠.

그렇게 다짐을 하며 아이돌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동경하던 후미카 씨와 미나미 씨와는 같은 유닛이 되어 친밀한 관계가 되었고 많은 점을 배웠습니다. 처음 생각하던 대로 두 분은 정말 배울 점이 많은 어른이었어요. 물론 나머지 구성원인 아이코 씨와 유미 씨도 어른스러운 분들이었죠.

활동을 하며, 배우기도 하며 차분히 생각을 해보니 역시 카나데 씨 같은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좀 더 인텔리하고 쿨한 타치바나 아리스가 되어야 해요. 그게 제 아이돌로서의 목표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여전히 카나데 씨를 볼 때면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카나데 씨가 매번 저를 ‘아리스’ 라고 부를 때면 이제는 습관처럼 ‘타치바나 입니다!’ 라고 대답하곤 했지만, 은연중에 저를 이름으로 불러주길 바랬습니다. 저를 아리스라고 불러줄 때마다,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가득 찬 느낌이었습니다. 나이가 비슷한 친구들도 아리스라고 부르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에요.

이 느낌 때문일까요. 카나데 씨와 얘기를 할 때 멍하게 카나데 씨를 바라보는 빈도가 늘었습니다. 주로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시선이 멈춰요. 어떤 스케줄이 있는지에 따라 입술의 색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어떠한 색이더라도 카나데 씨의 입술은 매력적이었습니다. 옅으면 옅은 대로, 짙으면 짙은 대로요.

특히 카나데 씨가 「Tulip」을 센터에서 부를 때는 정말이지,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빨갛고 도톰한 그 입술을, 노래의 가사처럼……. 카나데 씨의 공연을 본 날은 하루 종일 머릿속에 「Tulip」의 가사가 울려 퍼졌습니다.

공연을 본 다음 날, 사무실에서 카나데 씨와 만났습니다. 그녀는 평소처럼 제게 장난을 치며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갑자기 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는 그녀의 팔을 쳐내며 소리쳤습니다.

 

“언제까지 어린아이 취급을 할 거에요!”

 

사무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라 제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수십 개의 눈이 저를 쳐다보자 퍼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조심스레 눈을 그녀의 얼굴 쪽으로 돌렸습니다. 카나데 씨의 놀란 표정을 보는 순간, 저는 눈을 감고 뒤를 돌아 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누군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한 채 밖으로 달렸습니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방구석에 박힌 채 양 팔로 무릎을 감싸 안았습니다. 돌연 눈물이 흘렀습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마음껏 울고 또 울었습니다. 넘쳐흐르는 이 감정은, 울지 않고서는 풀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필 바로 다음날에 LiPPS와 함께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기로 되어 있었어요. 정말 가기 싫었지만, 프로가 사적인 일로 공적인 일을 그르치면 안 되겠지요. 마음을 굳게 먹고 대기실로 향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오자마자 장난을 쳤을 시키 씨와 프레데리카 씨, 슈코 씨가 구석에서 속닥거리고 있었습니다. 제 눈치를 보면서요. 화장을 하던 미카 씨가 몇 번이고 말을 꺼내려고 했으나, 이내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카나데 씨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제 슬슬 준비하지 않으면 늦은 시간인 데도요. 카나데 씨가 이렇게 늦은 적은 처음이라, 프로듀서도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PD님께 출연자 중 한 명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가할 수 없다는 걸 알리려는 찰나, 대기실의 문이 열렸습니다.

 

“미안해. 많이 늦었지?”

 

모두가 기다리던 카나데 씨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먼저 프로듀서에게 고개를 깊게 숙인 뒤 LiPPS 멤버들에게도 사과의 뜻을 건넸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지요. 무표정한 얼굴은 평소와 별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살짝 그늘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제는 미안했어. 앞으로 언행에 주의할게.”

 

잠시 제 표정을 살펴보던 카나데 씨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습니다. 주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습니다.

 

“……타치바나.”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제 안의 무언가가 멈춰버린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저를 구성하는 부품 중 하나가 고장이 난 것 같았어요. 그 때문일까요, 제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방송에서도 계속 멍하게 있었습니다. 시키 씨와 프레데리카 씨가 능숙하게 이야기를 주도했기 때문에 큰 사고가 나지는 않았습니다만, 끝나고 나서 프로듀서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대로 집에 돌아온 저는 오늘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타치바나. 틀림없는 제 성입니다. 저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다른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언제나 카나데 씨에게 저를 타치바나라고 불러달라고 투정을 부렸지만, 막상 정말로 타치바나라고 불리니 기분이 미묘했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미묘한 기분이 아닙니다. 이 기분은. 틀림없이. 슬픔이라고 불리는 감정입니다.

고개를 들어 방 안에 있는 거울을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타치바나 아리스가 거기 있었습니다. 어른인 척 하지만, 어른이 되고 싶지만, 결국은 어린아이인. 타인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한, 틀림없는 어린아이같은 타치바나 아리스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인정해야 합니다.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솔직해져야 합니다. 나는 하야미 카나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머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녀와 같은 높이에서 보고 싶었기 때문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그녀의 입술을 만지고 싶었기 때문에 그녀만을 바라보았고, 그녀가 나를 동등한 시선에서 바라봐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어린아이 취급에 화가 났고,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그릇된 행동 때문에 저와 카나데 씨의 사이는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다시 화해를 하고, 더욱 가까워 질 수 있을까요. 저는 냉정하게 해답을 찾으려고 했으나, 결국 또다시 어린아이처럼 울고 말았습니다.

정말 좋은데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건 왜 일까요.

 

 



 

언제부터였을까. 그 아이를 보면 내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 것은.

그 아이에 대한 첫 인상은 ‘귀엽지만, 어딘가 딱딱한 아이’였다. 검은색 머리에 파란색 리본을 달고 군청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작은 입을 꼭 다문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짙은 금색 눈동자는 테이블 위에 놓인 타블렛 PC를 향해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문득 오늘 처음으로 무대 위에 서게 되는 아이돌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구나. 저 아이인가. 저렇게 어린아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아직 나이가 적어서 그런지 긴장한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긴장을 다소 풀어줄 필요성을 느껴 출연진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었다. 타치바나 아리스. 이게 저 아이의 이름이구나.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안녕. 네가 아리스구나. 잘 부탁해.”

“타치바나 입니다!”

 

툭 하고 터져 나오는 반응에 조금 놀랬다. 하긴, 초면인데 바로 이름으로 부르는 건 좀 그랬나? 하지만 저 나이 때의 아이들을 친근하게 이름으로 불러주는 걸 더 좋아하지 않던가. 문득 그녀의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타치바나 아리스. 아리스. 음, 그런 건가.

 

“흐음, 이름이 싫은가 보구나?”

 

정곡을 찔린 건지 의자에 앉아있던 아이의 몸이 움찔거렸다. 확실히 초등학생이라면, 아리스라는 이름은 놀림거리가 되기에 충분하겠지. 다소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겠고. 어쩔 줄 몰라서 당황하는 아이에게 나는 자기소개를 건넸다.

 

“나는 하야미 카나데야.”

 

그리고는 오늘 서게 될 무대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타임테이블도 하나씩 짚으며 설명해주고, 모르는 것도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다. 초등학생 치고는 이해력이 빠른 편이라 설명하기도 편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같은 346 프로덕션의 아이돌이니, 자주 볼 일이 있겠지. 가볍게 생각하며 아리스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 뒤로도 종종 그 아이와 만나며 인사를 나누었고, 이것저것 대화를 할 시간도 있었다. 얼마 뒤 나는 동료 아이돌인 시키와 슈코, 프레데리카, 미카와 함께 LiPPS라는 유닛을 만들게 되었는데, 다들 아리스를 너무 좋아해서 자주 보게 되었다.

 

“에, 아리스? 토끼 안 좋아해? 아리스잖아?”

“아리스가 토끼를 싫어하다니. 말도 안 돼.”

“아리스가 아리스가 아니게 되어버렸네.”

“싫어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는 관계없잖아요!”

 

물론 놀리는 걸 좋아한다는 말이다. 시키와 슈코와 프레데리카는 요즘 아리스를 놀리는 게 인생 최고의 낙이다. 저 재미로 출근을 하고 레슨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처음에는 미카가 제동을 걸어줬지만, 이제 그녀는 지쳤다. 구석에서 측은한 눈빛을 보내는 게 전부다. 
나? 나는 물론 말릴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나도 놀리고 싶은 쪽이니까.

 

“우리 아리스, 이제 친구가 많이 생겼구나? 혼자 대기실 구석에 앉아 있을 때가 어제 같은데.”

“그 얘기는 이제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타치바나 입니다!”

 

나와 아리스가 처음 만난 얘기를 꺼내면 아리스의 얼굴을 항상 빨개진다. 그녀가 좋아하는 딸기처럼 새빨개진 얼굴은 정말로 귀엽다. 저 정도로 빨갛게 잘 익은 딸기라면, 먹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이야, 카나데. 아리스랑 사이좋구나!”

“절대 아니에요!”

“아, 얼굴 빨개졌대요~”

 

역시 시키와 프레데리카야. 저런 점을 귀신같이 포착한다니까. 결국 아리스가 울상이 되어 나를 바라볼 때까지 놀리는 건 계속되었다. 그래도 넷 중에는 내가 제일 덜 놀리는 편이고, 또 나를 가장 먼저 알게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울상이 되면 항상 나를 바라본다. 그러면 나는 멤버들을 다독거려 놀리는 걸 그만두고 아리스를 달래는 것이다. 이 패턴이 요즘 일상이 되었다.

어느덧 아리스도 유닛에 들어가게 되었다. 멤버는 미나미와 후미카, 유미, 그리고 아이코. 하나같이 성격이 부드러운 아이돌이다. 우리들과 있을 때처럼 놀림받는 일은 없겠지.

그렇게 유닛 활동을 시작하게 되자 그녀와 만나는 일이 뜸해졌다. 시키와 슈코와 프레데리카는 유닛을 처음 결성했을 때처럼 다시 미카를 놀리기 시작했고, 나도 한 번씩 도와주었다. 미카가 고통 받는 모습을 보며 웃다가, 문득 무언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미카를 덜 놀려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미카를 아무리 놀려도 아쉬움은 채워지지 않았다. 무엇일까. 사소한 아쉬움이었지만, 한 번 의문을 가지자 내 머릿속을 꽉 채우게 되었다.

해결하지 못한 의문을 품은 채, 혼자 얼굴을 찡그리며 휴게실에서 음료를 마시다가 에인헤랴르 다섯 명과 만나게 되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다가 문득 중심에 있는 아리스에게 눈길이 갔다. 그녀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말이 툭 튀어나왔다.

 

“레슨은 지치지 않고 따라가고 있니, 아리스?”

“윽……. 잘 하고 있어요!”

 

예전에 미친 듯이 연습을 하다가 지쳐서 레슨실 바닥에 너부러진 일이 떠올랐는지 아리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너무 지쳐서 쿨한 모습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바닥에 누워 있던 모습이 참 귀여웠는데.

 

“……아리스, 정말 잘 하고 있답니다…….”

“그래? 후미카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평소에 아리스에게 잘 해주는 후미카의 말이라 크게 신빙성이 없지만 일부러 믿어주는 척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는 편이 아리스에게 더 잘 먹힐 테니까.

 

“진짜에요!”

 

역시나. 바로 반응이 온다. 이래서 아리스가 좋다니까. 그 후로도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가 리더인 미나미가 팀원들을 인솔하여 떠나갔다. 다시 찾아온 정적 속에서 음료를 홀짝거리다가 문득 아쉬움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쉬움의 정체가, 아리스를 놀리지 않았던 거였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리스가 유닛 활동을 한다고 나와 자주 만나지 못한 이후부터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확실하다.

갑자기 내 안에서 아리스라는 존재가 크게 느껴졌다. 이렇게 크게 느껴질 줄은 몰랐는데, 어느새 이토록 커진 걸까. 나는 열이 나는 오른쪽 귀를 매만지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에게 느끼는 이 감정은 뭘까. 사랑일까? 아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정도라면……. 그럴지도.

불현듯 아리스의 입술이 떠올랐다. 아직 어린아이라는 티가 물씬 풍기는, 작고 방울진 입술. 방송에 나가기 위해서 화장은 하지만 입술은 칠하지 않는다. 아직 아무것도 바른 적 없는 그 순결한 입술에,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카나데? 계속 쉴 거야?”

 

슈코가 문틈으로 머리만 쏙 내민 채로 내게 물었다. 슈코가 찾으러 올 정도로 시간이 흘렀나.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시간을 많이 허비한 모양이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

 

오른손으로 귀를 쓸어내리며 슈코에게 말했다. 이렇게 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가진 채로 돌아간다면, 다른 아이들이 눈치 챌지도 모른다.

나의 혼란스러움과는 무관하게 시간을 흘러갔고, LiPPS의 공연 날이 되었다. 리더이자 센터인 나는 무대의 중앙에 서서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빨갛게 칠한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차분한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마지막 가사와 함께 조용히 눈을 감았고,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관객들과 천천히 눈을 마주치며 웃어주다가 구석에 있는 관계자석에 이르게 되었다. 특별한 스케쥴이 없는 동료 아이돌이 모두 거기에 있었다. 한명씩 눈으로 인사를 건네다가 가장자리에 앉은 아리스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눈이 아니라 눈 약간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한참을 보다가, 그녀의 눈이 향한 곳이 내 입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드디어 깨달았다. 아, 이 아이는 나를 좋아하고 있구나, 하고.

공연이 끝나고, 멤버들과 간단히 뒤풀이를 하고, 집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을 알아버린 이상, 예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다. 나의 마음은 숨길 수 있지만, 아리스는 그렇지 않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내게 직접 말하는 날이 오겠지.

서로 좋아하니 괜찮지 않겠어? 마음 한구석에서 달콤한 유혹을 건넸다. 그러더니 멋대로 아리스와 얼굴을 마주보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아리스의 옅은 입술이 내 붉은 입술에…….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엔 아리스가 너무 어리다. 그녀의 나이는 이제 12살. 아직 중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다. 본인은 또래에 비해 성숙하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아이다. 성숙하다는 것은 본인의 생각일 뿐이다.

어린 소녀는 여러 가지 착각을 하곤 한다. 동경과 존경, 친밀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한다. 나에 대한 아리스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친밀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동경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이런 말을 하는 게 건방져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름 스타일도 좋고 외모도 예쁜 편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우선은 집에 가서 자자. 자고 내일 생각하자. 계속 고민하기에는 오늘 공연장에서 체력을 너무 많이 썼다. 나를 바라보는 아리스의 태도를 볼 때, 아직까지 직접적인 고백을 할 때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고로 천천히 생각을 할 시간이 있다.

그러나 일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다음 날 사무실에서 휴식을 취하던 도중 아리스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아리스를 본 멤버들은 평소처럼 열심히 놀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나는 평소처럼 하지 않으면 아리스가 의심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느 때처럼 장난을 걸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리스가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언제까지 어린아이 취급을 할 거에요!”

 

사무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아리스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아리스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막지 못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프로듀서만이 그녀의 뒤를 쫓았을 뿐이다. 순간 나도 쫓아갈까 생각했지만, 일이 더 복잡해질 것 같아 그만두었다.

집에서 목욕을 하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역시, 이대로는 안 된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그녀와 거리를 두어야 할 것 같다. 조금씩, 천천히 거리를 두어 자연스레 마음이 멀어지게 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타인과 거리를 두는 건 내가 잘 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마음을 먹었으나, 가슴 한 쪽이 아려왔다.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마음이 납득하지 못했다.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래. 차라리 여기서 울자. 눈물과 함께 미련을 씻어 내리자.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감정소모를 너무 많이 했던 걸까. 늦잠을 자고 말았다. 나답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나섰다. 촬영장까지 가며 오늘 해야 할 말을 천천히 고르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며 연습을 해 보았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라는 생각이 들 때쯤 촬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침내 대기실에 도착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 문을 열었다. 수많은 눈이 내게 쏟아졌다. 나는 프로듀서와 멤버들의 눈을 보며 사과의 인사를 건넸다.

 

“미안해. 많이 늦었지?”

 

한쪽 구석에서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시선을 그쪽으로 향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슈코를 마지막으로 멤버들과의 대화가 끝이 났고, 드디어 가장 중요한 순간이 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굳은 얼굴을 보는 순간, 다 흘려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다시금 몰려왔다. 조금만 힘을 빼면 무표정한 가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떼며 감정을 구겨 넣었다.

 

“어제는 미안했어. 앞으로 언행에 주의할게.”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숨기지 못한 기대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 너무나도 그녀다워서, 하마터면 살짝 미소를 지을 뻔 했다. 안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내가, 미소를 지어서는 안 된다.

 

“……타치바나.”

 

무너졌다. 그녀의 표정이 무너졌다. 내가 어떤 의미로 그녀를 불렀는지, 그녀 자신도 잘 이해한 듯했다. 됐다. 그러면 되었다.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벽을 쌓았으면, 된 거다.

방송을 진행하는 내내,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말실수를 해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멍하니 있다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도 절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진행상 어쩔 수 없이 봐야할 때만 봤을 뿐, 그 이외에 사적인 움직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윽고 방송이 끝났고, 저녁을 같이 먹자는 멤버들의 권유를 거절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멍하니 침대에 기대어 있다가 앞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속마음을 철저히 숨긴 채, 남들과의 거리만을 고집하는 하야미 카나데가 있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을 텐데. 누군가 와서 내 손을 잡아주고 수갑을 채워주길 원하고 있을 텐데. 언제나 그 손을 놓고 금방 사라져버리기만을 한다. 내일이 오지 않는 장소에서, 단 둘이서 밤 새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을 감춘 채로.

이제 아리스와의 관계는 끝이 났다. 이제 우리는 같은 회사에 있는 동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단지 같은 일을 하는 사무적인 관계. 거짓된 미소를 띄고, 마음에도 없는 말로 서로를 장식하는 사이.

나는 손을 놓았고, 우리의 관계는 사라졌다.

 

 

 

 

 

제목은 다들 아시겠지만 카나데의 솔로곡 Hotel Moonside와 아리스의 솔로곡 in fact의 첫 가사를 섞은 겁니다.

본문에도 두 노래의 가사가 아주 조금씩 섞여 있습니다.

이번엔 카나데와 아리스의 이야기를 써 보았습니다.

뭔가 애매하게 끊긴 것도 같지만, 의도한 겁니다. 그저 갈등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이후에 다시 친해져서 연인이 될 지, 영원한 직장동료가 될 지는 열린 결말로 놓아두겠습니다.

 

 

 

Posted by sahyun
,

거대 기업인 미시로 프로덕션의 한 건물. 두 소녀가 작은 휴게실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다소 가라앉은 공기로 보아 두 사람 사이의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이윽고 작은 소녀가 큰 소녀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니까 카나데 씨가 방해된다는 거예요!”


허리까지 오는 짙은 갈색 머리를 푸른색 리본으로 묶은 소녀는 언뜻 보면 성숙해 보였지만, 아직 앳된 얼굴이 그녀의 미성숙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분명 미소녀라 부를 수 있을 만했고, 성장하면 더욱 미인이 될 가능성이 엿보였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딴청을 부리는 큰 소녀는 짧은 남색 머리에 하늘색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교복이 어색할 정도로 성숙함이 흘러넘쳤다. 사복을 입고 거리에 나간다면 그 누구도 그녀가 성인임을 의심하지 않을 정도였다.


매번 그렇게 방해하실 거예요?”


작은 소녀, 타치바나 아리스는 큰 소녀, 하야미 카나데에게 소리쳤다. 항상 어린아이 취급을 받기 싫어하는 그녀였지만, 지금의 모습은 영락없이 떼쓰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카나데는 그런 아리스의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역시 놀리는 재미가 있는 귀여운 아이였다.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뿐이야. 아리스.”

후미카 씨랑 같이 있을 때마다 방해하는 게 카나데 씨가 하고 싶은 일인가요? 그리고 타치바나 입니다!”


아리스가 화를 내는(혹은 떼를 쓰는) 경우는 몇 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일은 주로 후미카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 점을 카나데는 잘 알고 있었기에 매번 방해를 했던 것이다.


방해한다니 말이 좀 심한걸. 나도 후미카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반쯤은 네가 당황하거나 화내는 귀여운 모습을 보고 싶은 거지만. 카나데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미시로 프로덕션에는 수많은 동료 아이돌이 있지만, 아리스만큼 놀리는 재미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굳이 한 명 꼽자면 미카일까. 카나데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훔쳤다.


둘이서 함께 할 시간도 많잖아요! 지난주엔 쇼핑도 같이 갔다면서요!”

쇼핑? , 물론이지. 후미카랑 같이 옷을 사는 건 아주 즐거운 일이었어. 너도 아시다시피 그 아이는 아름답지만 잘 꾸미고 다니지 않으니. 이것저것 옷을 입혀보는 건 정말 재밌었단다.”


카나데는 잠시 지난주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유닛 활동을 하던 도중 후미카의 부탁으로 인해 쇼핑을 갔던 때를. 후미카가 먼저 말을 꺼냈으나 나중엔 자기가 더 신이 나서 후미카에게 이것저것 입혀보았다.


, 너는 이 느낌을 모르겠구나?”

우으…….”


카나데는 능숙하게 말을 돌리며 아리스를 놀려댔다. 미시로 프로덕션 아이돌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히는 마이페이스와 말솜씨를 가진 카나데다. 통제불능의 유닛이라 불리는 LiPPS를 그나마 제어할 수 있는 리더인 그녀다. 또래에 비해 성숙하다고 하나 아직은 어린아이인 아리스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리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찾다가 항상 들고다니던 태블릿PC가 떠올랐으나 연습실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혀를 찼다. 그래도 기세는 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계속 카나데를 노려보았다. 그때 휴게실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리스 쨩과 카나데 씨는……. 먼저 간 모양이네요.”


순간 두 사람 모두 흠칫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듣는 사람은 편안하게 해 주는 작은 목소리는, 틀림없이 후미카의 목소리였다. 둘이서 이야기를 하러 간 걸 먼저 간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카나데가 휴게실 밖으로 나가 그녀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렇군요 후미카 쨩! 그러면 같이 운동이라도 하지 않을래요?”

운동은 좀, 힘들겠지만……. 같이 걷는 정도라면 괜찮을 거 같아요.”

좋네요! 그럼 걸어볼까요!”


열혈소녀의 우렁찬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로 시선을 돌려 눈빛을 교환했다. 항상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지만, 이번만큼은 뜻이 일치했다.


우선 저 불청객부터.”

처리하죠.”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카나데와 아리스는 비장한 각오로 휴게실을 나갔다.

 





제목이 좀 그런데 저 제목 말고 떠오르는 게 없어서.......

카나아리후미는 엽편으로 짤막하게 쓰는 게 즐거워요.

Posted by sahyun
,

귀여운 저는 오늘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향했어요. 가는 길에 있는 거울을 보며 잠깐 머리를 다듬기도 하면서요. 거울을 보니까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역시 저는 귀여우니까요.

오늘은 누가 사무실에 있을까요. 기대하면서 문을 열었어요. 요즘 새로운 노래가 나온 리이나 씨와 나츠키 씨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예상외로 마유 씨와 사에 씨가 있네요. , 생각해보니 곧 두 사람의 듀엣곡이 나온다고 했던가요? 그렇다면 이해가 되네요.


마유 씨, 사에 씨. 좋은 아침이에요.”


조용히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제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어요. 고운 기모노를 차려입은 사에 씨와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마유 씨는 굉장히 귀엽군요. 물론 저보단 아니지만요. 하지만 충분히 칭찬받을만한 귀여움이에요.


, 사치코 양. 안녕하셔요.”


먼저 사에 씨가 저를 보고 반겨주었어요. 한때 같은 유닛을 한 사이니까 당연한 거겠죠.


마침 좋을 때 왔네요. 사치코 쨩.”


마유 씨도 저를 반겨주는군요. 그런데 평소보다 상당히 들뜬 목소리인데요?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제 등줄기를 타고 흘렀습니다. 마치 예능 프로그램에서 벌칙이 번지점프라는 걸 직감했을 때처럼……. 설마, 아니겠죠?

그러나 마유 씨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제 예감이 맞았다는 걸 확신했어요. 마유 씨의 옥색 눈동자 안에 하트가 보여요! 평소의 마유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 사랑과 관련되는 순간 무시무시한 사람으로 변한다는 걸 같이 일하는 아이돌이라면 다들 알고 있죠. 그러니까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겠어요.


, 두 분 신곡 준비로 바쁘죠? 그럼 귀엽고 눈치도 빠른 제가 자리를 피해 드려야…….”

그럴 필요는 없어요.”


불길해 보이는 희미한 미소까지 지으며 마유 씨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든 빠져나와야……. 그래요. 사에 씨가 있었죠. 분명 사에 씨라면 저를 구해줄 거에요! 우리는 같이 KBYD를 한 끈끈한 인연이…….


그럼요. 여기 있어도 괜찮으셔요.”


이럴 수가, 사에 씨마저 저를 배신하다니요. 마유 씨의 강한 의지가 사에 씨를 굴복시킨 걸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사에 씨의 표정이 너무나도 밝은 걸요. 평소와 같은, 아니 평소보다 더 환한 미소에요. 사에 씨가 저런 걸 보니 괜찮을 것도 같은데, 고개를 조금만 돌려서 마유 씨를 보면 또 겁이 나네요.

일단 무작정 도망칠 수는 없으니 그녀들의 말에 따라 건너편 소파에 앉았어요. 그러자 마유 씨와 사에 씨가 저를 빤히 쳐다보는 게 아니겠어요? 제가 아무리 귀엽다 해도 그렇게 쳐다보면 부담스럽다고요. 특히 마유 씨 가요.


저기……. 물론 귀여운 저를 계속 보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멀리서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좀 그렇지 않아요?”

그렇군요. 사치코 쨩.”


여전히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마유 씨가 대답했습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제 쪽으로 오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자 사에 씨도 덩달아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어요. 제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두 사람은 제 양옆에 앉았습니다.


, 저기……. 마유 씨? 사에 씨?”


떨리는 제 목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두 사람은 제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 그래요. 틀림없이 제 귀여운 얼굴을 보느라 정신이 없어서겠죠. 그렇다면 제가 이해해줘야죠.

저는 굳게 마음을 먹고 정면을 보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마침 정면에 시계가 있네요. 천천히 흘러가는 초침을 보며 시간을 헤아렸습니다. 1. 10. 30. 1. 130. 2. 3. 5. 10. 시간과 함께 제 식은땀도 함께 흐를 무렵, 결국 저는 다시 입을 열었어요.


저기, 두 분……? 제 얼굴만 너무 보시는 거 아닌가요……?”

어머나, 그렇군요. 너무 실례했사와요.”


다행히 사에 씨가 먼저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반면 마유 씨는 여전히 제 얼굴을 바라보고 계시는군요. 아무래도 사에 씨에게 매달려서 탈출하는 게 좋을 거 같네요.


그럼, 노래라도 불러 드릴게요. 사치코 양.”

그럼요. 노래라도 불러 주셔야……. 잠깐, 뭐라고요?”


당연히 보내주는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노래라니요. 깜짝 놀라서 사에 씨를 쳐다보았지만, 화사한 미소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어요.

또다시 사에 씨가 마이페이스에 들어가 버렸으니, 남은 희망은 마유 씨 뿐이에요. 저는 고개를 반대로 돌려 마유 씨를 쳐다보았습니다. 제 간절한 눈빛을 읽었는지 가만히 있던 마유 씨가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그래요. 사랑에 빠진 마유 씨는 아무도 못 말리지만, 기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니까요.

자리에서 일어난 마유 씨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스마트폰을 집더니 조작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스피커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유 씨는 만족스러운 듯이 스마트폰을 내려놓고는 저를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답니다.

 

かきけたこのてだったから

풀을 헤치며 걸어온 이 길이 전부였기에

 

……?”

아니, 진짜 노래 부르는 거예요? 불러주는 건가요? 그것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에요. 아마 이번에 나오는 신곡이겠지요. 신곡을 들려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그걸 꼭 이렇게 가까이서 불러야 하나요? 너무나도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도 노랫소리가 들려왔어요.

 

だけどあのあなたと出会笑顔けて

하지만 그 날 당신과 만나 미소를 접하고 마음이 녹아서

 

녹아버릴 듯한 마유 씨의 황홀한 목소리에 이어 부드러운 사에 씨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리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물론 같이 연습을 하면서 많이 듣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들은 적은 처음인걸요. 사에 씨를 보면서 당황하는 사이 일어서있던 마유 씨가 다시 제 옆에 바싹 붙어 앉았습니다.

 

あったかい

따뜻한 꿈 앞에서

 

따뜻한 마유 씨의 숨결이 제 귓가에 와 닿았습니다. 마유 씨는 꿈 앞에 있지만 저는 그 마유 씨의 앞에 있어서 너무 정신이 없네요.

 

えはしないけど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조금 전보다 더 정신이 없어서 저는 그저 식은땀을 흘리는 일밖에 하지 못했어요. 조금 전엔 시계를 볼 여유는 있었지만 말이에요.

 

あいくるしいえたから

너무나도 귀여운 사람과 만났으니까

永遠かめるように背中つめてみた

영원을 확인하듯이 그 등을 바라보았어

 

이젠 두 분이 동시에 합창하기 시작했어요. 제 등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제 얼굴을 바라보면서요. 두 분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 이 순간이 제겐 영원과도 같이 느껴지네요. 물론 제가 너무나도 귀여운 사람인 건 맞지만, 그걸 꼭 이렇게 확인하실 것까지는…….


になんか正解されたような

갑자기 정답의 바람에 휩쓸린 듯

いなんて単純なものだよ

내 바람은 단순한 거야

 

제 바람도 단순해요.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빠져나가는 거에요. 이 귀엽지 않은 상황에서요. 여러분과 함께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요. 


いつもりに……

언제나처럼

 

마지막 가사를 끝낸 뒤 두 분은 후렴구를 조용히 읊조렸고 이윽고 노래는 끝이 났습니다. 저는 넋이 나가 멍하니 소파에 너부러져 있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동시에 웃기 시작했어요. 영문도 모른 채 멍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자 사에 씨가 먼저 입을 열었어요.


미안해요. 사치코 양. 실은 이번 노래가 귀여운 사람에 대한 노래여서 느낌을 살리기 위해 꼭 사치코 양 앞에서 불러보고 싶었사와요.”

우후후. 사치코 쨩은 누가 뭐래도 미시로에서 가장 귀여운 아이돌이니까요.”


노래 가사를 생각해보니 그렇긴 하네요. 놀라서 심장이 아직도 쿵쾅거리고 당황스러워서 흘린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하긴 하지만 미시로에서 가장 귀여운 저에게 귀여운 사람에 대한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니 어쩔 수 없지요. 저는 소파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역시 그렇죠? 조금 놀랐지만, 이것도 다 귀여운 저니까 두 분이 그런 거겠죠.”

그렇답니다.”

그래요.”


순식간에 뿌듯함이 가득 차오른 저는 절로 콧대가 높아졌어요. 너무 귀엽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생기네요. 앞으로는 좀 더 프로답게 당황하지 않는 게 중요하겠군요.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불러주세요. 귀여운 저는 마음도 넓으니까요.”


두 사람은 귀여운 데다 아량까지 넓은 제 마음에 감동을 받았는지 연신 환한 미소를 지었어요. 귀여운 저는 두 사람의 미소를 뒤로 한 채 사무실을 나왔습니다.

 



귀여워요.”

귀엽군요.”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쿡쿡 웃었다. 즉흥적으로 한 장난치고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장난이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상대가 사치코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누가 뭐래도 미시로에서 가장 놀리기 쉬운 사람인 사치코였기에.


저런 점이 사치코 양의 좋은 점이여요.”

그렇죠. 우후후.”


물론 그런 허술한 점 또한 사치코의 귀여움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두 사람도 잘 알고 있었다. 미시로에서 가장 귀여운 아이돌이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 노래 가사도 그런 사치코 쨩을 떠올리며 만들기도 했고요.”


마유의 말에 사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꼭 사치코 양에게 직접 들려주고 싶었사와요.”


장난이 섞이긴 했지만,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만은 진짜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다시 무대를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번에 데레스테에도 이벤트곡으로 등장한 아이쿠루시이를 듣다보니 두 사람이 사치코를 보고 만든 가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쓰게 된 팬픽입니다.

사에가 다른 아이돌을 부를 때 -항 이라고 하는 걸 어떻게 번역하지 하고 한시간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양으로 했습니다. 교토벤을 아가씨 말투로 번역을 하니까 -양이 자연스럽지 않나 해서요.


Posted by sahyun
,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잠시 부장님을 만나야 하니 먼저 가셔도 됩니다.”

수고하셨어요. 프로듀서.”


드디어 길고 길었던 오늘의 일정이 끝났습니다. 저는 아픈 다리를 만지며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꽤 오랜 시간 서서 진행하는 토크쇼였기에 다리가 아프네요. 빨리 사무실에 가서 쉬다가 집에 가야겠어요.


문득 창밖을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이니 사무실에는 사람이 없겠죠? 특히 프레데리카씨나 시키씨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사람이 많아 떠들썩한 분위기도 좋지만 지금은 혼자서 쉬고 싶으니까요.


문을 열자 침묵만이 저를 맞이했습니다. 다행이에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파로 다가가자 나른한 숨소리가 제 귀를 간질였습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후미카씨가 자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다시 한 번 깊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후미카씨는 괜찮으니까요.


조심스레 곁에 다가가 앉았습니다. 무릎에 펼쳐진 책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책을 읽다가 잠이 드셨나 보네요. 너무나도 후미카씨 다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차, 큰 소리로 웃으면 안 되죠. 저는 소리를 억누른 채로 목을 가다듬었습니다.


문득 후미카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작지만 도톰한 입술,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코, 정돈되지 않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눈 위를 반쯤 덮고, 그 위에는 항상 쓰고 다니는 흰색 머리띠가 있었습니다. 수수하지만 동시에 수려한 용모입니다.


정말 꾸미지 않아도 이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이라니, 반칙이에요. 게다가 무대에 나가기 위해 화장을 했을 때의 모습은……. 저도 나중에 후미카씨처럼 될 수 있을까요.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후미카씨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누군가 방에 들어오는지도 몰랐어요. 저와 후미카씨의 평화를 망치는 방해자는, 제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호오, 좋은 광경을 혼자 즐기고 있네?”


화들짝 놀래서 고개를 돌렸습니다. 거기에는 언제나처럼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카나데씨가 있었어요. 불안합니다. 위험합니다. 카나데씨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건 저에게 장난을 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에요. 저는 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카나데씨에게 소리쳤습니다.


뭔가요, 카나데씨! 그렇게 몰래 발소리도 내지 않…….”

.”


카나데씨가 손가락을 제 입술에 갖다 대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을 들어 후미카씨를 가리켰습니다. 저는 그제야 아차 싶었어요. 다행히도 후미카씨는 별다른 반응 없이 잘 자고 있었습니다.


후미카가 깨잖니.”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번만은 카나데씨의 말에 수긍해야겠네요. 저는 다소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

그래. , 그럼.”


갑자기 카나데씨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카메라 앱을 실행시키는 게 아니겠어요. 게다가 저 앱은 분명 무음 셔터 기능이 있는 앱이었습니다. 저는 후미카씨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항의했습니다.


카나데씨! 지금 뭐하는 거예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잖아? 사진으로 남겨둬야지.”


카나데씨가 행동을 멈추지 않자 저는 그녀의 팔을 양손으로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여고생. 체격의 차이가 분명합니다. 매일 느끼는 거지만, 오늘은 더더욱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때, 카나데씨가 제 귓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너에게도 한 장 보내줄게.”


한 장. 사진 한 장. 자는 사진 한 장. 그 달콤한 유혹을 들으니 팔에서 힘이 점점 빠졌습니다. 후미카씨의 자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니. 분명 갖고 싶었지만……. 그래도 본인의 동의 없이 찍은 사진인데…….


제 내면의 악마와 천사가 한창 싸우는 와중에 카나데씨는 이미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제 스마트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습니다.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한 것이겠지요. 저는 결국 악마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이따가 후미카씨가 깨어나면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그럼 내일 봐, 아리스.”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악마와 같은 사악한 미소만을 남긴 채 카나데씨는 떠났습니다.

 







4개월만에 글 쓰네요.

짧은 엽편입니다.

앞으로 짧은 엽편을 계속 쓰면서 데레마스 관련 소재를 이리저리 고민해 볼 것 같습니다.



Posted by sahyun
,

……사기사와 후미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수많은 눈이 저를 향했습니다. 저 눈에 담겨있는 감정은 무엇일까요. 환영? 호기심? 기쁨? 귀찮음? 적대? 어떠한 감정이라도 좋으니 부디 무관심만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앞으로 계속 같이 일할 동료들인데, 무시 받는 건 싫으니까요. 타인의 무관심이 익숙하다 해도, 계속 받고 싶은 건 아닙니다.


그럼 전 러브라이카를 데리러 가보겠습니다. 뉴 제너레이션 여러분들이 간단히 안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이 바쁜 프로듀서 씨가 사라지자 사무실에 있던 아이들이 제게로 모여 들었습니다. 하나같이 예쁘고, 아름다운 소녀들입니다. 책 속에 파묻혀 생기를 잃은 저와는 달리, 다들 저마다의 빛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시마무라 우즈키에요! 잘 부탁드려요!”

시부야 린이야. 린이라고 불러줘.”

뉴 제너레이션의 리더 혼다 미오! 잘 부탁해!”


프로듀서가 부탁했던 세 사람이 제게 와서 인사를 건넸습니다. TV를 거의 보지 않는 저라도 이 세 사람의 유닛, 뉴 제너레이션이 굉장히 인기 있는 아이돌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미시로 프로덕션 아이돌 사업부의 중심이라고 했지요.

세 사람은 신입을 안내하는 게 익숙한지 이것저것 필요한 정보들을 챙겨주었습니다. 때론 고개를 끄덕이고 때론 메모하며 지식을 습득하고 있는데 문득 구석에 앉아있는 한 소녀가 보였습니다. 다들 두세 명씩 모여 이야기를 하는 사무실에서 혼자 구석에 있는 소녀라니, 절로 신경이 쓰였습니다. 제 시선을 알아차린 미오 씨가 말했습니다.


, 저 아이? 호시 쇼코라고 해. 버섯을 정말 좋아하는 순수한 아이야!”

순수……. , 확실히 여러모로 순수하지.”


옆에 있던 린 씨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습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네요.


안녕! 쇼코 쨩!”


미오 씨가 활기차게 쇼코 씨를 부르자 구석에서 벽을 관찰하면 쇼코 씨가 고개를 돌렸습니다. 긴 회색 머리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치자 조금 놀란 듯 움찔거렸습니다. 별처럼 빛나고 있는 여타 아이돌과는 달리, 상당히 소심한 모습이었습니다.


, 후히…… 미오…… 반가워…….”

버섯은 잘 자라고 있어? 이쪽은 사기사와 후미카쨩! 오늘 새로 들어온 신입이야!”


갑작스레 소개해서 다소 놀랐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사기사와 후미카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 쇼코. 호시 쇼코야. 나도…… 잘 부탁해…….”


답을 한 쇼코 씨는 다시 구석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쪽에는 정체모를 버섯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버섯에 관련된 책을 본 적이 있는데, 저렇게 생긴 버섯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아직 지식이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쇼코 쨩이 낯가림이 심해서 친해지기는 어렵겠지만, 착한 아이니까 앞으로 잘 지내봐!”

, 조언 감사합니다.”

아니, 조언이랄 거까지야…….”


보이는 그대로 소심한 사람인 모양입니다. 혼자서 버섯을 보는걸 보니 친한 사람도 많지 않겠지요. 문득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게 책이 있는 것처럼, 쇼코 씨에겐 버섯이 있나 봅니다. 언젠가 꼭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네요.

 

 

 

, 오늘 레슨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트레이너 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언제나 책 속의 세계에 살던 제게 몸을 움직이는 일은 굉장히 가혹한 일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될 것 같았지만……. 예상보다 너무 힘이 드네요.

간단히 정리를 마친 트레이너 씨가 제게 다가와 오늘 잘 안된 것들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트레이너도 좋은 사람이라 완곡한 표현을 쓰며 돌려 말해주고 있지만, 제 상태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난국이에요. 스탭, 안무, 발성,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문장으로 적으면 이렇게도 쉬운데 현실은 냉혹하네요. 트레이너 씨의 말이 귓속에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난 뒤에 일어서려고 했으나 힘이 풀린 다리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제 몸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데, 무슨 아이돌을 한다고……. 이런 제게 프로듀서는 무슨 가능성을 보았을까요. 빛나는 세계, 화려한 스테이지는 저에겐 어울리지 않는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아이돌 권유를 받았을 때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트레이닝을 받는 지금은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그만둘까요. 그만두고 싶습니다. 제겐 역시 책 속의 세계가 어울립니다. 아름다운 의상을 입은 눈부신 소녀들이 춤추는 무대가 아닌, 낡은 종이와 검은 활자가 멋진 그림을 자아내는 그곳이요. 다음에 프로듀서를 만나게 된다면, 확실히 그만둔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저를 데려온 프로듀서에겐 미안하지만, 제겐 가능성이 없으니까요.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문이 열리고 프로듀서가 들어왔습니다. 언제나처럼 손으로 목을 만진 채였습니다. 험악한 얼굴을 보자 조금 망설여졌으나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습니다.


프로듀서 씨.”

, 사기사와 씨. 여기에 계셨군요. 마침 찾고 있었습니다.”

……?”


험상궂은 미소(본인은 최대한 자연스레 미소를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를 지으며 저를 부르는 바람에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 프로듀서는 서류를 하나 꺼내 제게 내밀었습니다. 라이브 일정이 적힌 타임 시트였습니다.


내일 저희 아이돌 중 몇 분이 미니 라이브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기사와 씨는 아직 바로 옆에서 공연을 본 적이 없으시니, 이번 기회에 같이 가셔서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합니다. 트레이닝 일정은 제가 조정해 놓았으니, 내일 편안한 마음으로 관람하시길.”

…….”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관계자석에서 라이브를 보게 되는 건가요. 공연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기에 이번 기회에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화려하게 빛나는 그녀들을 보면 더 자괴감에 빠질 것 같아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저기, 죄송하지만.”


그때, 문득 타임 시트에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호시 쇼코. 그녀도 내일 라이브를 하는 모양입니다. 저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저보다 더 소심한 그녀가 무대 위에 선다니, 갑자기 호기심이 솟구쳤습니다. 마치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 발매를 앞둔 듯 마음이 흔들렸어요.


? 뭔가 문제라도……?”

아니, 아닙니다. 내일 보러 가겠습니다.”


결국, 저는 라이브를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내일이 아니면 그녀의 라이브를 볼 수 없을 테니까요. 조만간 저는 아이돌을 그만둘 것이고, 다시 책 속에 파묻힌 제가 라이브를 보러 갈 엄두를 낼 리는 없겠죠. 마지막,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공연장에 도착한 저는 얌전히 관계자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 라이브를 하지 않는 다른 분들도 이곳에 오셨지만, 대부분 대기실로 놀러 가 있어서 관계자석은 고요하네요. 저는 아직 친한 사람도 없고 해서 홀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 후미카 쨩도 왔구나!”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미오 씨가 있었습니다. 아침에 연극 연습이 있다고 나가셨는데, 다소 일찍 끝난 듯해요. 그녀는 제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오늘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도 선뜻 말을 붙여주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미오 씨와의 대화는 흐르고 흘러 이윽고 쇼코 씨에게 이르렀습니다. 저는 침을 삼키며 바짝 긴장했습니다. 과연 미오 씨가 본 그녀의 공연은 어땠을까요.


쇼코? 쇼코는 정말…… , 뭐라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동료 아이돌에게 여러 가지 수식어를 붙여가며 극찬하던 미오 씨가 망설이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역시나. 소심한 그 모습이 그대로 무대로 이어져 다소 미흡한 무대가 나온 걸까요. 천성의 소심함은 고칠 수 없나 봅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굉장하지. 임팩트 하나는 우리 미시로에서도 최고야.”

……?”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굉장하다니요. 그것도 모자라서 미시로에서 최고라고요……? 화려한 미카 씨도, 고고한 카에데 씨도, 귀여운 나나 씨도 있는데. 그들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줄 수가 있는 건가요?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쇼코 씨가요?


그 무대는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지. 오늘 보면 알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오 씨는 다음 차례인 카나데 씨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 머릿속은 쇼코 씨에 대한 이야기로 꽉 차서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입장이 시작되어 미오 씨의 이야기가 끊길 때까지 저는 계속 쇼코 씨를 곱씹었습니다.

마침내 공연이 시작되고 여러 아이돌 여러분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실에서도 반짝반짝하던 그녀들이지만, 역시 아이돌은 무대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눈앞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그녀들은 너무나도 눈부셨습니다. 마치 태양과도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면 제 몸이 잿더미가 되어버릴것만 같네요.

감탄과 절망과 선망과 시기가 몇 번이고 교차하여 제 감정이 꼬였을 무렵, 드디어 쇼코 씨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습니다. 그녀는, 저와 가장 닮은꼴인 그녀는 과연 어떻게 빛을 낼까요.

꺼졌던 조명이 켜지자 커튼 뒤에 자그마한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옷에 달린 장식이 많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작은 키에 긴 머리카락을 보니 쇼코 씨겠지요. 평소의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나고 각진 장식들이 많이 달려 있네요. 이제 커튼이 걷히고, 쇼코 씨가 모습을…….


인베에에에에에이이이이드으으으!!”


공연장을 쪼개버릴 듯한 기세로 울리는 목소리. 이에 호응하듯 소리치는 관중들. 가시와 징이 박힌 가죽옷. 온몸을 수놓은 기괴한 무늬. 움직일 때마다 철컹거리는 쇳조각들. 초점을 잃어버린 회색 눈동자는 끊임없이 관중석을 훑으며 움직였습니다.


“Mush up!”

““Mush up!””


광기로 가득 찬 버섯의 포효와 함께 더욱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끝없이 목을 울리며 스테이지를 누비는 쇼코 씨는, 제가 알던 그 소심한 버섯 소녀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깔끔하게, 때로는 목을 긁으며 소리치는 저 아이돌은 대체 누구일까요.

거기에 이 장르는, 분명 메탈이라고 불리는 장르였지요. 락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돌은 여럿 보았지만, 메탈을 부르는 아이돌은 처음 봅니다. 평소에 저와는 큰 연관이 없던 장르이지만 이렇게 접하게 되니 그 웅장함에 절로 압도당했습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쇼코 씨는 마지막으로 마이크 스탠드를 크게 휘두르고(동시에 밑에서 불꽃이 올라왔습니다.) 무대 뒤로 퇴장했습니다. 그제야 긴장을 놓은 저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어때? 굉장하지?”


옆에 있던 미오 씨가 씩 웃으며 말을 걸어주었습니다. 저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정말로요.”


그리고 확신했습니다. 반드시 쇼코 씨를 만나봐야 한다는 사실을요.

 

 

 

공연이 끝나고 스태프들이 공연장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난 저는 천천히 대기실로 향했습니다. 가까이 갈수록 소란스러움이 느껴지네요. 조용히 쇼코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소리는 더 커졌습니다. 대기실은 굉장히 시끄러워서 다행히 제가 문 여는 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았지만, 바로 앞에 있던 몇몇 분들이 저를 보았습니다. 카나데 씨가 푸른색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습니다.


어머, 후미카잖아.”


저는 꾸벅 인사를 했고 옆에 있던 다른 분들이 받아주었습니다. 슈코 씨와 시키 씨, 프레데리 카씨. LiPPS 분들이군요. 일행 중 가장 장난기가 많은 프레데리카 씨가 커다란 눈동자를 빛내며 제게 다가왔습니다.


여긴 어쩐 일이야?”

…… 쇼코 씨를 만나 뵙고 싶어서요.”

쇼코? 저쪽에서 코우메랑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


대답을 해 준 슈코 씨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곧바로 그쪽을 향했습니다. 어느새 분장을 지우고 원래대로 돌아온 쇼코 씨가 코우메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손에는 버섯이 심어진 화분을 든 채로요. 제가 그쪽으로 가자 두 분이 저를 쳐다보셨습니다.


, 저기……. .”

사기사와 후미카 에요. 오늘 공연 고생하셨어요.”

……. 고마워.”


코우메 씨가 소매를 흔들었습니다. 코우메 씨도 오늘 굉장했죠. 귀여움과 호러가 공존하는 무대라니,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체구도 작고, 나이도 어린데 굉장하군요.


쇼코 씨, 잠시 얘기를 할 수 있을까요?”

? ……?”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쇼코 씨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의자에서 일어났습니다. 제대로 대화를 한 번도 나누어 보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얘기하자고 하니 당연히 당황스럽겠지요. 쇼코 씨를 당황하게 해서 죄송했지만, 지금 당장 물어보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테니…….

복도로 나온 저는 쇼코 씨를 바라보았습니다. 키는 코우메 씨나 사치코 씨와 같은 142cm. 체중은 35kg. 동년배의 여자아이에 비해 키도 체구도 작은 그녀인데, 대체 어디에서 그렇게 폭발적인 에너지가 쏟아져 나올까요.


……, 무슨 일…… 이야……?”

, 죄송해요. 제가 불러놓고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네요.”


제 눈치를 보는 쇼코 씨에게 잠시 사과를 하고는 본론을 꺼냈습니다.


쇼코 씨는 어떻게 그런 라이브를 하실 수 있는 건가요?”

…… 라이브? , 그렇구나……. 오늘 처음 봤지.”


쇼코 씨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보아하니 비슷한 반응을 많이 겪어 본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잠시 제 머릿속에서 단어를 정리한 뒤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실례가 되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쇼코 씨는 평소에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무대 위에서는 변할 수 있죠?”

으음? 으으음…….”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잠시 고민하던 쇼코 씨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습니다.


그냥……. 무대 위에 올라가면 그래. 분장을 하고…… 마이크를 잡으면,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내가 자연스레 나와. 그것뿐이야.”

자연스레…….”


저는 홀로 쇼코 씨의 말을 되뇌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혹시나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는 의심도 잠깐 해보았는

, 정확히 자신이 무얼 했는지 기억하고 의식하는 걸 보니 아니겠지요.

분장. 어쩌면 분장에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내면을 바꾸려면 외면부터 바꿔야 하는 법. 항상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두꺼운 옷으로 몸을 덮으니 소심함을 버리지 못하는 거겠죠. 내일부터 스타일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 그러니까.”


다음 날, 저에게 댄스를 가르치는 베테랑 트레이너 씨가 미묘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저를 바라보더니 마침내 결심한 듯 말을 꺼냈습니다.


집에서 여기까지 그러고 온 거야?”

.”


트레이너 씨가 이마를 짚었습니다.


왜 그랬어?”


그녀의 말을 들은 저는 연습실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습니다. 뒤로 완전히 빗어 넘겨 머리띠로 고정한 머리, 검은색 가죽 재킷에 헐렁한 와이셔츠, 군데군데 찢어진 청바지. 나름 일탈을 한다고 입어봤는데 많이 이상한 걸까요.


……이상한가요?”

아주 많이.”

그런가요.”

오면서 회사 사람 아무도 안 만났어? 뭐라고 하는 사람 없었어?”


트레이너 씨가 한숨을 푹푹 쉬며 따졌습니다. 회사 사람이라고 하면, 건물 안에서 LiPPS 분들을 만나긴 했네요. 미카 씨가 눈이 커지며 뭐라 말을 하려 했는데, 옆에 있던 프레데리카 씨와 시키 씨가 제지한 게 기억납니다. 카나데 씨와 슈코 씨는 평소처럼 인사를 해 주셨고요.


LiPPS? 하아, 미카가 고생이 많구나.”


결국, 오후에 연습하러 온 프레데리카 씨와 시키 씨는 트레이너 씨에게 혼이 났고, 저는 루키 트레이너 씨와 미카 씨에게 한 시간 동안 패션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제 외모에 알맞게 저를 바꾸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네요.




다음으로 제가 주목한 것은 마이크였습니다. 분명 마이크를 잡고, 소리를 지르면 자신감이 생긴다고 하셨죠. 그래서 보컬 레슨을 받을 때 마스터 트레이너 씨에게 부탁을 드려보았습니다.


그래. 진짜 무대에서 하는 것처럼 마이크를 잡고 연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항상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제가 이런 부탁을 하자 마스터 트레이너 씨는 매우 흡족해하셨습니다. 곧바로 마이크를 하나 가져와서 제 손에 쥐어주셨죠. 단단한 재질로 된 마이크는 생각보다 묵직했습니다.

저는 마이크를 입에 갖다 댄 채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 그럼 시작해볼까.”


이윽고 반주가 흘러나왔습니다. 오늘 연습할 노래는 미시로 프로덕션의 아이돌을 대표하는 노래인 부탁해요, 신데렐라입니다. 간주가 짧으므로 곧바로 리듬에 맞춰 시작을 해야 하죠. 저는 눈을 질끈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쉰 뒤 힘껏 내뱉었습니다.


! 탁해요! ! 데 렐라!”

잠깐! 잠깐!”


마스터 트레이너 씨가 곧바로 반주를 껐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다가왔습니다. 얼굴에는 분노를 숨기지 않은 채로요.


뭐하는 거야, 후미카?”

…… 저기, 이상했나요?”


진지한 어투로 반문하자 분노는 곧 당혹스러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제가 장난이라도 치는 줄 알았나 봅니다. 하지만 저는 진지한걸요. 잠시 생각을 하던 마스터 트레이너 씨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어디서 무얼 보고 그렇게 소리치는 건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이 하는 게 좋아 보인다고 무작정 따라 하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야. 지금 당장은 답답할지도 모르지만, 우선 나를 믿고 따라오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또다시 실패했습니다. 외모를 바꾸어도, 목소리를 바꾸어도 저는 변하지 않네요. 오히려 주변에서 어울리지 않는다며 잔소리를 들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변하지도 않고 변할 수도 없는 저는 아이돌에 어울리지 않아요.

이번에는, 이번에야말로 그만두기 위해 프로듀서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마스터 트레이너 씨에게 물어보자 아스타리스크 분들을 따라 이동하다가 밤에 돌아온다고 하네요. 저는 꾸벅 인사를 드리고 프로듀서의 사무실로 갔습니다. 노을빛이 새어 들어와 노랗게 물든 사무실은, 굉장히 아름다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아름다움을 두 눈에 가득 담아두어야겠죠.

혼자 감상에 젖어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습니다. 프로듀서 씨가 생각보다 일찍 왔군요.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에는 회색 털 한 가닥밖에 없었습니다.


, 저기…….”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내려 보니 곤란해 하는 쇼코 씨가 보였습니다. 저처럼 프로듀서를 찾아온 걸까요? 우선 가볍게 인사를 하곤 말을 건넸습니다.


프로듀서 씨는 아직 오지 않았어요.”

……, 아니. 프로듀서를 찾아온 게 아니라……. 너를 보러…….”

저요?”


쇼코 씨가 저를 볼 일이 있었나요. 저와 쇼코 씨의 관계라고 한다면, 제가 일방적으로 동경하고 있는 게 전부인데. 누구한테 말한 적도 없으니 쇼코 씨가 알 리가 없을 텐데요.


최근에, 연습을 할 때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든지, 이상한 분장을 한다든지…….”


제가 했던 기행들이 벌써 회사 내에 다 퍼졌나 봅니다. 조금은, 부끄럽네요.

그게, 생각을 해보니까…… 내가 해줬던 말 때문에 그렇지 않나 싶어서…… 말해주러 온 거야.”

무슨 말을……?”


쇼코 씨는 조심스럽게 저를 쳐다보더니, 이내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습니다.


분명 나는…… 그렇게 해서 아이돌이 되었어. 하지만, 다른 사람도 그렇게 된다는 법은 없지……. 아이돌은 저마다 빛나는 방법이 다르니까…… 소심하다는 점이 비슷하다고 해서 코우메가 나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처럼……. 후미카에게도 맞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저만의 방법이요?”

. 그러니까…… 누구를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해……. 아마도.”


끝을 애매하게 덧붙인 쇼코 씨가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저는 곰곰이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맞는 방법. 있는 그대로의 자신. 저마다의 빛……. 저는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요. 저는 누구일까요.

머리가 아파졌습니다. 누군가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역시 제 자신뿐입니다. 저를 낳아준 부모님도, 저를 서점에서 일하게 해 준 숙부님도, 저를 스카우트해준 프로듀서도, 저를 훈련시켜 주는 트레이너 여러분들도 대답해주지 못하겠죠.

제 자신, 있는 그대로의 나. 사기사와 후미카. 저는,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이 있으며,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사기사와 씨?”


제 이름을 부르는 정중한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장신의 남자가 제 눈앞에 있었습니다. 험악한 외견과는 달리 자신이 맡은 아이돌을 진심으로 아끼고 도와주는 남자, 저의 프로듀서였습니다. 프로듀서 씨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홀로 사색에 잠겨 있었군요. 주변을 둘러보니 쇼코 씨는 어느새 사라진 뒤였습니다.


무슨 용무라도 있으신지요?”


맞아요. 저는 프로듀서 씨에게 말을 하러 찾아왔죠. 아이돌을 그만둔다고. 그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문득, 쇼코 씨의 말이 제 목소리를 막았습니다. 다시 입을 다문 저를 프로듀서 씨가 지긋이 쳐다보았습니다. 기다려주는 프로듀서 씨에게 감사하며, 생각을 정리한 저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프로듀서 씨, 제 데뷔곡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 데뷔곡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얘기에 프로듀서는 적잖이 놀란 모양입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는 잠시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다시 되돌릴 순 없지요. 저는 다시 프로듀서를 향해 말했습니다.


그 곡의 가사, 제가 써도 될까요?”




아이돌을 계속하겠다고 결심한 건 아닙니다. 여전히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가득해요. 하지만, 한 번만 해보기로 했습니다. 해보고 나서 그만둬도 늦지 않겠지요. 쇼코 씨가 말한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요. 그런 욕망이 절망을 누르고 저를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전보다 더 열심히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가사를 써 보았습니다. 책을 좋아해서 소설 습작을 몇 편정도 써 본 적은 있지만, 가사는 소설과 굉장히 많이 다르네요. 얼마 되지 않는 문자에 제 생각을 담아야 하고, 멜로디에도 맞춰야 하고……. 굳어버린 머리를 억지로 움직여가며 제 마음을 써내려갔습니다.

몇 장의 종이를 버렸을까요. 몇 십 번을 지웠을까요. 몇 백 자를 적었을까요. 마침내, 제 첫 공연을 일주일 앞둔 날. 가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여전히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 결과물이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제 가사를 읽어본 프로듀서 씨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평소와 같은 험악한 미소였지만, 그 속에서 프로듀서 씨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어요. 어려운 부탁을 들어준 프로듀서 씨에게는 정말,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정말 죽을 만큼 연습했습니다. 매일 밤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면, 마음 한구석에서 슬며시 절망이 말을 걸었죠. 이렇게 해 봐도 소용없을 거라고. 너에게는 어두운 서점과 퀴퀴한 책이 어울린다고. 저는 그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잠을 청했습니다.

마침내 제 첫 공연 날이 밝았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공연이 될지도 모르는 스테이지에 도착하자 두 다리가 떨렸습니다. 애써 힘을 주며 들어가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저와는 달리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다가와 제게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만두려면 지금이라는 어두운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리허설을 끝마치고 관객석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지금은 관계자 몇 사람만이 앉아 있을 뿐이지만, 본 공연에는 수백 명의 사람이 저를 쳐다보겠지요. 생각만 해도 오싹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노래를 한다니, 할 수 있을까요? 제가?

공연 시간이 서서히 임박했기에 화장을 받고 의상을 입어보았습니다. 흰색을 바탕으로 파란색을 섞어 놓은 346 프로덕션의 기본 드레스입니다. 예쁜 옷을 입고 화장을 하니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마치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꾸미니까 제법이잖아?”


패션을 잘 아는 미카 씨가 저의 어깨를 두드리고 갔습니다. 미카 씨가 저런 말을 할 정도라면 다른 사람이 봐도 괜찮겠지요. 조금은, 자신감이 올라갔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대기실 구석에 앉아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습니다. 천천히 올라가서,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인사를 하고,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 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고 말을 하고 내려온다. 첫 공연이라 배려해 주신 건지, 댄스 파트는 없었기에 노래만 잘 부르면 되네요.

종종 앞에 놓인 가사를 읽으며 계속,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정리했습니다. 좋아요. 어렵지 않아요. 수백 번을 연습했으니 괜찮을 거예요. 저도 틀림없이 빛날 수 있을 테죠.

마침내 공연이 시작되었고 함성이 대기실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저는 주먹을 꽉 쥐고 눈을 감았습니다. 제 머릿속엔 오로지 제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만이 계속 재생되었습니다.


사기사와 씨. 슬슬 준비하셔야 합니다.”


눈을 뜨자 프로듀서가 제 앞에 있었습니다. 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스테이지를 향해 걸었습니다. 순간 다리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습니다. 옆에 있던 프로듀서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넘어졌겠지요.


괜찮으십니까?”

…….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틀림없이 괜찮을 거예요. 괜찮아야 해요. 저는 자신을 스스로 다그치며 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스테이지를 향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열기와 함성이 점점 커집니다. 그러고 보니 제 앞 차례가 쇼코 씨였지요. 이 열기와 함성이 이해가 갑니다.

마침내 백스테이지에 도착하였고, 프로듀서가 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옆에 있던 스태프 분의 지시와 함께 저는 드디어, 무대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불이 꺼져 어두운 스테이지에서 오로지 마이크 스탠드가 있는 곳에만 조명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조심스레 그곳으로 간 저는 마이크 스탠드를 잡고,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정면을 바라보았습니다.

. 여기도 눈. 저기도 눈. . . 빛나는 눈. 흐리멍덩한 눈. 반쯤 감은 눈. 무섭게 생긴 눈. 호기심에 가득 찬 눈. 기쁜 눈. 불만이 있는 눈. 남자의 눈. 여자의 눈. 학생의 눈. 청년의 눈. 중년의 눈.

숨이 막혀 가슴을 움켜쥐었습니다. 입을 벌렸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자기소개를 하고, 노래를 시작해야 하는데. 하는데.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귀를 찌르고, 시야가 흐릿해지고 수많은 눈만이 남아 제 머릿속에 박혔습니다. 섬뜩한 눈동자들이 정신을 지배하고, 마이크도 의상도 제 얼굴도 가사도 모두 눈동자로 덮여…….


소리가 작잖아아아아!!”


불현듯 들린 고함에 화들짝 놀래 옆을 보았습니다. 진한 분장을 한 쇼코 씨가 옆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신입이 왔는데 이따위로 할 거냐!!”


쇼코 씨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관객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모두의 눈이 쇼코 씨를 향하자 그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어지러운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는 기분입니다.


히얏- ! 좋아! 하지만 신입의 노래는 조용한 노래니까, 입 다물고 들어!”


그러자 관객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관객석을 한 번 둘러본 쇼코 씨는 씨익 웃으며 몸을 돌려 들어갔습니다. 그녀의 웃음을 보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준다. 그녀의 말처럼, 저는 있는 그대로의 제 자신을 보여줘야겠지요.


……사기사와 후미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노래 제목은 Bright Blue입니다.”


좀 더 준비한 멘트가 많았지만, 길게 할 자신이 없어 최대한 간결하게 말했습니다. 마이크 스탠드를 양손으로 붙잡고,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ばしたページを

넘긴 페이지를 다시 읽듯이

えば

마음과 마주보면

しは自分えられる

조금은 자신을 바꿀 수 있는

一歩せそうで

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책을 읽는 것만이 전부였던 소녀가, 자신을 바꾸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딛으려 했지만.

 

どこまでもくシナリオの

끝없이 이어진 시나리오 속에서

どれだけの涙 笑顔出来

어느 정도의 눈물을 미소로 바꿀 수 있을까?

やっと見付けた

간신히 찾아낸 빛

 

어두운 자신의 마음속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길을 잃고.

 

ファンタジーな世界

판타지의 세계로

げてるだけじゃ

도망치기만 해서는

本当せないまま

진정한 나도 찾아내지 못한 채로

 

다시 뒤로 가려고 했으나, 빛의 따스함을 찾아 내디딘 한 걸음.

 

顔上げてみたら

고개를 올려보니

見慣れた

익숙한 하늘

 

아름답게 빛나는 이들에 이끌려, 용기를 낸 소녀는.

 

今日はいつもより

오늘은 어느 때보다

Bright Blue

 

푸른 하늘을 보며, 물었습니다.

나도, 영롱하게 빛날 수 있을까요?

 

반주가 끝나고, 저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고요한 회장은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던 것처럼 조용했습니다. 제가 던진 물음에 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

뒤에서 누군가가 친 박수를 시작으로 우레와 같은 소리가 터졌습니다. 제 이름을 외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저를 칭찬하는 소리도 섞여 있었습니다.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이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습니다.

처음 무대에 섰을 때처럼 수많은 눈동자가 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눈빛은 처음과는 판이하였습니다. 제게 희망을, 빛을 주는 눈빛이었습니다. 관객들은 제게 답해주었습니다. 그렇다, 라고. 저 빛나는 세계에 제가 있어도 괜찮다고. 언젠가 저도……. 누구보다 환하게 빛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고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마저도 기뻤습니다. 절망에 짓눌린 게 아니라, 기쁨에 겨우 나오지 않는 것이니까요.


……감사…… 합니다.”


겨우 감사의 인사를 한 뒤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습니다. 박수 소리는 더욱 커졌고, 제 미소도 커져갔습니다. 고개를 든 저는 빠르게 뒤로 돌아 무대의 뒤편으로 갔습니다. 볼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고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뒤에서 지켜보던 프로듀서가 따스한 말을 건네주었습니다. 포근한 미소와 함께였습니다. 옆에 있던 쇼코 씨는 말없이 웃어주었습니다. 두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는데, 옆에서 문이 열리더니 동료들이 저에게 달려왔습니다.


데뷔 축하해!”


수많은 빛에 휩싸인 저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좋은 미소입니다.”


프로듀서가 건네준 아이돌 전문 잡지에는 공연이 끝난 직후의 제 사진이 있었습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제 얼굴을 보니 괜히 부끄러워져서 잡지를 덮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옆에 있던 시키 씨와 프레데리카 씨가 본 뒤였습니다.


후미카 쨩, 데뷔하자마자 잡지에 실린 거야? 대단한 걸~”

어디어디, ! 화제의 아이돌이래! 장안의 화제가 된 신인 사기사와 후미카는 누구인가?”


제 손에 있던 잡지를 빼앗은 두 분은 기사를 낭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자 갑자기 아리스가 나타나 두 사람에게 큰소리를 쳤습니다.


후미카 씨가 곤란해 하시잖아요!”


그러자 시키 씨와 프레데리카 씨가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리스는 씩씩거리며 두 사람을 쫓아가기 시작했고요. 항상 제 편을 들어주는 아리스에겐 미안하지만 이럴 땐 어린아이 같네요. 물론 본인에게 직접 말해주면 싫어할 테니 그냥 웃었습니다.


자자, 이제 연습시간이야!”


미나미 씨가 박수를 치자 불만이 가득한 얼굴인 아리스와 소파에 앉아 있던 유미 씨, 그리고 아이코 씨가 일어났습니다. 최근 유닛을 만들었거든요. 멤버는 아리스, 미나미 씨, 유미 씨, 아이코 씨, 그리고 저. 이렇게 다섯 명이랍니다. 연습은 항상 힘들지만, 좋은 분들과 함께라 항상 즐겁습니다.

리더인 미나미 씨를 따라 이동하다가 142‘s와 만났습니다. 사치코 씨가 자신의 귀여움을 뽐내는 걸 지켜보다가 뒤에 있던 쇼코 씨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녀는 저를 향해 웃어주었고, 저도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마 쇼코 씨도 저랑 같은 생각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언젠가, 같은 무대에서 다시 서로를 보여주자고.

 

 










후미카x쇼코... 커플이라기 보단 동료에 가까운 개념이라 그냥 후미카 팬픽이라 하겠습니다.


처음 두 사람을 보았을 때, 후미카는 쇼코를 동경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써본 이야기에요.


그도 그럴것이 평소엔 둘다 소심하기 그지없는 아이돌이지만, 무대에서도 항상 노력하는 후미카와는 달리 쇼코는 정말 자연스레 무대를 장악하니까요.


처음으로 제대로 써본 아이마스(데레) 팬픽이라, 쓰면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만 쓰고 나니 뿌듯하네요.



Posted by sahyu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