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카.”

자신의 이름이 불린 그녀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입은 미타키하라 중학교 교복. 허벅지까지 오는 하얀 오버 니 삭스. 깨끗한 갈색 구두. 그리고 붉은 리본으로 멘 분홍색 머리를 가진 소녀였다. 또래의 여자아이보다 체구가 작아 귀여운 인상을 지니고 있는 소녀는 외모에 걸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호무라……?”

이름을 부르는 것치곤 상당히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친하지 않은데 이름을 부르는 사이인 걸까. 하지만 그건 마도카에게만 해당하는 듯했다. 다른 한 사람, 마도카의 이름은 부른 소녀는 거리낌 없이 마도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검은색 머리. 앞머리는 머리띠로 고정을 해 단정하다. 머리와 색을 맞춘 듯 다리에 신은 스타킹은 검은색이었다. 마도카와 같은 미타키하라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귀엽고 순수한 느낌이 드는 마도카와는 달리 아케미 호무라는 어딘지 모르게 어두웠고, 요염했다.

오늘 집에 같이 가지 않을래?”

, 그럴까?”

아직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친한 사람이 없던 마도카는 말을 더듬으며 수락했다. 누가 보면 어쩔 수 없이 수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심 기뻤다. 다만 아직 호무라와 어색한 것뿐. 전학을 온 첫날에 다소 이상한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말을 걸어주며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호무라에게 점점 호감이 생기는 중이었다. 항상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자신을 대할 때는 조금 풀어진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어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호무라를 대할 때면 항상 가슴 한구석이 아련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를 대하는, 아니 연인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다른 옛 친구를 볼 때는 이런 감각이 들지 않았다. 오직 호무라만, 호무라만이 그런 느낌이 들게 했다.

, 그럼 마도카. 슬슬 나가…….”

잠깐, 마도카! 오늘은 나랑 집에 같이 가기로 했잖아!”

교실을 나서려던 그들의 뒤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뚝뚝한 호무라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그러나 옆에 있는 마도카를 의식하고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마도카가 몸을 돌리느라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목소리의 진원지에는 하늘색 머리를 단정히 정돈한 소녀가 있었다. 두 사람과 같은 교복을 입고 회색 니삭스를 입은 소녀는 딱 봐도 활발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앞의 두 사람과는 대조적인 이미지였다.

, 아침에 그랬지?”

그래!”

하늘색 머리의 소녀, 미키 사야카가 웃으며 대답했다. 사야카와 마도카는 소꿉친구로, 마도카가 미국에 가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당연히 마도카에게 있어서 호무라보다는 편한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때 사야카가 고개를 돌려 호무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살짝 혀를 내미는 게 아닌가. 명백한 도발이었다. 호무라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내심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아직 방법은 있다.

너와는 가는 방향이 다를 텐데, 미키 사야카?”

만약 가는 방향이 거의 같았다면, 소꿉친구인 두 사람은 아침마다 같이 오겠지. 허나 호무라가 관측한 바로는 두 사람은 학교 근처에서 접촉하는 경우가 많았다. , 생각보다 길이 많이 겹치지 않는다는 의미다.

중간까지는 같다고! 그러는 너는, 방향이 다르지 않아?”

허점을 찔린 사야카가 소리를 치며 반문했다. 당연히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물론 그에 대한 대비도 철저하다.

거의 같아. 우리 집은 마도카네 집을 지나서 조금 더 가야 있어.”

그런 억지가……!”

내가 사는 곳에 온 적이 없는 네가 어떻게 억지라고 단정할 수 있지?”

역시나, 사야카의 말문이 막혔다. 사야카의 집이 어딘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호무라와는 달리 사야카는 단 한 번도 호무라의 집에 와본 적이 없다. 애초에 정보력에서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났다. 처음부터 사야카에겐 승산이 없었다.

저기……. 그냥 사이좋게 셋이서 가면 안 될까?”

그때 마도카가 조심스레 의견을 꺼냈다. 정말 너무나도 마도카다운 의견이었다. 누구에게나 자애롭고, 누구라도 보듬어주는. 사야카는 친구의 뜻을 존중했고 호무라에겐 거절이라는 선택지조차 없었다.

알았어.”

고마워, 호무라!”

환하게 웃는 마도카를 보며 호무라도 미소 지었다. 그런 호무라를 사야카는 질렸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둘의 상태는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호무라는 매우 진지하게 시간을 5분만 되돌려서 자기 자신을 때리면 어떨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히토미가 말야, 쿄스케가 얼마나 눈치가 없는지 내게 한 시간 동안 연설을 하더라니까?”

아하하. 그래서 어떻게 됐어?”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가서 쿄스케를 실컷 때려줬지!”

사야카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설명을 해 주었다. 마도카는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아직 친하진 않지만, 반 친구들의 이야기가 즐거운 모양이다.

호무라는 뒤에서 표정이 썩은 채로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미키 사야카는 사쿠라 쿄코와 더불어 마법소녀들 중에서 가장 말이 많던 녀석이었다. 토모에 마미와 마도카는 그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자주 했고, 호무라 자신은 그냥 말수가 적었다. 그러니 과거에 시간을 계속 돌릴 무렵에도 마도카를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설득하지 못했지.

그때 사야카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일그러진 호무라의 표정을 보고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게 사야카의 노림수였다. 말주변도 없고 마도카와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 적은 호무라가 사야카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절로 저열한 쾌감이 느껴졌다.

세 사람은 천천히 걷고 있었기에 이대로라면 대략 10분 정도는 더 지속할 터였다. 사야카는 아직 10분이나 남았음에 기뻐했고, 호무라는 10분조차 참지 못할 것 같아 사야카의 입을 막을 방법을 곰곰이 생각했다.

불현듯 재밌는 방법이 호무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도 악의가 철철 넘치는 방법이. 예전의 호무라였다면 절대로 생각 못 할 정도로 사악한 방법이지만, 그녀는 악마다.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살며시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너무 큰 소리가 나지 않게 적절히 조절하여 두 손을 부딪쳤다. . 하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사야카의 말이 끊겼다. 후두부를 강타한 듯한 충격이 그녀를 덮쳤다. 생기가 넘치던 두 눈동자가 흔들리고 밝게 웃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변화에 깜짝 놀란 마도카가 급히 소리쳤다.

사야카! 왜 그래? 괜찮아?”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고 흘러들어오는 강렬한 기억. 마법소녀. 마녀. 큐베. 엔트로피. 토모에 마미. 치즈. 샤를로테. 모모에 나기사. 케이크. 사쿠라 쿄코. 사과. 소울 잼. 영혼. 마녀화. 소원. 동반자살. 카나메 마도카. 멜론. 크림힐트 그레트헨. 엔트로피의 중심점. . 원환의 이치.

아케미 호무라. 호박. 호무릴리. 악마.

머리를 붙잡고 있던 사야카는 금방 고개를 들었다. 다시 웃는 얼굴이었다.

, 괜찮아. 잠깐 현기증이 와서. 별거 아니야.”

정말 괜찮은 거지?”

! 물론이야.”

활기차게 대답하던 사야카가 호무라를 향해 눈을 돌렸다. 순간 웃음이 싹 사라지고 남은 날카로운 눈매가 호무라를 관통했다. 적의와 함께 느껴지는 순수한 분노. 그 눈빛을 받고 있자니 숨이 턱턱 막혀온다. 심리적인 압박이 아니다. 공기 그 자체가 호무라를 압박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어 공기의 흐름을 바꾸었다. 입가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만약 옆에 마도카가 없었다면 주저 없이 물어봤겠지. 기분이 어때?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평범한 소녀에서 세계의 진실을 깨달은 마법소녀가 된 소감이.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칼을 꺼내 나를 찌를 거야? 아니면, 그 마녀의 창으로 나를 꿰뚫을 건가? , 뭐든 좋아. 나를 즐겁게 해 보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마도카가 정말로 없었다면 호무라가 사야카의 기억과 힘을 돌려줄 이유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두 사람이 같이 하교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본말전도다. 호무라는 내심 아쉽게 여겼지만 좋은 표정을 구경한 데에 만족하고 다시 사야카의 기억을 없앨 준비를 했다.

, 나 오늘 일이 있어서 여기서 헤어져야 할 거 같아.”

갑작스레 사야카가 이야기를 꺼냈다. 돌아온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서인지, 되찾은 힘을 가다듬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어쨌든 시간을 벌기 위함이겠지. 호무라는 이쯤에서 끝내기 위해 손을 들었다.

다시 손뼉을 치려고 손을 모으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여기서 사야카의 기억을 지우지 않는다면, 그녀는 어떻게든 호무라를 막으려고 하겠지. 말로? 아니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틀림없이 무력이다. 자신의 양손에 칼을, 마녀의 양손에는 창을 꼬나 쥐고 자신에게로 돌진할 것이다. 설령 승산이 전혀 없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최후에는 절망하겠지.

상상만 해도…….

그래? 아쉽게 되었네.”

손을 내리며 마도카 대신 답변을 해 주었다. 사야카의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호무라는 마도카가 보지 않는 사이 입 모양으로 사야카에게 말했다. ‘그 아이 앞이야.’ 그녀는 눈에서 불꽃이 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부릅떴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계획 없이 호무라에게 덤비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내일 보자!”

! 잘 가!”

사야카는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호무라는 그녀의 뒷모습에 미소를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곧 자신을 즐겁게 해줄 광대를 찬미하는 조소를.

 

 

 

집에 도착한 사야카는 대충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급히 들어왔다. 숨을 고르며 손에 든 가방을 내려놓는데 손에 못 보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아니, 못 보던 반지가 아니다.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잠시 잊어버리고 있던 물건. 아니다. 물건도 아니다. 이걸 어찌 한낱 물건이라고 격하시킬 수 있겠는가.

내 영혼인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호무라의 기억 조작이 있었다고 해도 자신의 영혼을 잊고 있었다니. 텅 빈 몸 대신 자신을 지탱해주는 이 소울 젬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는지.

두 손을 모아 반지를 가볍게 쥐었다. 그러자 반지가 둥근 타원형 구체로 변했다. 금색 금속이 둘러싸고 있는 타원형 구체. 이것이 바로 마법소녀의 영혼이다. 사야카를 비롯한 수많은 마법소녀들의 본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천히 마력을 응용하였다. 그러자 손에 든 소울 젬이 공명하며 폭발적인 마력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머리 색깔과 같은 푸른색 마력은 온몸을 감싸 안았고 다시 빛이 사라졌을 때에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그녀가 있었다. 평범한 교복을 입은 여중생이 아닌, 망토와 칼로 무장한 마법소녀 미키 사야카가.

손에 든 칼을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나쁘지 않다. 손끝에 칼을 다루는 감각이 남아 있다. 며칠만 수련한다면, 예전처럼 다룰 수 있겠지. 마법적인 능력은? 망토를 움직이거나 허공을 걷는 등 기초적인 움직임을 해 보았다. 이것 역시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다음은? 칼을 오른손에 쥐고 왼팔을 향해 내리쳤다. 반쯤 잘린 왼팔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고통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수 초 뒤, 서서히 피가 멎었고 상처조차 없어졌다. 바닥에 웅덩이를 만든 피만이 사야카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치유능력도 괜찮네.”

, 이제 마지막 하나만이 남았다. 가장 중요한 그녀를 움직이는 일이다. 정신을 집중하여 방금 만들어진 피 웅덩이 쪽으로 마력을 흘렸다. 그러자 웅덩이가 일렁거리더니 인어 같은 존재가 일렁거렸다. 두 손에 커다란 칼을 든 연모의 인어. 사야카의 또 다른 모습.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

그 순간, 세계가 잿빛으로 변했다. 색채가 옅은, 무기질적인 세계. 생동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이 세계에서 방문을 열고 나타난 존재가 있었다. 시간을 걸고 소원을 빌었기에 멈춰버린 시간 속을 유일하게 유영할 수 있는 존재. 아케미 호무라가.

그녀는 모처럼 꺼낸 버클러를 쓰다듬었다. 악마가 된 이후로는 딱히 쓸 일이 없었기에 잊고 있었으나, 지금처럼 몰래 염탐을 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도구가 없다. 상대는 자신이 왔다 갔다는 사실조차 모를 테니까.

그녀는 걸음을 멈춘 채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사야카의 손 끝에 걸려 있는 칼과 그녀의 복장, 그리고 피 웅덩이에 어렴풋이 보이는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까지.

내가 시간을 돌릴 때에는 언제나 자신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애송이었는데, 원환의 이치에서 많이 성장한 모양이네.”

일전에 호무릴리가 되어 다른 마법소녀들과 싸울 때도 느꼈지만 미키 사야카는 강해졌다. 자신의 능력과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그것을 활용할 줄 안다. 결계 안에서 잠시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이제 호무라는 사야카를 이길 수 없다. 열 번 싸우는 두어 번 정도 이길 수 있을까. 그 정도로 승률이 낮다.

물론 어디까지나 마법소녀였을 때의 이야기지만. 지금의 호무라는 천 번 싸워서 천 번 모두 이길 자신이 있다.

확인을 끝낸 호무라가 방문을 열다가 문득 실소를 흘렸다. 생각해보면 항상 필요로 사용하던 시간정지인데, 이렇게 시답잖은 이유로 사용하고 있으니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하긴 세계조차 자신의 욕망으로 물들였는데, 이제 와서 고작 능력 하나를 욕망으로 못 쓰겠는가. 쿡쿡거리며 방문을 나갔고, 곧이어 세계는 다시 제 모습을 되찾았다.

물론 사야카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단지 확인을 끝냈기에 더 이상 마력을 낭비하지 않고 모조리 회수하는 작업만 했을 뿐이다. 푸른빛이 사라진 사야카의 방에서는 어떠한 마법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질척거리는 피를 제외하면 말이다.

좋아. 대부분 능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어.”

원환의 이치에 있을 적에 사용하던 능력을 전부 쓸 수 있다는 점은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무뎌진 손만 풀면 그때와 동등한 전투력을 가질 수 있다. 결계 속의 호무릴리를 소탕하던 그때의 힘을.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다.

다만 그와 반대로 마음 한구석에 있던 불안감도 더욱 커졌다. 자신을 기만하려고 하면 기억만 줘도 충분했을 텐데 왜 힘까지 돌려준 것일까? 그것도 사야카 최대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까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사야카는 두 가지 가설로 압축하였다. 첫째. 호무라가 실수를 했다. 철두철미한 호무라지만 그럴 수도 있다. 그녀는 점점 지쳐가고 있다. 처음 악마가 되었을 때랑 비교해보면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다크서클도 짙어졌다. 이 세계를 억지로 유지하는 데에 큰 힘을 사용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마도카도 막아야 하고. 그러다가 자신을 놀려줄 생각으로 내 기억을 돌려주려 했으나 실수로 힘까지 돌려준 것이다. 이 추측이 옳다면 사야카는 호무라를 좀 더 쉽게 제압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생각해도 두 번째 이유가 훨씬 더 가능성이 높았다. 두 번째는……. 사야카가 전력을 다해도 호무라를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에 돌려주었다. 이게 맞다면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만큼 악마가 강하다는 뜻이니까. 첫 번째라고 믿고 싶지만 본능은 두 번째가 맞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야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호무라를 상대해야 한다. 지금 이 세계에서 악마를 막을 수 있는 마법소녀는 사야카 하나뿐이다. 마도카도, 쿄코도, 마미도, 나기사도 지금은 그저 평범한 여자아이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철저하게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사야카가 보기에 지금 호무라는 방심하고 있다. 절대로 질 거라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틀림없이 어딘가에 틈이 생길 거라 보았다. 그 자그마한 틈새에 자신의 칼을 꽂는다. 그리고 이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릴 것이다.

사야카는 자신의 손 위에서 빛나는 소울 젬을 보며 결의를 굳혔다.

 

 

 

며칠 뒤, 하굣길에서 마도카와 헤어진 사야카는 곧바로 호무라가 간 방향으로 뒤쫓아 갔다. 그 날 이후 학교의 기록을 뒤져 그녀의 집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길을 통해 집으로 가는지도 알아내었다. 마법소녀의 신체능력이라면 호무라가 집에 당도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다.

사야카의 예상대로 호무라가 당도하기 전에 먼저 준비한 장소에 도착했다. 대략 2~3분 뒤에 호무라는 이곳에 당도한다. 잠시 벽에 기대어 호흡을 골랐다.

사야카가 세운 계획은 다음과 같다. 우선 가장 먼저 호무라가 지나가는 골목 옆에 숨어 있다가 기습을 감행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거나 지나치게 방심을 했다면 여기서 죽겠지. 그렇게 된다면 사야카의 입장에서는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 실패할 생각을 하고 다음 단계로 돌입한다.

실패할 경우 절망하는 척 연기를 하며 호무라 이목을 집중시킨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더 칼을 들이민다. 그래. 웬만하면 다시 공격을 하는 게 좋다. 그래야 호무라가 더 집중을 할 테니까.

그리고 사야카에게 모든 신경을 쓰고 있는 호무라의 뒤에서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로 기습을 가한다. 일부러 이 거리를 택한 이유가 옥타비아를 쓰기 위해서다. 골목 바로 옆 건물이 공중목욕탕이다. ,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를 소환하는 데 필요한 촉매인 물이 항상 존재한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인어의 마녀를 소환할 수 있을뿐더러 호무라에게 갑작스럽게 기습을 가하기에도 용이하다. 녀석이 미래예지라도 하지 않는 이상, 틀림없이 당할 것이다. 그렇게 믿고 칼을 찔러야 한다.

…….”

긴장감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원환의 이치에서 수많은 싸움을 했지만, 이번만큼 긴장된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마수, 마녀 따위가 아니라 세계의 섭리에 간섭하는 악마다. 신과 같은 마도카의 힘을 가로챘으니 신과 동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하지만 마도카를 위해서라면, 신조차 벤다. 그것이 사야카의 결의였다.

이윽고 호무라의 발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상념에서 깨어난 사야카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칼을 들었다. , 여기서부터 카운트 다운이다. 다섯, , , , 하나!

꺾인 골목에서 호무라의 얼굴이 보였다. 갑작스레 놀란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할 때 이미 칼끝은 얼굴에 닿기까지 불과 10cm 정도를 남겨두었다. 사야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찔러 넣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반응한 호무라는 몸을 비틀었다. 어느새 손목에는 버클러가 달려 있었다. 변신도 하지 않았는데, 굉장한 반응 속도였다. 미리 대비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항상 준비하고 있던 게 틀림없다. 어느 쪽이든 사야카에게 중요한 건 최초의 기습이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호무라가 꺼내 든 저 버클러는 분명 시간을 조종하는 물건. 그렇다면, 사야카에게 남은 방법은 무조건 붙어서 연속적인 공격을 하는 것뿐이다. 시간을 정지하려 할 때, 언제든지 저지할 수 있도록.

사야카에게 있어 정말로 다행인 건 녀석이 마법소녀였을 때와 같은 무장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악마가 되었다고 해서 완전 다른 무언가로 반격할 줄 알았는데 결국 버클러와 총화기. 그렇다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양 손에 든 두 자루의 검을 쉴 새 없이 놀렸다. 호무라는 크게 뒤로 후퇴하며 버클러에서 권총을 꺼냈다. 칼은 총을 이길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중거리 이상에서다. 근접전이라면 칼이 훨씬 유리하다. 상대가 전력을 다하는 토모에 마미라 해도, 근접전에서 순수하게 머스켓만 사용한다면 사야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총과 칼이란 그런 관계니까.

하지만 상대는 몇 십 번이고 시간을 돌려가며 수많은 전장을 누빈 아케미 호무라. 당황하지 않고 칼을 능숙하게 받아내며 때때로 총을 쏘았다. 시간 정지는 사야카에게 저지당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 결국, 사용하는 손은 하나뿐. 그렇다면, 양손을 다 쓰는 사야카가 상대적으로 훨씬 유리했다.

하압!”

기합을 넣고 칼을 크게 휘둘러 권총을 쳐냈다. 저 멀리 날아가는 권총을 뒤로한 채 왼손에 든 검이 목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틀림없이 버클러에서 새로운 총을 꺼내는 것보다 빠르다! 사야카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엇나갔다. 호무라는 버클러에 손을 뻗는 대신 왼손을 들어 사야카의 어깨를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 권총이 튕겨져 나가면서 뒤로 밀린 오른손을 뒤로 당겼다. 동시에 약간 구부러져 있던 오른손을 펼쳤다.

크윽!”

사야카가 그대로 강력한 힘에 밀려 벽에 꽂혔다. 구멍 난 어깨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와 발밑을 적셨다. 마법소녀가 고통을 느낄 정도라니, 얼마나 터무니없는 충격이었는가. 그 실체를 보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호무라의 손에는 보라색 활이 쥐어져 있었다. 사야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젠장, 그래. 녀석에겐 저것도 있었지. 본디 마도카와의 만남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소원을 빌어 마법소녀가 된 호무라의 무장은 시간을 다루는 버클러 하나밖에 없었지만, 마도카가 원환의 이치가 된 뒤로는 그녀가 사용하던 것과 흡사한 활을 다루게 되었다. 활도 가지고 있을 거라 예상했어야 했는데, 방심했다.

하지만 아직 사야카에겐 비장의 한 수가 남았다. 그걸 위해서는 호무라를 방심시킬 필요가 있다. 사야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기억과 힘을 되돌린 건 무슨 속셈이지, 아케미 호무라?”

호무라는 화살 끝을 사야카의 심장을 향해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글쎄, 무엇 때문일까.”

어느새 특유의 무표정을 되찾은 호무라가 무심하게 사야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야카는 그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명백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증거다. 사야카는 잇몸을 꽉 깨물었다.

그나저나 나를 잊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더니, 내가 기억을 돌려주기 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네?”

…….”

네 의지는 그 정도라는 거겠지. 미키 사야카.”

아니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었지만, 벽과 어깨를 관통한 화살은 빠지지 않았다. 더 많은 피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동시에 격통도 더욱 거세졌다. 단순하게 상처가 벌어졌기 때문에 더해진 고통이 아니다. 틀림없이 호무라가 고통을 조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화살에 맞았을 때도 고통을 느꼈던 거군. 사야카가 홀로 중얼거렸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증명해보렴. 네 의지를. 나를 없애고 마도카를 구하고 싶잖아? 그 의지가 내 정신보다 강하다면, 나를 쓰러뜨릴 수 있겠지.”

그렇다면 보여줄게.”

사야카는 서서히 정신을 집중했다. 호무라의 등 뒤, 벽 너머에 있는 물이 느껴졌다.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를 소환하기 위한 매개체, ! 단숨에 마력을 끌어모아 인어의 마녀를 소환한 뒤 곧바로 칼을 찔렀다.

내 의지를!”

요란한 굉음과 함께 벽이 부서지며 그 속에서 커다란 창날이 번뜩였다. 날카롭게 벼려진 마름모 모양의 창날은 호무라의 등을 향해 쇄도했고, 그대로 호무라의 등을, 스쳐 지나가서, 사야카의 배를 관통했다. 방금 느꼈던 통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지만, 그보다는 정신의 혼란이 사야카를 괴롭혔다. ? 어째서? 나의 마녀,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가?

좋은 표정이야.”

그런 사야카에게 호무라가 다가왔다. 이제는 누가 봐도 명백한 비웃음을 띄고 있는 표정을 짓고는, 다가와서 사야카의 얼굴을 가까이하였다. 서로의 눈동자가 무슨 빛을 띠고 있는지 보일 정도의 거리였다.

어떻게? 라니. 너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잊은 모양이구나.”

…………!”

정신에 심각한 충격을 받은 사야카의 입에서 가까스로 두 음절이 새어나왔다. 그 모습이 호무라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래. 악마. 신조차 떨어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악마야. 세계를 개편할 수 있는 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고작 마녀 하나 조종할 수 없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내게 힘을 돌려준 이유는……설마……?”

물론.”

호무라는 잠시 말을 끊고 사야카의 푸른 눈동자를 감상했다. 격렬하게 떨리고 있는 두 눈동자는 한 가지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감정이자 본능적인 감정.

공포로 가득 찬 너의 표정을 감상하기 위해서야.”

사야카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호무라의 보라색 눈동자를 보았다. 전혀 떨림이 없는 두 눈동자는 여러 감정으로 아롱져 있었다. 기쁨, 환희, 즐거움, 행복,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7대 죄악 중 하나이자 궁극의 죄악.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최악의 감정.

……교만……!”

날 즐겁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미키 사야카.”

마지막으로 호무라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럼, 그 애 앞에서는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야지?”

, 하고 언젠가 들어보았던 박수 소리를 들으며 미키 사야카의 의식이 가라앉았다.

 

 

 

마도카.”

오늘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케미 호무라에게 있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일상을 위해 수많은 것을 희생했고 또한 지금도 희생하고 있기에 그녀는 이 일상을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과 마도카의 이러한 일상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라도 용납하지 못했다.

잠깐, 나도 같이 가!”

이를테면 저쪽에서 달려오고 있는 미키 사야카 같은 자들을 말이다. 며칠 전에 따끔하게 혼을 내 줬거늘, 여전히 저 모양이다. 아니, 생각해보면 관련된 기억을 모조리 지웠으니 기억을 못 하고 있겠구나. 혹시라도 그때 느꼈던 공포가 영혼에 각인되지 않았을까, 하고 기대했으나 지금의 사야카를 보아하니 그런 건 전혀 없는 듯했다. 호무라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만간 한 번 더 그녀에게 공포를 새겨줄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다시 한 번 공포로 물들이자.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비열한 쾌감이 올라왔다. 문득 기억을 잃기 전 사야카가 그녀를 불렀던 호칭이 떠올랐다. 교만한 악마. 아아, 확실히 교만에 빠졌을지도. 하지만 나는 악마잖아? 교만하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지.

그녀는 마도카와 사야카의 뒤에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악마만이 지을 수 있는 교만한 미소를.

 

 

 

 



마마마 7대 죄악 합작에서 '교만' 을 주제로 쓴 팬픽입니다.

'팬픽 >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마와 초콜릿  (0) 2015.03.16
Posted by sahyu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