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한 그 날은,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평범한 날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죽림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고, 언제나처럼 홀연히 나타난 카구야가 내게 시비를 걸었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적당히 응수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카구야가 나를 공격했고, 언제나처럼 반격을 날렸다. 결국 언제나처럼 죽고 죽이는 싸움을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내 일상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카구야는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평소에는 내가 좀 더 공격적이고, 카구야는 수비적인 태도를 취할 때가 많았다. 다른 패턴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능숙하게 대응하였다.

가장 먼저 나의 왼팔이 날아갔다. 이어진 공격에 왼쪽 눈과 귀까지 손상되었으나, 카구야의 우반신이 너무 깊게 파고들었다. 그 틈을 타 오른손으로 복부를 찔러 안쪽에서 불꽃을 일으켜 내장부터 태워버렸다. 카구야의 오른발이 날아왔으나 내 무릎이 더 빨랐다. 정강이뼈를 부러뜨리자 카구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씨익 웃었다.


“오늘은 내가 이겼군. 배때기에 구멍이 뚫려 있으니 시원하지?”

“응. 통풍이 참 잘 되는 걸.”


카구야도 씨익 웃으며 벌렁 드러누웠다. 가끔 이 녀석의 행동거지를 보면 과거에 공주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뭐, 그런 점에서는 나도 할 말이 없지만. 죽은 아버지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지실 테지.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은 어디 갔느냐, 하고.

슬슬 몸이 재생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왼쪽 눈의 시력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재생이 빠르다고 부러워 할 사람도 있던데 그놈에게 내 간을 입에 쑤셔 박고 싶다. 몸이 망가지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모를 테니까.

문득 미스티아의 장어구이가 먹고 싶어졌다. 그래, 같이 갈 사람도 없는데 카구야나 데리고 갈까. 이 녀석도 슬슬 재생이 끝났을 터.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도 복부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카구야가 보였다. 오늘따라 좀 늦는군.

그런데 카구야의 표정이 이상했다. 웃고 있었으나 평소와는 달랐다. 나와 싸운 뒤의 상쾌한 미소가 아니다. 희열로 가득 찬 저 표정은 묘하게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저 표정,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언제더라?


“모코우.”


나른한 목소리가 나를 자극했다. 이 목소리도 평소와는 다르나, 언젠가 들어본 적 있었다. 카구야가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목소리로 나를 부른 적이 있다고? 대체 언제?


‘네가 후지와라노 모코우, 니?’

“아.”


기억났다. 그래. 분명 저 표정과 저 목소리. 나와 카구야가 처음 만났던 날. 처음 싸운 날. 처음 죽이고 죽였던 그 날. 그때 카구야의 표정. 그때 카구야의 목소리. 틀림없다. 지금 그녀는 그때의 카구야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때로 돌아갔지?


“이런 기분 오랜만이야.”

‘이렇게 격렬한 싸움도 오랜만이네.’


자꾸 그때의 카구야와 겹쳐 보였다. 나와 죽고 죽인 후, 새로운 삶의 쾌감을 찾아 희열을 느끼던 카구야처럼. 그렇다면 지금의 카구야도 무언가 새로운 즐거움을 찾았단 말인가? 대체 무엇을…….

그제야 나는 아직도 카구야의 복부에서 피가 흘러넘친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나는 이미 모든 상처가 아물었거늘 재생은 커녕 지혈조차 되지 않는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그대로 카구야에게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갑다. 얼굴을 보았다. 창백하다.


“카구야!”

“소리 지르지 마. 머리가 울려.”


틀림없다. 이해가 전혀 되지 않지만 카구야는 죽어가고 있었다. 죽지 않는 봉래인이, 머리카락 한 올만 남아도 재생할 수 있는 봉래인이!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이대로 놔두면 카구야는 죽는다.

손을 뻗어 복부를 눌렀다. 손끝에서 일으킨 불로 지져 상처를 지혈했다. 부러진 정강이뼈를 맞추고 다리에 난 상처들을 모조리 태웠다. 약. 약이 필요하다. 당연하게도 나와 카구야는 약 따위는 필요 없는 몸이었기에 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게 너무나도 후회되었다.


“모코우.”


그때 그녀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으나 그녀는 너무나도 기뻐 보였다. 그때처럼.


“이미 늦었어.”

“……왜.”

“나는 죽어.”

“왜!”


나는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희열을 담고 있는 얼굴은 신이 직접 만든 완벽한 조각 같았다. 비단 같은 피부. 앵두를 담은 입술. 맑은 폭포수를 연상시키는 긴 머리. 수많은 남자를 유혹했던 그 자태는 이제 죽음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제 너와 죽고 죽이는 것도 질렸어. 재미를 잃었어. 무언가 새로운 놀이를 찾으려 했지만, 문득 이제 더는 새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그래. 죽음이야. 우리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 최후의 즐거움으로 삼으려고 마지막까지 남겨뒀었는데, 생각해보니 지금이 그 마지막인 것 같아서.”

“…….”

“모코우. 그동안은 즐거웠어. 너와 싸울 때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느꼈어. 그래서 죽는다면 네 손에 죽고 싶었어. 나를 몇 백 년 동안 살게 해 준 너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그딴 걸로 감사하지 마!”


내 감정이 격해지며 몸 전체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내가 잡고 있던 카구야 또한 불에 그슬렸으나 카구야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이미 화상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죽음이 진행되었나?


“아아. 정말 기분 좋구나. 이게 죽음이구나. 후후. 단 한 번밖에 하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울 정도야.”

“개자식이……!”

“표정이 왜 그러니, 모코우? 너는 언제나 날 죽이고 싶어 했잖아. 네 아버지의 원수이기도 하고. 그 소원을 이루었으니,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닥쳐!”


그래. 카구야의 말 대로다. 그녀는 내 아버지의 원수였고, 내가 이런 저주받은 몸을 가지게 된 원흉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와 만난 뒤, 나는 그녀를 몇 번이고 죽였다. 찢어 죽이고, 태워 죽이고, 밟아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그리고 이후 몇 백 년 동안이나 죽였다. 이제는 이유가 있어서 죽이는 게 아니었다. 죽이기 위해 만났다. 그녀를 죽이기 위해 살아왔다. 그런 그녀를 이제 죽일 수 없게 된다고? 그럼 나는? 내 삶은?


“아…… 점점 눈이 감기네……. 나른하고…… 기분 좋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카구야의 눈이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의식이 소멸하여 혼이 육체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안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필사적으로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쿡…….”


그런 나를 보며 카구야는 웃었다. 비웃음일까. 아니면 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대한 순수한 웃음일까. 모르겠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제 나는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손에 힘이 빠졌다. 내 손아귀에서 풀린 카구야의 몸이 서서히 떨어졌다.


“모코우.”


마지막으로 그녀가 손을 뻗으며 나를 불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 나도, 그녀도 손에 힘이 없었기에 스르르 풀리며 맞잡은 손이 떨어졌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기 직전, 그녀는 내게 종말을 고했다.


“안녕.”


툭, 하고 맥없이 그녀의 몸이 땅에 닿았다. 흑단처럼 새까만 눈동자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나의 몸도 그녀처럼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한참 동안 멍청하게 있던 나는 비명을 질렀다. 지옥에 닿을 만큼 크게.


 




“그래. 내가 만들었어. 봉래약을 만든 것도 나니까. 그 반대 역시 만들 수 있었지. 하지만 이제 더는 만들 수 없어. 그 약은 나 혼자 만든 게 아니거든. 봉래약도 그렇지만, 이 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주의 힘이 필요해. 공주의 능력이 있어야 제조할 수 있지. 왜 공주에게 약을 만들어 줬냐고? 공주가 원했으니까. 그것뿐이야. 자, 질문이 끝났으면 좀 비켜줄래? 난 너랑은 달리 바쁜 사람이거든.”

 


“미안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 이미 그녀는 사신의 인도 아래 삼도천을 건너 재판을 받았을 거야. 결과는 보나 마나 지옥이겠지. 지은 죄가 크니. 그녀가 어떻게 죽은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봉래인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너도나도 너를 죽이러 올 테니까.”


 

“뭐야? 봉래인이잖아? 나랑은 상극인 녀석이 웬일이래. 그래도 지금은 근무 중이 아니니까 넘어가자고. 누구? 아하. 달의 공주님 말인가. 그래. 처음엔 깜짝 놀랐지. 절대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영혼이 내 눈 앞에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이었지. 그래서 나는 내가 맡은 임무대로 그녀를 태우고 갔어. 무슨 얘기를 했냐고? 뭐 이것저것. 보통 죽은 영혼은 자신이 죽어서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공포에 젖어 풀이 죽어 있는데 그 공주님은 오히려 매우 유쾌했었어. 죽음을 아주 기뻐하고 있었지. 그래서 기분 좋게 나와 얘기를 나누었어. 나도 모처럼 유쾌한 대화를 나누어 즐거웠고. 그다음의 일은 내게 물을 게 아니라 염마님께 직접 물어야 할 거야.”


 

“평생 이곳에 올 일이 없는 당신이 여기는 무슨 일이죠? 호라이산 카구야? 당신은 그녀가 어디로 갔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래요. 지옥입니다. 당신도 그러하지만, 그녀는 특히 지은 죄가 커요. 수많은 남자를 유혹한 죄. 봉래약을 뿌려 이 세상에 혼란을 일으킨 죄. 에이린으로 하여금 달의 사자들을 죽이게 한 죄. 주어진 능력을 남용하여 시간을 가둔 죄. 밤을 멈춘 죄 등등. 열거하자면 하루 하고도 한나절이 걸릴 겁니다. 수백 년을 살아오며 지은 죄인 만큼 남들보다 더 많은 세월을 지옥에서 보내게 될 겁니다. 이제 됐나요? 그럼 돌아가세요. 후지와라노 모코우.”


 

“어머, 네가 어쩐 일이야. 란이 무슨 헛소리를 하나 했는데 정말이었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뭐? 카구야의 영혼을 지옥에서 빼달라고? 재밌는 농담이구나. 그래. 내 능력이라면 할 수는 있어. 가능하긴 해. 그런데 내가 왜 그걸 해야 하지? 나는 요괴의 현자야. 이 환상향의 균형을 지키는 요괴지. 그런 내게 명계의 규율을 어기라고? 내 친우가 죽어도, 내가 아끼던 무녀가 죽어도 나는 하지 않았어. 내 사리사욕보다는 환상향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니까! 하물며 나와는 별 인연이 없는 카구야를? 웃기지 마. 그런 헛소리는 집에 가서 혼자 하는 게 좋겠다. 그럼.”

 


“확실히 봉래인이 죽지 않은 건 이변이라고도 할 수 있어. 본래 죽지 않아야 할 요괴가 죽은 거니까. 하지만 본인이 원한 죽음이잖아? 죽지 않고 계속 살 수 있었는데, 자신이 원해서 죽은 거니까. 이변을 저지른 요괴는 이제 없으니, 이변은 끝난 거야.”


 

“그야, 슬프죠. 매일 저를 부려먹고 괴롭히긴 했지만, 그래도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하지만 공주님이 원하신 거잖아요? 공주님이 한 번 결심한 일은 영원정에 있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요. 설령 스승님이라 할지라도. 하물며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네 심정은 이해한다만,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어. 누구라도 말릴 수 없었을 테지. 억울하게 죽었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네만, 그녀 스스로 원한 죽음이야. 슬픈 일이지만 그녀를 애도하고 보내주는 수밖에.”


 



“왜!”


손끝에서 강렬한 불꽃이 솟구쳐 요괴의 전신을 태웠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요괴는 곧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나는 재를 발로 밟았다. 재가 하늘로 솟구쳐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거냐고!”


전신에서 일어난 불은 주변에 있던 수많은 시체를 단숨에 태워버렸다. 이미 대지는 나의 분노로 새카매진 지 오래였다.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량한 대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카구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있던 자리를 손으로 쓸어본다. 거친 흙만이 느껴졌다. 이게 아니야.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살결이 있어야 해. 왜 없는 거지? 왜? 어째서? 영원히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왜?

카구야가 죽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처음 며칠간은 환상향 전체가 떠들썩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봉래인이 죽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허나 그것뿐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곧 시들해졌고, 대부분의 요괴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내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일부 요괴들만이 아직도 나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카구야가 죽었다고 해서 나도 죽을 줄 알고.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다. 그래. 봉래인을 죽이는 약을 만든 야고코로 에이린이나 명계를 유지해야하는 사이교우지 유유코, 영혼을 강 건너로 인도해 주는 게 전부인 오노즈카 코마치, 흑백만을 가리는 꽉 막힌 재판관 시키에이키 야마자나두, 머릿속에 환상향밖에 없는 야쿠모 유카리. 그들은 어차피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평등한 레이무도, 카구야를 따르던 레이센도, 심지어는 나의 좋은 이해자라고 생각했던 케이네 조차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카구야를 만나고, 케이네를 알게 되고, 영야이변으로 인해 많은 인요들을 알게 되어 이제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생각했지만, 모두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결국, 예전과 똑같았다. 카구야와 만나기 전의 나. 철저히 혼자였던 나와.


내 유일한 이해자는 이제 없다.

앞으로도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를 알아줄 사람이 없는…… 이 빌어먹을 세계 따윈…….”


필요 없어.


 


몸에서 불꽃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새빨간 불꽃은 서서히 새의 형태로 바뀌었다. 나의 상징과도 같은 불사조는 내 심정을 대변하듯 끝없이 하늘로 올라갔다. 이윽고 요괴의 산 정상이 보일 정도로 올라가자 불사조는 수십 개의 불꽃으로 갈라져 환상향의 전역으로 날아갔다. 나뉜 불꽃 또한 날아가면서 모두 새의 형상으로 변했다.

짐승의 길에도, 무연총에도, 요괴의 산에도, 현무의 계곡에도, 마법의 숲에도. 불사조는 날아갔다. 이제 불사조는 고도를 낮추어 불꽃의 날개에 닿는 모든 것을 불태우겠지. 스스로 태워 환상향 전역을 불로 뒤덮을 것이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딱히 없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태울 뿐이다.


 


“여기 있었구나, 모코우!”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소리는 오랜만에 들은 지라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곧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해냈다. 그래,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지. 고개를 돌려보자 역시나. 하쿠레이 레이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뭐긴, 환상향을 불태우고 있지.”

“이변치고는 너무 심하지 않아?”

“이변? 하!”


레이무의 말에 자연스레 코웃음이 나왔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감이 날카로운 무녀님이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되시나? 아직도 이게 이변 같은 장난으로 보이는 건가? 대답 대신에 불꽃을 날렸다. 재빨리 피한 레이무가 다시 물었다.


“지금 룰을 어기는 거야? 스펠카드 룰을?”

“그런 어린애들 장난을 왜 내가 지켜야 하지?”


서서히 굳어지는 표정을 보니 이제 어느 정도 내 말을 이해한 듯했다. 손에 스펠카드 대신 고헤이와 부적을 꺼내 꽉 쥐었다. 그래, 그래야지. 스펠카드 룰 같은 장난이 아닌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해야지. 그래야 내 분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레이무에게 접근했다. 팔을 흔들어 수십 마리의 불새를 날렸다. 레이무는 당황하지 않고 불새 사이를 능숙하게 피하며 부적을 날렸다. 갖가지 주문이 적힌 부적은 스스로 궤도를 바꾸어 팔방에서 날아들었다. 허나 이쯤은 우습지. 가볍게 불태우고 나니 이번에는 커다란 음양옥이다. 동시에 옆에서는 침이 쇄도해왔다. 과연 레이무. 하쿠레이의 무녀. 요괴퇴치의 천재! 레이무에 비하면 나는 둔재라는 이름조차 아까운 우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인이 몇백 년을 수련하면 천재조차 뛰어넘을 수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우인이 불로불사의 몸이라면 어떨까!

나는 모든 공격을 몸으로 받으면서 전진했다. 음양옥에 맞아 팔이 부러지고, 침이 박혀 전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웬만큼 정신력이 강한 요괴라 해도 이 정도 라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겠지만, 나는 이보다 더한 고통을 매일같이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보다 더한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다.


“큭……!”


레이무가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피탄 당하면 끝인 탄막놀이와는 다르니까. 아니, 내가 봉래인이기 때문에 당황한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탄막놀이와 진짜 싸움은 상당히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보통 요괴라면 이렇게 많은 탄을 맞은 시점에서 이미 끝났다.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봉래인이니까. 언제나 카구야와 죽고 죽이는 게 일상인 나이기 때문에. 항상 평정을 유지하는 레이무가 당황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천하의 레이무다. 저 비상한 두뇌로 언제 묘안을 생각해 낼지 모르니까 빨리 끝을 보는 게 좋다. 나는 온몸에서 영력을 끌어 올려 수백 마리의 불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움직여 레이무의 전 방위를 점했다. 피할 수 없는 탄막을 쏘는 건 스펠카드 룰 위반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단 한 사람에게만 사용했었지.


“끝이다.”

“그래, 끝이야.”


갑자기 끼어든 낯익은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기분 나쁜 보라색 경계를 본 순간, 나는 몸을 틀었으나 이미 늦었다. 순식간에 수십 겹의 결계가 나를 옭아매었다. 몸을 감싸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제기랄!”


온 힘을 다해 결계를 때렸다. 두세 겹 정도가 파괴되었으나, 아직 수많은 결계가 남아 있었다. 게다가 깨진 결계가 자체적으로 수복하는 게 아닌가. 범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결계라니. 과연 빌어먹을 요괴의 현자답군.


“야쿠모 유카리!”


결계를 두들기며 소리쳤다. 어느새 틈새에서 모습을 드러낸 야쿠모 유카리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듯한 차가운 보라색 안광이 나를 비추었다. 그 거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으아아아아아!”


괴성과 함께 내 모든 영력을 끌어모았다. 영력은 거대한 불사조의 형상으로 바뀌었고, 내 분노를 담은 불사조는 자신을 태워 결계에 들이받았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결계들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유카리가 급히 결계를 치기 시작했다. 온통 불에 그슬린 레이무도 옆에 와서 그녀를 도와주었다.

이대로 질 수는 없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 반대로 여기서 이긴다면, 앞으로 나를 방해하는 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요괴의 현자와 하쿠레이의 무녀가 패배하였는데 그 누가 나서겠는가!

이 상황에서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 분노가 내 몸을 증식 한 이후로 단 일 초도 잊은 적 없는 그 얼굴. 카구야. 호라이산 카구야. 내 증오와 분노와 원망과 회한과 슬픔과 애정을 모두 가져간 그녀를 떠올리며, 나는 전신을 불태웠다. 허나 내 감정과는 달리 불사조는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고, 새로운 결계들이 내 몸을 조여들었다. 감각이 하나둘씩 사라졌고 이윽고 의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카, 구……야……!”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요괴의 현자와 하쿠레이의 무녀. 그들이 힘을 합치면 얼마나 강한지는 영야이변 직후에 패배와 함께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도, 그들은 나를 패배자로 만들었다.

아무것도 없다.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고 무언가가 들리지 않았고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 자신의 존재까지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봉래인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허나 서서히 생각조차 마모되고 있었다. 감각이 없는데 생각만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서서히 시시한 잡념들은 사라졌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좀 더 강렬한 생각이 필요했다.

그래서 계속 카구야를 떠올렸다. 그녀와 관련된 생각을 하면 그나마 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 그녀와의 싸움. 그녀에게 처음으로 죽었을 때. 그녀의 심장을 처음 터뜨린 날. 그녀와 처음으로 술을 나누었을 때. 그녀가 사는 영원정에 처음 갔을 때.

돌이켜보면 내가 봉래인이 된 뒤 잃어버린 희노애락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은 그녀였다. 더는 없을 거라 생각했던 감정을 다시 찾아준 사람은 그녀였다. 내 모든 감정을 가져간 사람. 내 인생의 시작. 그리고 이제는 내 인생의 끝.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이미 내 인생은 끝났는데, 나는 무얼 하는 거지? 끝난 생을 붙잡고 있는 내가 너무나도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래. 이곳이라면. 아무리 내가 죽지 않는 봉래인이라 해도 이곳이라면. 편안히 잠들 수 있으리라.


“카. 구. 야.”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름을 되뇐 나는 마침내 카구야에 관한 생각조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팬픽 대회 출품해서 2등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주제는 어... 아마 '라이벌' 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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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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