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동방프로젝트'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7.04.05 악마는 비를 싫어한다
  2. 2015.10.30 [유우유카] 사랑
  3. 2015.10.30 매홍절명妹紅絶命
  4. 2014.11.06 아야하타
  5. 2014.09.20 레이무의 은밀한 꽃잎
  6. 2014.02.07 요괴는 비사문천의 제자인가?
  7. 2014.02.05 꽃이 되다

이자요이 사쿠야는 그녀의 주인과 함께 환상향으로 온 지 몇 년이 지나도 늙지 않았다. 언제나 윤기가 흐르는 은발을 휘날리며 얼룩 하나 없는 단정한 메이드복을 입고 뭇 남성들을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용모를 자랑하던 완벽하고 소쇄한 메이드. 몇 없는 인간 친구였던 하쿠레이 레이무나 키리사메 마리사, 코치야 사나에가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에도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마리사가 얼굴에 생긴 주름을 매만지며 사쿠야에게 부러운 듯 말한 적이 있다.

너는 여전히 소쇄하구나.”

사쿠야는 말없이 웃었다.

왜 그녀는 늙지 않을까.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논리를 펼쳤다. 시간을 멈추기 때문에 자신의 시간조차 멈춘 것이다. 사실 다른 사람처럼 늙었는데 어떻게든 완벽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 감추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미 우리가 알던 이자요이 사쿠야는 죽었고 지금 돌아다니는 사람은 2대째 사쿠야라는 음모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하쿠레이 레이무가 노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전혀 늙지 않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결국 한참 전에 레밀리아가 사쿠야를 흡혈귀로 만들었다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사쿠야가 얼마나 자신의 주인을 지극히 모시는지, 레밀리아가 얼마나 자신의 종자를 끔찍이 아끼는 지 환상향에 거주하는 인요라면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오후. 안개 때문에 멀리 보이지 않아 눈을 찌푸리며 앞을 보고 있던 문지기 홍 메이링은 천천히 들려오는 발소리에 긴장하며 전방을 주시했다. 그러나 눈에 익은 은발의 메이드가 보이자 긴장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몇 시간 전에 인간 마을에 장을 보러 가신다더니 조금 늦게 오셨네, 메이링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다녀오셨어요. 조금 늦으셨네요.”

. 수고가 많구나. 메이링.”

사쿠야는 상쾌한 미소로 답례를 해 주었다. 잠시 그녀를 지켜보던 메이링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사쿠야씨! 왜 다 젖었어요?”

왜라니? 비 오는 날에 옷이 젖는 건 당연하잖니.”

그렇지만 평소엔 안 젖었잖아요!”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에 우산도 쓰지 않고 우의도 입지 않은 사람이 물에 젖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사쿠야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시간을 멈추는 정도의 능력을 가진 그녀의 능력이라면 비 오는 날에도 거의 젖지 않은 채로 외출할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했다. 비에 젖은 사쿠야라니, 메이링이 수년간 홍마관의 문지기를 하면서 본 적 없는 광경이다.

오랜만에 비를 맞고 싶어서 그랬어.”

그러나 사쿠야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굉장히 편안한 어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금방 속아 넘어갈 듯한 빼어난 연기. 하지만 기를 읽을 수 있는 메이링은 쉽사리 속지 않았다.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러나 본인이 그렇다고 말하니,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메이링에게 인사를 건넨 사쿠야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현관을 지나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홍마관 안에서 각자의 일을 하던 요정 메이드들이 그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관인 사쿠야가 혼자서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을 멈출 수 있는 그녀는 항상 시간을 멈춘 채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같이 있지 않은 이상,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오늘까지는.

자기들끼리 뒤에서 수군거리던 요정 메이드들은 급히 제비뽑기를 하여 대표를 한 명 선출했다. 재수 없게 걸린 한 요정이 투덜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기, 사쿠야님!”

? 무슨 일이니?”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사쿠야는 잠시 그 요정을 바라보다가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모퉁이에 숨어 이쪽을 보고 있는 요정들이 있었다. 하여간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들이라니까. 평소에는 일도 안 하고 자기들끼리 장난만 치는 요정들의 모습이 짜증나기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꼭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였다.

오늘따라 걷고 싶어서 그렇단다.”

대표로 나선 요정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쿠야는 잠시 무릎을 굽혀 그 요정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다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젖은 옷을 벗고 말끔히 목욕재계를 한 뒤 거울 앞에 섰다. 머리를 단정히 빗고 메이드복을 단정하게 입은 뒤 마지막으로 메이드용 헤드 드레스를 쓰는 것으로 몸단장을 마무리했다. 평소에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사쿠야지만, 오늘만큼은 더욱 완벽하게 하려는 듯 잘못된 점이 없는지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홍마관의 가장 높은 곳으로 향했다.

레밀리아의 방 앞에 도착하자 먼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고 규칙적인 노크 소리가 두 번 울려 퍼졌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다시 두들겼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사쿠야는 세 번째로 방문을 두드리는 대신 큰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일어날 시간입니다.”

일어났어.”

그제야 안에서 대답이 들렸다. 사쿠야는 레밀리아의 목소리가 방금 잠에서 깬 목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역시 알고 있는 것일까. 사쿠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완벽하고 소쇄한 메이드의 얼굴로 돌아가 방문을 열었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레밀리아 스칼렛의 등이 보였다. 언제나 위엄 있게 펼쳐져 있던 날개가 축 늘어져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난 비가 싫어.”

레밀리아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물론 흡혈귀가 비를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흡혈귀는 태생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종족이지만, 그만큼 약점도 많았다. 마늘, 정어리 머리, 부러진 호랑가시나무, 볶은 콩 같은 것들이 모두 흡혈귀의 약점이었다. 여기에 햇빛과 더불어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흐르는 물이었다. 흐르는 물은 흡혈귀에게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흡혈귀는 강이나 바다를 건널 수 없었고 비가 오는 날에는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전형적인 흡혈귀인 레밀리아가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긴 하죠.”

당연히 사쿠야 또한 레밀리아가 비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무언가 달랐다. 아무리 비가 오는 날이라 해도 이렇게 레밀리아가 축 늘어진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완벽하고 소쇄한 종자로서 주인의 기분을 좋지 않은 상태로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저와 아가씨가 처음 만난 날도 비가 오는 날이었잖아요. 첫 만남과 같은 날씨라니, 로맨틱하지 않나요?”

사쿠야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 그들이 환상들이 하기 전, 바깥 세계에서 레밀리아와 처음 만났던 그 날을. 그 날도 오늘처럼 비가 세차게 쏟아지던 날이었다.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두 인요는 서로를 향해 웃었고, 전력을 다해 격돌했다.

그야 네가 날 잡으려고 작정했으니까 비 오는 날을 골라서 쳐들어 온 거잖아.”

부정하진 않을게요.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맞잖아요.”

나 잡으려고 비 오는 날에 찾아온 놈들이 세 자리가 넘는다.”

과거에 한 이름 날렸던 악마사냥꾼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이기 위해 사냥꾼들은 한낮이나 비 오는 날에 악마의 본거지로 쳐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그렇게 해도 레밀리아를 쓰러뜨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그래서 전 비가 좋아요. 아가씨와 만나게 해 준 고마운 날씨니까요.”

그래도 난 싫다. 싫은 건 싫은 거야.”

멍하니 앞을 보던 레밀리아가 손바닥을 펴더니 작은 창을 만들었다. 어리둥절한 사쿠야가 말리기도 전에 창문을 향해 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창문이 깨졌고 틈새를 통해 비가 들어왔다. 자연스레 창가에 앉아 있던 레밀리아의 손등에도 빗물이 묻었다. 순간 작은 소음과 함께 피부가 녹아내렸다. 깜짝 놀란 사쿠야가 재빨리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호들갑 떨지 마. 조금 따가운 정도니까.”

사쿠야는 레밀리아의 의자를 뒤로 당겨 빗물이 들어오는 범위 밖으로 꺼낸 뒤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빗물과 피로 범벅이 된 손등을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조금씩 닦아내자 안쪽에서 새하얀 뼈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안쪽에서부터 새살이 올라오고 있었다.

금방 재생될 텐데.”

그녀의 말처럼 상처는 곧 회복되었다. 흡혈귀는 약점이 많지만, 그 약점에 잠깐 노출된 정도로 죽지 않는다. 만약 강력한 재생력이 없었다면 이미 흡혈귀는 멸종되었을 터. 그들은 쉽게 죽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종족이었다.

오늘따라 빠르게 움직이는구나. 사쿠야.”

……아가씨가 부상을 입으셨는데 느릿느릿할 수는 없죠.”

그래. 빨리 움직여야지. 그래야 내 종자답지.”

순간 사쿠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려왔다. 그녀는 잡고 있던 레밀리아의 손을 놓고 자신의 손을 뒤로 감추었다.

아가씨. 오늘따라 이상하시네요.”

글쎄. 난 그저 비를 맞아보고 싶었을 뿐이야. 우리가 처음 만난 날처럼.”

자신이 했던 말을 인용해서 대답하자 사쿠야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다. 대신 재생이 끝난 손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고통을 느끼고 싶으신 건가요? 아가씨는 그런 취향이 아니었잖아요.”

가끔은 나도 그런 취향이 되는 날이 있어. 대략 500년에 한 번 정도?”

난생처음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레밀리아가 오늘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미소였다. 사쿠야는 떨리는 두 손을 꽉 잡았다. 레밀리아의 시선이 사쿠야의 다리에 머물렀다가 팔을 거쳐 다시 눈으로 향했다.

그런데 사쿠야. 왜 나이프는 하나도 안 차고 있는 거야?”

저도 나이프를 가지지 않고 다니는 날이 있답니다. 대략 100년에 한 번?”

태어나서 처음이라는 말이군.”

아가씨처럼요.”

둘 다 첫 경험인가? 두근거리는데.”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사쿠야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 상태에서 사쿠야의 눈을 바라보자 자연히 레밀리아가 사쿠야를 올려다보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곧바로 사쿠야가 무릎을 꿇어 높이를 맞췄다. 두 인요가 같은 높이에서 서로의 눈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레밀리아는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를 보았고, 사쿠야는 반쯤 감긴 붉은 눈동자를 보았다.

인간들을 첫 경험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잖아? 나도 그런 기분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서 굉장히 기쁜걸.”

축하해요. 아가씨. 저도 모처럼 가슴이 뛰네요.”

레밀리아가 웃었다. 사쿠야도 따라서 웃었다. 두 인요는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겨우 웃음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쿠야는 무릎을 가볍게 털고 나서 방을 나섰다.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레밀리아에게 인사를 하는데, 레밀리아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사쿠야.”

. 아가씨.”

지금 행복하니?”

잠시 아무 말을 하지 못하던 사쿠야는 오늘 가장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행복해요.”

……그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는 사쿠야를 부르지 않았다.

 

 

레밀리아의 방에서 나온 사쿠야는 복도를 계속 걸었다. 가는 길마다 요정 메이드들이 그녀를 보고 쑥덕거렸으나 정작 본인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발걸음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홍마관에서 가장 낮은 곳이었다.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방 하나. 마치 남에게 보여주면 곤란한 것이라도 있는 듯 깊숙이 숨겨진 곳이었다.

육중한 철문을 밀자 쇠와 벽돌이 갈리며 나는 마찰음이 사쿠야의 귀를 긁었다. 불빛 하나 없는 방 안에 성한 물건은 커다란 침대 하나뿐이었다. 그 외에는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서지고 찢어진 잔해들만이 가득했다. 사쿠야가 눈을 찌푸리며 침대 쪽을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이상함을 느끼고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녀의 목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끼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장난은 그만두세요. 작은 아가씨.”

아깝다. 한 발만 더 디뎠다면 목이 툭 하고 날아갔을 텐데.”

서늘한 기운이 사라지자 사쿠야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 손에 붉게 타오르는 검을 쥔 플랑드르 스칼렛이 있었다. 오색창연하게 빛나는 날개를 흔들던 플랑드르가 도약하자 순식간에 문 앞에서 침대까지 이동했다.

재미없어. 재미없다구. 밖에는 비도 오고.”

어쩔 수 없지요.”

장난에 금방 염증을 느끼고 침대에 누워서 바동거리는 플랑드르를 보자 사쿠야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분명 평소의 작은 아가씨다. 다소 축 늘어지긴 했지만 그건 바깥에 비가 오기 때문이겠지.

그런 작은 아가씨를 위해 특별히 향림당에서 사탕을 사왔답니다.”

침대에서 사쿠야의 앞으로 이동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마치 새로운 마도서를 발견한 마리사처럼 눈 속에 별빛을 담고 사쿠야를, 아니 정확히는 사쿠야가 손에 든 봉지를 바라보는 플랑드르였다.

사탕! 사탕! 사탕!”

자자, 사탕은 없어지지 않으니까요. 천천히 드세요.”

향림당에서 비정기적으로 판매하는 바깥세계의 사탕은 환상향에서 굉장히 인기가 높은 품목이었다. 향림당의 점주 모리치카 린노스케는 뛰어난 발명품들이 아니라 고작 설탕 덩어리에 불과한 이 물건이 가장 인기가 많은 상품이라는 사실에 한숨을 내쉬곤 했지만, 손님들은 사탕 언제 들어오느냐고 성화를 부릴 뿐이었다. 사쿠야는 나름 향림당의 단골이었기 때문에 미리 예약해놓을 수 있었고, 타이밍 좋게 오늘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탕이 그렇게 좋으신가요?”

! 내 귀생 최고의 즐거움이야!”

양손 가득 사탕을 들고 씹어 먹느라 정신이 없는 플랑드르를 사쿠야는 포근하게 웃으며 지켜보았다. 문득 생각이 떠오른 사쿠야가 플랑드르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오늘같이 비 오는 날이 싫으신가요?”

?”

양 볼이 터지도록 사탕을 물고 있던 플랑드르가 급하게 사탕을 깨물었다. 잠시 천장을 보고 생각하면 플랑드르는 이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물론 싫어!”

그런가요…….”

하지만 이렇게 사쿠야가 사탕을 사오는 날이라면, 좋아!”

그녀는 의외라는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플랑드르의 해맑은 미소에서 진심을 읽은 사쿠야도 따라서 웃었다.

그렇군요. 고마워요. 작은 아가씨.”

그러나 사쿠야의 미소는 조금 전에 레밀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미소였다.

 

이번에는 플랑드르가 갇혀 있는 지하실보다는 조금 위에 있는 대도서관으로 향했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마녀 파츄리 널릿지가 그녀를 맞이했다. 전에 만났던 두 사람과는 달리, 파츄리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앞에 놓인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사쿠야?”

내일 아침까지만 해주세요. 환상향 최고의 마법사시잖아요.”

아무리 내가 대마법사라고 해도 환상향 전역에 비를 내리게 하는 건 힘들어.”

분명히 파츄리는 환상향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의 마법사다. 특히 속성을 다루는 마법에서는 그녀를 따라올 마법사가 없었다. 앨리스는 인형술의 대가이고, 뱌쿠렌은 자기 강화 마법에 특화된 마법사였다. 마리사는 고화력 중심의 마법을 연구하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는 파츄리를 따라올 마법사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환상향 전체에 비를 내리게 하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죄송해요. 그래도 제가 이렇게 개인적인 부탁을 하는 건 처음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지금까지 파츄리가 사쿠야에게 무얼 사오라고 부탁하거나 알아보라고 시킨 적은 많았지만 사쿠야가 직접 파츄리에게 사적인 일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해주겠다고 해도 거절하던 사쿠야다. 모처럼 해준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저번에 빌려주신 책 잘 읽었어요. 갖고 온다는 걸 깜빡했네요. 제가 지금 다시 외출해야 해서 그런데 좀 가져가 주시겠어요?”

오늘은 참 여러 가지를 부탁하는구나. 그래. 이런 날은 처음이니까. 나중에 소악마를 보낼게.”

아뇨. 파츄리님이 직접 해주세요.”

파츄리가 고개를 홱 돌려 사쿠야를 노려보았다.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움직이지 않는 대도서관이라는 별명이 붙은 마녀를 움직이려 하다니, 그녀의 절친한 친구 레밀리아조차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사쿠야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파츄리는 깜짝 놀랐다. 그 어느 때보다 사쿠야의 눈빛은 진지했다. 자신의 의지를 꺾을 수밖에 없는 눈빛이었다.

알았어. 내가 갈 게. 가면 되잖아.”

감사합니다. 파츄리님.”

다시 환하게 웃는 사쿠야를 보며 괜한 짓을 했나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 파츄리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가시게요?”

햇빛이 있는 동안 건초를 만들라고 하잖아.”

그럼, 1층까지는 같이 갈까요?”

두 인요는 천천히 홍마관을 걸었다. 복도를 거닐던 요정 메이드들의 눈이 두 배로 휘둥그레졌다. 복도를 걸어 다니는 메이드장과 마녀라니. 항상 홍마관에서 시간을 멈추고 다니는 사쿠야와 도서관에서 나오지 않는 파츄리였는데. 요정 메이드들은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을지 심각하게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1층으로 올라온 사쿠야가 걸음을 멈추고 옆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걷고 있던 파츄리도 자연스레 그쪽을 바라보았다. 홍마관에 몇 없는 창문이 있는 장소였다. 세찬 비가 창문에 부딪치며 자신의 몸을 망가뜨리는 광경을 사쿠야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비의 상태를 보고 있는 것일까. 파츄리는 자신의 마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가 걱정이 들었다.

좀 더 세게 내려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 정도면 문제없어요.”

고개를 내젓는 사쿠야의 표정을 보아하니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렇다면 왜 비를 보고 있지? 파츄리도 사쿠야를 따라 뚫어지게 비를 바라보았다.

빗소리만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비를 보고 있자니 조금 감성적인 기분이 들었다. 파츄리는 모처럼 옛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와 레밀리아가 처음 만난 날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었지.”

파츄리님도요?”

. 물론 그때도 내가 마법으로 내리게 한 비였지만 말야. 다짜고짜 쳐들어오기에 비를 뿌려줬어.”

그때나 지금이나 정말 못 말리는 녀석이야, 하고 파츄리가 그리운 듯 덧붙였다. 어느새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는 두 친우의 관계란, 정말 특별한 것이겠지. 사쿠야는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동시에 약간의 질투심이 들었다.

우리 홍마관 식구들은 다들 비가 오는 날에 아가씨랑 만났군요. 메이링도 비슷한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쟤는 그냥 의식주를 제공해준다고 하니까 좋다고 온 게 아닐까?”

두 인요가 함께 킬킬거렸다. 지금쯤 문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의 귀가 제법 가려울 것이다. 그것도 양쪽 다. 내친김에 낮잠을 너무 많이 자니 근무태만이니 허구한 날 마리사에게 뚫리니 하며 메이링의 뒷담을 계속했다.

그렇게 창문 앞에서 한참을 떠들다가 갑자기 사쿠야가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회중시계를 꺼내 보는 게 아닌가. 떨리는 손에서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느껴졌다.

왜 그래, 사쿠야. 괜찮아?”

한 번도 본 적 없는 메이드장의 이상한 행동에 파츄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사쿠야는 손을 내저었으나 여전히 낯빛이 좋지 않았다.

괜찮아요. 시간이 지체된 거 같으니 슬슬 가죠.”

대화를 멈춘 두 인요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파츄리가 계속 사쿠야를 힐끔 쳐다보았으나 사쿠야는 조용히 갈 길을 재촉했다. 이윽고 목적지인 계단 앞에 도착했다. 파츄리는 이 계단을 올라가야 했고, 사쿠야는 계단을 지나 현관으로 가야 했다. 파츄리가 먼저 계단을 올라가며 사쿠야에게 말했다.

몸 상태가 안 좋으면 너무 무리하지 마. 레미한테 일러둘까?”

아뇨. 아가씨에겐 말해주지 말아 주세요. 걱정을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역시나. 파츄리가 예상했던 대답이 들렸다. 파츄리도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기에 그녀를 향해 손을 한 번 흔들고 사쿠야의 방으로 향했다. 계단 앞에 서서 파츄리가 올라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사쿠야는 몸을 돌렸다.

…….”

지금까지 참아왔던 격통이 그녀를 덮쳤다. 조금 전 파츄리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억지로 참았지만, 슬슬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숨이 턱턱 막혔으나 벽을 잡고서라도 걸었다.

마침내 저 앞에 현관이 보였다. 사쿠야는 메이링이 보일 만큼 앞으로 갔다. 붉은 머리카락이 장식하고 있는 초록색 등이 보이자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보니 또 졸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쿠야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보는 모습이 졸고 있는 모습이라니, 정말 메이링다웠다.

사쿠야는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진 벽과 광적일 만큼 붉은색 장식으로 치장된 자신의 집을. 친구들은 이 집을 볼 때마다 주인 놈의 악취미라며 비웃었지만 사쿠야는 이 집을 사랑했다.

친구들, 인가.”

먼저 간 레이무와 사나에가 떠올랐다. 이제 남겨질 마리사를 떠올렸다. 평범한 인간들에겐 요괴로, 요괴들에겐 특이한 인간으로 취급받던 자신과 같은 처지의 친구들. 요괴와 인간의 경계에서 마지막에는 인간으로 끝을 맺은 친구들. 이제 사쿠야의 차례였다.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회중시계의 초침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멈출 듯한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이미 시침과 분침은 멈춘 지 오래였다.

아가씨. 작은 아가씨. 파츄리님. 메이링.”

사쿠야는 자세를 바로잡고 허리를 굽혔다. 양쪽 스커트를 잡고 우아하게, 공손하게.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마음을 담아.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사쿠야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시간을 멈췄다.

 

 

 

무언가를 느낀 메이링이 잠에서 깨어났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 현관 안쪽을 살펴보았으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잘못 느낀 건가. 하지만 어딘가 모를 찜찜함이 가슴 한구석에서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메이링은 조만간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 직감했다.

 

사탕을 먹던 플랑드르가 갑자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봉지 안에 들어 있던 모든 사탕이 가루가 되었다. 멍하니 부서진 사탕을 보다가 플랑드르 자신도 깜짝 놀랐다. 왜 갑자기 능력을 썼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사쿠야의 방에 도착한 파츄리는 책상에 놓인 책을 들다가 그 자리에 놓여 있던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를 읽은 파츄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알고 있는 신체 강화 마법을 전부 자신에게 걸었다. 그리고 수부를 응용해 비에 젖지 않게 물방울로 자신을 감싼 뒤 급히 홍마관을 나섰다.

 

깨진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비를 계속 바라보던 레밀리아는 다시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빗물은 그녀의 손등을 파고들어 깊은 상처를 남겼다. 흘러내린 피는 바닥에 고인 채로 꿈틀거렸다. 그녀는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두 날개를 활짝 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흡사 피가 서린 듯했다.

 

 

 

파츄리가 급히 도착한 곳은 홍마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물길 이었다. 그러나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물이 넘쳐흘러 큰 강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반대편에, 이자요이 사쿠야가 누워 있었다. 파츄리는 재빨리 강을 건너 사쿠야에게로 달려갔다.

편안하게 누워있는 사쿠야의 가슴에 귀를 대 보았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코에 손을 갖다 대었다. 공기가 움직이는 느낌이 나질 않았다. 파츄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쿠야가 남긴 쪽지를 봤을 때 겨우 참았던 감정이 속에서 들끓었다.

파츄리님. 이렇게 쪽지로 알려 드리는 것을 부디 용서하시길.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말할 용기가 나질 않았고, 또 아가씨가 엿들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죽으러 갑니다. 인간으로서 수명이 다 되었음을 직감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제가 죽는 걸 그냥 놔두지 않겠지요. 아마 저를 흡혈귀로 만들 거에요. 물론 저는 아가씨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인간으로서 죽고 싶습니다. 그걸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파츄리님 뿐입니다. 아가씨가 오지 못하는 빗속, 강 건너에 있는 제 시체를 태워주세요.”

비와 함께 흐르는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마음을 다잡은 파츄리는 하늘에 있는 먹구름을 조종해 사쿠야의 시신이 있는 부근만 비가 내리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자 그 부분에만 햇볕이 내리쬐게 되어, 마치 하늘에서 천사가 강림한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악마의 종자가 죽는데 천사가 데리러 오다니, 이런 기묘한 모순이 또 어디 있겠는가. 파츄리는 쓰게 웃었다.

그럼. 웃기는 일이지. 악마의 종자는 악마가 데리러 와야 하지 않겠어?”

순간 파츄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절대 헷갈리지 않을 목소리였건만, 오늘만큼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여기서는, 절대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였다.

안 그래, 파체?”

그러나 그 목소리가 자신의 애칭을 불렀을 때, 파츄리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홍마관의 마녀. 지식과 그늘의 소녀, 움직이지 않는 대도서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의 근원, 화담의 마법사. 자신을 지칭하는 수많은 명칭이 있었지만, 그녀를 파체라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레미, 어째서……!”

친우의 모습을 확인한 파츄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 있는 흡혈귀의 모습이란 상상 이상이었다. 빗방울이 하나하나 몸에 닿을 때마다 살이 녹아내렸다. 끊어진 혈관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재생되었고 돋아난 살과 피는 또다시 흘러내렸다. 레밀리아가 걸어온 길은 살점과 피가 뒤엉겨 끔찍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운명을 보았지. 근데 날아오다가 날개가 다 녹아서, 걷다 보니 좀 늦었네.”

언제나 자랑스럽게 펼치던 두 날개도 지금은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뭉개져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계속 걸어왔단 말인가. 파츄리는 레밀리아가 빗속에서 서 있는 걸로도 모자라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사실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 그래. 네 능력을 잊고 있었구나. 아니, 그것보다, 대체. 안 아파?”

말을 더듬던 파츄리가 힘들게 질문을 내뱉었다. 같이 살게 된 이후로 처음 보는 친우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레밀리아는 웃었다.

아프지. 엄청 아파. 죽을 만큼 아파.”

레밀리아가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이윽고 강 앞에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세차게 흐르는 강을 건널 엄두는 나지 않는지 거기서 더 앞으로 오진 않았다.

하지만, 사쿠야는 더 아팠을 거야. 죽을 만큼 아프다 해도, 죽는 것보다 아프지는 않을 테니까.”

그녀는 잠시 강을 살펴보았다. 지금도 아파 죽을 것만 같은데, 강에 뛰어들게 된다면 어떨까. 상상도 하기 싫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홍마관에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몸을 말리고 의자에 앉아 사쿠야가 타주는 홍차를…….

사쿠야는 나 때문에 더 일찍 죽었어. 다른 인간들처럼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겼으면 되었을 것을, 내가 완벽하고 소쇄한 종자라는 이명을 붙여줬기 때문에 언제나 완벽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사용해 노화조차 막은 거야. 고작 그런 것 때문에!”

힘찬 도약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었다. 빗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속도로 흐르는 강물은, 상상 이상이었다. 레밀리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늘을 가득 메우는 고함과 함께,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다. 발이 없어지면 무릎으로, 무릎이 타 들어가면 손으로, 손이 떨어져 나가면 팔로, 팔마저 녹아내리면 다시 재생된 발로.

사쿠야의 옆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파츄리의 앞에, 레밀리아가 천천히 강에서 기어 나왔다. 뭉개진 전신의 모습은 이게 레밀리아라는 흡혈귀인지 알아보기도 힘든 수준이었다. 아니, 살아 있는 생물이기는 한 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빌어먹을. 내가 다시는 이 짓거리 안 한다.”

어느새 발을 재생한 레밀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파츄리가 비를 뿌리는 것을 멈추고 모든 마력을 모아 여섯 빛깔의 현자의 돌을 주변에 띄웠다. 영롱하게 빛나는 현자의 돌은 금방이라도 강력한 마력을 내뿜을 것만 같았다.

레미. 넌 내 친구지만, 사쿠야도 소중한 친구야. 친구의 마지막 부탁을 헛수고로 만들 순 없어!”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파체.”

찰나의 순간, 레밀리아는 파츄리의 앞에 서 있었다. 파츄리가 반응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레밀리아의 손톱이 번뜩였고, 현자의 돌은 두 동강이 난 채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파츄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지근거리에 접근한 이상 네게 승산은 없어.”

망연자실한 표정의 파츄리를 놔두고 레밀리아는 천천히 사쿠야에게 다가갔다. 비에 젖은 사쿠야의 시체를 보자 그 날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사쿠야와 만날 그 날. 빗속에서 서로 웃으며 싸우던 그 날을. 사실 그녀는 오늘 사쿠야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부터 이미 그 날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 날도 오늘처럼 비가 왔었지. 사쿠야.”

그리고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고, 종자로 삼았다. 너는 말했지.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나는 항상 비 오는 날을 싫어했어. 당연하지. 흡혈귀니까. 너와 만나기 전에는 비가 조금만 와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잠만 잤단다. 하지만 너와 만난 이후로는 나도 비를 조금씩 좋아하려고 노력했어. 너는 항상 비를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사쿠야의 목을 쓰다듬었다. 아직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전히 새하얀 살결은 물어뜯기 딱 좋은 상태였다. 레밀리아는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대었고, 파츄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너는 비 오는 날에 태어나, 비 오는 날에 가는구나.”

불길이 피어올랐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사쿠야를 금방 집어삼켰다. 시체를 태운 불꽃은 더이상 태울 것이 없어지자 금방 사그라졌고, 그 자리에는 그을린 회중시계만이 있을 뿐이었다. 레밀리아는 허리를 굽혀 회중시계를 집어 들었다.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조금씩 비치기 시작했다. 파츄리는 레밀리아의 옆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얼굴에 물방울이 묻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미. 우는 거야?”

그냥 비야.”

비는 이미 그쳤는데.”

레밀리아는 파츄리를 쳐다보지 않은 채로 담담히 말했다.

악마는 울지 않아.”

그렇구나.”

그녀의 말을 들은 파츄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금방 마음을 가다듬은 파츄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악마라 해도 소중한 이를 잃는다면 울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레밀리아가 손에 든 회중시계를 열었다. 수명이 다 되었는지 이미 멈춘 뒤였다. 그녀는 시계에 새겨진 시간을 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럴지도.”

 

 

 

이자요이 사쿠야가 죽었다. 시체가 없었기에 빈 관을 가지고 간단히 장례를 치렀다.

그녀의 장례식에 수많은 인요들이 찾아왔다. 홍마관의 마당을 인요들이 가득 메웠으나 그중에 그녀의 주인이자 홍마관의 주인인 레밀리아 스칼렛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동생인 플랑드르조차 그녀의 관을 안고 펑펑 울고 있었는데.

장례식은 홍마관에 거주하는 마녀 파츄리 널릿지의 주관 아래 무사히 끝났다. 늙은 몸을 이끌고 온 키리사메 마리사는 이제 친구들이 모두 갔다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이를 갈며 홍마관의 가장 높은 곳을 쳐다보았으나 홍마관의 주인은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다시 비가 내렸다. 레밀리아는 자신의 방에 앉아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직 고치지 않은 창문을 통해 비가 들어왔다. 그녀는 손을 뻗어 비를 잡았다. 살점과 피가 한데 엉겨 괴기하게 녹았다.

아파.”

그래도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손이 녹고, 재생되고, 다시 뭉개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을 계속 지켜보기만 하였다. 이 정도는 사쿠야가 느꼈던 고통에 비하면, 사쿠야를 잃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 비가 싫어.”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레밀리아는 홀로 중얼거렸다.

난 비가 좋아.”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활짝 웃었다.

 

그 뒤로 문지기였던 홍 메이링이 홍마관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호칭은 여전히 문지기였고, 레밀리아가 외출할 때 같이 다니지도 않았다. 홍마관에서 메이드장이라는 이름이 다시 쓰이는 일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비 오는 날이면 사쿠야의 무덤 근처에서 레밀리아를 볼 수 있다는 괴소문이 퍼졌다. 피를 철철 흘리며 가만히 서 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은 믿지 않았다. 흡혈귀가 어찌 흐르는 물 아래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소문이 퍼지면 호기심이 강한 누군가가 조사해보기 마련이다. 참지 못한 누군가가 레밀리아에게 가서 직접 물어보았다. 레밀리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난 비가 좋아.”

 

 

 




2015년에 쓴겁니다. 몇월에 썼는지는 잘...

선배님이 주최하신 팬픽 대회에서 2등 했었네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제가 지금까지 쓴 동방프로젝트 팬픽 중에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작품이 아닌가 하네요.

마지막에 파츄리와 레밀리아가 나누는 대사는 Devil may cry 3 엔딩에서 단테와 레이디가 나누던 그 대사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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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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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코.”


나를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왔구나. 그대로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야쿠모 유카리의 따뜻한 미소가 있었다. 나도 이에 화답하듯 부드러운 미소를 돌려주었다. 곧 요우키가 차를 내어 왔고, 우리들은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차가 떨어졌다. 요우키에게 새 차를 내오라고 하는 바람에 이야기가 잠시 끊긴 틈을 타 유카리에게 물었다.


, 유카리. 사랑이란 뭘까?”


유카리가 제법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서일까. 아니면 허를 찔렸기 때문일까. 하지만 곧 화사한 표정으로 바꾸고는 답했다.


내가 유유코에게 해 주는 것. 그게 사랑이야.”


거짓말쟁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삼키느라 표정이 뒤틀렸다. 허나 유카리는 감동을 받아 그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졌다. 볼에 닿은 손은 분명 따뜻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차가움 또한, 같이 느껴졌다.


유유코.”


다시 한 번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다. 그녀가 부르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그윽한 금빛 눈동자는 나를 담고 있었지만, 그 끝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아닌, 인간 사이교우지 유유코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차가운 망령이 아닌, 따뜻한 육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얼굴이 내게 다가왔다. 알싸한 향이 내 코를 자극했다. 두 손에 가득 품고 싶은 좋은 향이건만, 나를 위한 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역겹기 그지없었다. 마침내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그녀의 입술은 내 입술을 벌렸고 그 사이로 혀가 기어 들어왔다. 이 요괴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태연하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걸까. 입 속에 뱀이 기어다니는 듯한 혐오감이 자극하는 바람에 나는 그 혀를 물어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자 온 힘을 다했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이 떨어졌다. 살짝 붉어진 입술 사이에서 거짓이 새어 나왔다.


사랑해.”


아아, 유카리. 너는 어찌도 그리 태연하니. 내게 거짓을 고하면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 구나.

아아, 잔인한 요괴 같으니. 내게 감당하기 힘든 속박을 주는구나. 단어 하나로 나의 영혼을 사로잡고, 말 한 마디로 나의 영혼을 죽이는 구나.

허나 네가 내게 거짓을 읊는다 해도, 나는 내게 진실만을 말할 거야. 네가 나에게 진실된 언어를 들려줄 때까지. 언제까지고, 계속.


……나도 사랑해. 유카리.”







짧네요. 뭐 원래 엽편 쓰려고 한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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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한 그 날은,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평범한 날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죽림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고, 언제나처럼 홀연히 나타난 카구야가 내게 시비를 걸었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적당히 응수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카구야가 나를 공격했고, 언제나처럼 반격을 날렸다. 결국 언제나처럼 죽고 죽이는 싸움을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내 일상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카구야는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평소에는 내가 좀 더 공격적이고, 카구야는 수비적인 태도를 취할 때가 많았다. 다른 패턴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능숙하게 대응하였다.

가장 먼저 나의 왼팔이 날아갔다. 이어진 공격에 왼쪽 눈과 귀까지 손상되었으나, 카구야의 우반신이 너무 깊게 파고들었다. 그 틈을 타 오른손으로 복부를 찔러 안쪽에서 불꽃을 일으켜 내장부터 태워버렸다. 카구야의 오른발이 날아왔으나 내 무릎이 더 빨랐다. 정강이뼈를 부러뜨리자 카구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씨익 웃었다.


“오늘은 내가 이겼군. 배때기에 구멍이 뚫려 있으니 시원하지?”

“응. 통풍이 참 잘 되는 걸.”


카구야도 씨익 웃으며 벌렁 드러누웠다. 가끔 이 녀석의 행동거지를 보면 과거에 공주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뭐, 그런 점에서는 나도 할 말이 없지만. 죽은 아버지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지실 테지.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은 어디 갔느냐, 하고.

슬슬 몸이 재생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왼쪽 눈의 시력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재생이 빠르다고 부러워 할 사람도 있던데 그놈에게 내 간을 입에 쑤셔 박고 싶다. 몸이 망가지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모를 테니까.

문득 미스티아의 장어구이가 먹고 싶어졌다. 그래, 같이 갈 사람도 없는데 카구야나 데리고 갈까. 이 녀석도 슬슬 재생이 끝났을 터.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도 복부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카구야가 보였다. 오늘따라 좀 늦는군.

그런데 카구야의 표정이 이상했다. 웃고 있었으나 평소와는 달랐다. 나와 싸운 뒤의 상쾌한 미소가 아니다. 희열로 가득 찬 저 표정은 묘하게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저 표정,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언제더라?


“모코우.”


나른한 목소리가 나를 자극했다. 이 목소리도 평소와는 다르나, 언젠가 들어본 적 있었다. 카구야가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목소리로 나를 부른 적이 있다고? 대체 언제?


‘네가 후지와라노 모코우, 니?’

“아.”


기억났다. 그래. 분명 저 표정과 저 목소리. 나와 카구야가 처음 만났던 날. 처음 싸운 날. 처음 죽이고 죽였던 그 날. 그때 카구야의 표정. 그때 카구야의 목소리. 틀림없다. 지금 그녀는 그때의 카구야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때로 돌아갔지?


“이런 기분 오랜만이야.”

‘이렇게 격렬한 싸움도 오랜만이네.’


자꾸 그때의 카구야와 겹쳐 보였다. 나와 죽고 죽인 후, 새로운 삶의 쾌감을 찾아 희열을 느끼던 카구야처럼. 그렇다면 지금의 카구야도 무언가 새로운 즐거움을 찾았단 말인가? 대체 무엇을…….

그제야 나는 아직도 카구야의 복부에서 피가 흘러넘친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나는 이미 모든 상처가 아물었거늘 재생은 커녕 지혈조차 되지 않는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그대로 카구야에게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갑다. 얼굴을 보았다. 창백하다.


“카구야!”

“소리 지르지 마. 머리가 울려.”


틀림없다. 이해가 전혀 되지 않지만 카구야는 죽어가고 있었다. 죽지 않는 봉래인이, 머리카락 한 올만 남아도 재생할 수 있는 봉래인이!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이대로 놔두면 카구야는 죽는다.

손을 뻗어 복부를 눌렀다. 손끝에서 일으킨 불로 지져 상처를 지혈했다. 부러진 정강이뼈를 맞추고 다리에 난 상처들을 모조리 태웠다. 약. 약이 필요하다. 당연하게도 나와 카구야는 약 따위는 필요 없는 몸이었기에 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게 너무나도 후회되었다.


“모코우.”


그때 그녀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으나 그녀는 너무나도 기뻐 보였다. 그때처럼.


“이미 늦었어.”

“……왜.”

“나는 죽어.”

“왜!”


나는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희열을 담고 있는 얼굴은 신이 직접 만든 완벽한 조각 같았다. 비단 같은 피부. 앵두를 담은 입술. 맑은 폭포수를 연상시키는 긴 머리. 수많은 남자를 유혹했던 그 자태는 이제 죽음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제 너와 죽고 죽이는 것도 질렸어. 재미를 잃었어. 무언가 새로운 놀이를 찾으려 했지만, 문득 이제 더는 새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그래. 죽음이야. 우리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 최후의 즐거움으로 삼으려고 마지막까지 남겨뒀었는데, 생각해보니 지금이 그 마지막인 것 같아서.”

“…….”

“모코우. 그동안은 즐거웠어. 너와 싸울 때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느꼈어. 그래서 죽는다면 네 손에 죽고 싶었어. 나를 몇 백 년 동안 살게 해 준 너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그딴 걸로 감사하지 마!”


내 감정이 격해지며 몸 전체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내가 잡고 있던 카구야 또한 불에 그슬렸으나 카구야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이미 화상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죽음이 진행되었나?


“아아. 정말 기분 좋구나. 이게 죽음이구나. 후후. 단 한 번밖에 하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울 정도야.”

“개자식이……!”

“표정이 왜 그러니, 모코우? 너는 언제나 날 죽이고 싶어 했잖아. 네 아버지의 원수이기도 하고. 그 소원을 이루었으니,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닥쳐!”


그래. 카구야의 말 대로다. 그녀는 내 아버지의 원수였고, 내가 이런 저주받은 몸을 가지게 된 원흉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와 만난 뒤, 나는 그녀를 몇 번이고 죽였다. 찢어 죽이고, 태워 죽이고, 밟아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그리고 이후 몇 백 년 동안이나 죽였다. 이제는 이유가 있어서 죽이는 게 아니었다. 죽이기 위해 만났다. 그녀를 죽이기 위해 살아왔다. 그런 그녀를 이제 죽일 수 없게 된다고? 그럼 나는? 내 삶은?


“아…… 점점 눈이 감기네……. 나른하고…… 기분 좋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카구야의 눈이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의식이 소멸하여 혼이 육체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안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필사적으로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쿡…….”


그런 나를 보며 카구야는 웃었다. 비웃음일까. 아니면 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대한 순수한 웃음일까. 모르겠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제 나는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손에 힘이 빠졌다. 내 손아귀에서 풀린 카구야의 몸이 서서히 떨어졌다.


“모코우.”


마지막으로 그녀가 손을 뻗으며 나를 불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 나도, 그녀도 손에 힘이 없었기에 스르르 풀리며 맞잡은 손이 떨어졌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기 직전, 그녀는 내게 종말을 고했다.


“안녕.”


툭, 하고 맥없이 그녀의 몸이 땅에 닿았다. 흑단처럼 새까만 눈동자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나의 몸도 그녀처럼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한참 동안 멍청하게 있던 나는 비명을 질렀다. 지옥에 닿을 만큼 크게.


 




“그래. 내가 만들었어. 봉래약을 만든 것도 나니까. 그 반대 역시 만들 수 있었지. 하지만 이제 더는 만들 수 없어. 그 약은 나 혼자 만든 게 아니거든. 봉래약도 그렇지만, 이 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주의 힘이 필요해. 공주의 능력이 있어야 제조할 수 있지. 왜 공주에게 약을 만들어 줬냐고? 공주가 원했으니까. 그것뿐이야. 자, 질문이 끝났으면 좀 비켜줄래? 난 너랑은 달리 바쁜 사람이거든.”

 


“미안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 이미 그녀는 사신의 인도 아래 삼도천을 건너 재판을 받았을 거야. 결과는 보나 마나 지옥이겠지. 지은 죄가 크니. 그녀가 어떻게 죽은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봉래인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너도나도 너를 죽이러 올 테니까.”


 

“뭐야? 봉래인이잖아? 나랑은 상극인 녀석이 웬일이래. 그래도 지금은 근무 중이 아니니까 넘어가자고. 누구? 아하. 달의 공주님 말인가. 그래. 처음엔 깜짝 놀랐지. 절대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영혼이 내 눈 앞에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이었지. 그래서 나는 내가 맡은 임무대로 그녀를 태우고 갔어. 무슨 얘기를 했냐고? 뭐 이것저것. 보통 죽은 영혼은 자신이 죽어서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공포에 젖어 풀이 죽어 있는데 그 공주님은 오히려 매우 유쾌했었어. 죽음을 아주 기뻐하고 있었지. 그래서 기분 좋게 나와 얘기를 나누었어. 나도 모처럼 유쾌한 대화를 나누어 즐거웠고. 그다음의 일은 내게 물을 게 아니라 염마님께 직접 물어야 할 거야.”


 

“평생 이곳에 올 일이 없는 당신이 여기는 무슨 일이죠? 호라이산 카구야? 당신은 그녀가 어디로 갔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래요. 지옥입니다. 당신도 그러하지만, 그녀는 특히 지은 죄가 커요. 수많은 남자를 유혹한 죄. 봉래약을 뿌려 이 세상에 혼란을 일으킨 죄. 에이린으로 하여금 달의 사자들을 죽이게 한 죄. 주어진 능력을 남용하여 시간을 가둔 죄. 밤을 멈춘 죄 등등. 열거하자면 하루 하고도 한나절이 걸릴 겁니다. 수백 년을 살아오며 지은 죄인 만큼 남들보다 더 많은 세월을 지옥에서 보내게 될 겁니다. 이제 됐나요? 그럼 돌아가세요. 후지와라노 모코우.”


 

“어머, 네가 어쩐 일이야. 란이 무슨 헛소리를 하나 했는데 정말이었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뭐? 카구야의 영혼을 지옥에서 빼달라고? 재밌는 농담이구나. 그래. 내 능력이라면 할 수는 있어. 가능하긴 해. 그런데 내가 왜 그걸 해야 하지? 나는 요괴의 현자야. 이 환상향의 균형을 지키는 요괴지. 그런 내게 명계의 규율을 어기라고? 내 친우가 죽어도, 내가 아끼던 무녀가 죽어도 나는 하지 않았어. 내 사리사욕보다는 환상향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니까! 하물며 나와는 별 인연이 없는 카구야를? 웃기지 마. 그런 헛소리는 집에 가서 혼자 하는 게 좋겠다. 그럼.”

 


“확실히 봉래인이 죽지 않은 건 이변이라고도 할 수 있어. 본래 죽지 않아야 할 요괴가 죽은 거니까. 하지만 본인이 원한 죽음이잖아? 죽지 않고 계속 살 수 있었는데, 자신이 원해서 죽은 거니까. 이변을 저지른 요괴는 이제 없으니, 이변은 끝난 거야.”


 

“그야, 슬프죠. 매일 저를 부려먹고 괴롭히긴 했지만, 그래도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하지만 공주님이 원하신 거잖아요? 공주님이 한 번 결심한 일은 영원정에 있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요. 설령 스승님이라 할지라도. 하물며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네 심정은 이해한다만,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어. 누구라도 말릴 수 없었을 테지. 억울하게 죽었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네만, 그녀 스스로 원한 죽음이야. 슬픈 일이지만 그녀를 애도하고 보내주는 수밖에.”


 



“왜!”


손끝에서 강렬한 불꽃이 솟구쳐 요괴의 전신을 태웠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요괴는 곧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나는 재를 발로 밟았다. 재가 하늘로 솟구쳐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거냐고!”


전신에서 일어난 불은 주변에 있던 수많은 시체를 단숨에 태워버렸다. 이미 대지는 나의 분노로 새카매진 지 오래였다.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량한 대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카구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있던 자리를 손으로 쓸어본다. 거친 흙만이 느껴졌다. 이게 아니야.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살결이 있어야 해. 왜 없는 거지? 왜? 어째서? 영원히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왜?

카구야가 죽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처음 며칠간은 환상향 전체가 떠들썩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봉래인이 죽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허나 그것뿐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곧 시들해졌고, 대부분의 요괴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내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일부 요괴들만이 아직도 나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카구야가 죽었다고 해서 나도 죽을 줄 알고.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다. 그래. 봉래인을 죽이는 약을 만든 야고코로 에이린이나 명계를 유지해야하는 사이교우지 유유코, 영혼을 강 건너로 인도해 주는 게 전부인 오노즈카 코마치, 흑백만을 가리는 꽉 막힌 재판관 시키에이키 야마자나두, 머릿속에 환상향밖에 없는 야쿠모 유카리. 그들은 어차피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평등한 레이무도, 카구야를 따르던 레이센도, 심지어는 나의 좋은 이해자라고 생각했던 케이네 조차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카구야를 만나고, 케이네를 알게 되고, 영야이변으로 인해 많은 인요들을 알게 되어 이제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생각했지만, 모두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결국, 예전과 똑같았다. 카구야와 만나기 전의 나. 철저히 혼자였던 나와.


내 유일한 이해자는 이제 없다.

앞으로도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를 알아줄 사람이 없는…… 이 빌어먹을 세계 따윈…….”


필요 없어.


 


몸에서 불꽃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새빨간 불꽃은 서서히 새의 형태로 바뀌었다. 나의 상징과도 같은 불사조는 내 심정을 대변하듯 끝없이 하늘로 올라갔다. 이윽고 요괴의 산 정상이 보일 정도로 올라가자 불사조는 수십 개의 불꽃으로 갈라져 환상향의 전역으로 날아갔다. 나뉜 불꽃 또한 날아가면서 모두 새의 형상으로 변했다.

짐승의 길에도, 무연총에도, 요괴의 산에도, 현무의 계곡에도, 마법의 숲에도. 불사조는 날아갔다. 이제 불사조는 고도를 낮추어 불꽃의 날개에 닿는 모든 것을 불태우겠지. 스스로 태워 환상향 전역을 불로 뒤덮을 것이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딱히 없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태울 뿐이다.


 


“여기 있었구나, 모코우!”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소리는 오랜만에 들은 지라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곧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해냈다. 그래,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지. 고개를 돌려보자 역시나. 하쿠레이 레이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뭐긴, 환상향을 불태우고 있지.”

“이변치고는 너무 심하지 않아?”

“이변? 하!”


레이무의 말에 자연스레 코웃음이 나왔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감이 날카로운 무녀님이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되시나? 아직도 이게 이변 같은 장난으로 보이는 건가? 대답 대신에 불꽃을 날렸다. 재빨리 피한 레이무가 다시 물었다.


“지금 룰을 어기는 거야? 스펠카드 룰을?”

“그런 어린애들 장난을 왜 내가 지켜야 하지?”


서서히 굳어지는 표정을 보니 이제 어느 정도 내 말을 이해한 듯했다. 손에 스펠카드 대신 고헤이와 부적을 꺼내 꽉 쥐었다. 그래, 그래야지. 스펠카드 룰 같은 장난이 아닌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해야지. 그래야 내 분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레이무에게 접근했다. 팔을 흔들어 수십 마리의 불새를 날렸다. 레이무는 당황하지 않고 불새 사이를 능숙하게 피하며 부적을 날렸다. 갖가지 주문이 적힌 부적은 스스로 궤도를 바꾸어 팔방에서 날아들었다. 허나 이쯤은 우습지. 가볍게 불태우고 나니 이번에는 커다란 음양옥이다. 동시에 옆에서는 침이 쇄도해왔다. 과연 레이무. 하쿠레이의 무녀. 요괴퇴치의 천재! 레이무에 비하면 나는 둔재라는 이름조차 아까운 우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인이 몇백 년을 수련하면 천재조차 뛰어넘을 수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우인이 불로불사의 몸이라면 어떨까!

나는 모든 공격을 몸으로 받으면서 전진했다. 음양옥에 맞아 팔이 부러지고, 침이 박혀 전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웬만큼 정신력이 강한 요괴라 해도 이 정도 라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겠지만, 나는 이보다 더한 고통을 매일같이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보다 더한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다.


“큭……!”


레이무가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피탄 당하면 끝인 탄막놀이와는 다르니까. 아니, 내가 봉래인이기 때문에 당황한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탄막놀이와 진짜 싸움은 상당히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보통 요괴라면 이렇게 많은 탄을 맞은 시점에서 이미 끝났다.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봉래인이니까. 언제나 카구야와 죽고 죽이는 게 일상인 나이기 때문에. 항상 평정을 유지하는 레이무가 당황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천하의 레이무다. 저 비상한 두뇌로 언제 묘안을 생각해 낼지 모르니까 빨리 끝을 보는 게 좋다. 나는 온몸에서 영력을 끌어 올려 수백 마리의 불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움직여 레이무의 전 방위를 점했다. 피할 수 없는 탄막을 쏘는 건 스펠카드 룰 위반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단 한 사람에게만 사용했었지.


“끝이다.”

“그래, 끝이야.”


갑자기 끼어든 낯익은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기분 나쁜 보라색 경계를 본 순간, 나는 몸을 틀었으나 이미 늦었다. 순식간에 수십 겹의 결계가 나를 옭아매었다. 몸을 감싸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제기랄!”


온 힘을 다해 결계를 때렸다. 두세 겹 정도가 파괴되었으나, 아직 수많은 결계가 남아 있었다. 게다가 깨진 결계가 자체적으로 수복하는 게 아닌가. 범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결계라니. 과연 빌어먹을 요괴의 현자답군.


“야쿠모 유카리!”


결계를 두들기며 소리쳤다. 어느새 틈새에서 모습을 드러낸 야쿠모 유카리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듯한 차가운 보라색 안광이 나를 비추었다. 그 거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으아아아아아!”


괴성과 함께 내 모든 영력을 끌어모았다. 영력은 거대한 불사조의 형상으로 바뀌었고, 내 분노를 담은 불사조는 자신을 태워 결계에 들이받았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결계들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유카리가 급히 결계를 치기 시작했다. 온통 불에 그슬린 레이무도 옆에 와서 그녀를 도와주었다.

이대로 질 수는 없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 반대로 여기서 이긴다면, 앞으로 나를 방해하는 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요괴의 현자와 하쿠레이의 무녀가 패배하였는데 그 누가 나서겠는가!

이 상황에서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 분노가 내 몸을 증식 한 이후로 단 일 초도 잊은 적 없는 그 얼굴. 카구야. 호라이산 카구야. 내 증오와 분노와 원망과 회한과 슬픔과 애정을 모두 가져간 그녀를 떠올리며, 나는 전신을 불태웠다. 허나 내 감정과는 달리 불사조는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고, 새로운 결계들이 내 몸을 조여들었다. 감각이 하나둘씩 사라졌고 이윽고 의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카, 구……야……!”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요괴의 현자와 하쿠레이의 무녀. 그들이 힘을 합치면 얼마나 강한지는 영야이변 직후에 패배와 함께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도, 그들은 나를 패배자로 만들었다.

아무것도 없다.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고 무언가가 들리지 않았고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 자신의 존재까지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봉래인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허나 서서히 생각조차 마모되고 있었다. 감각이 없는데 생각만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서서히 시시한 잡념들은 사라졌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좀 더 강렬한 생각이 필요했다.

그래서 계속 카구야를 떠올렸다. 그녀와 관련된 생각을 하면 그나마 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 그녀와의 싸움. 그녀에게 처음으로 죽었을 때. 그녀의 심장을 처음 터뜨린 날. 그녀와 처음으로 술을 나누었을 때. 그녀가 사는 영원정에 처음 갔을 때.

돌이켜보면 내가 봉래인이 된 뒤 잃어버린 희노애락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은 그녀였다. 더는 없을 거라 생각했던 감정을 다시 찾아준 사람은 그녀였다. 내 모든 감정을 가져간 사람. 내 인생의 시작. 그리고 이제는 내 인생의 끝.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이미 내 인생은 끝났는데, 나는 무얼 하는 거지? 끝난 생을 붙잡고 있는 내가 너무나도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래. 이곳이라면. 아무리 내가 죽지 않는 봉래인이라 해도 이곳이라면. 편안히 잠들 수 있으리라.


“카. 구. 야.”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름을 되뇐 나는 마침내 카구야에 관한 생각조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팬픽 대회 출품해서 2등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주제는 어... 아마 '라이벌' 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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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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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연거푸 울려 퍼졌다. 분명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히메카이도 하타테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들과 교류를 하지 않는 그녀이기에 약속도 없이 누군가 방문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든 신문을 읽어보라고 집집이 극성을 부리는 까마귀 텐구들도 하타테의 집만은 찾아오지 않을 정도이니.

그러나 그런 하타테의 생각을 비웃듯이 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결국, 하타테는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보나 마나 이상한 까마귀 텐구가 신문 권유하러 왔겠지.

신문 안 받…….”

하타테의 예상과 달리 상대는 신문은 권유하러 온 까마귀 텐구가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차라리 신문 권유를 하러 온 까마귀 텐구였으면 했다. 아는 얼굴을 만나는 게 이토록 끔찍한 행위일 줄은 몰랐다.

안녕?”

설마 그녀가 자신의 집에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하타테는 입만 뻐끔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면 손님으로 찾아온 샤메이마루 아야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굉장히 즐거운 표정이었다.

인사를 했으면 받아주는 게 예의 아닐까, 하타테?”

가시 돋친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하타테가 어색하게 말했다.

, . …… 안녕. 아야.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 친구네 집에 놀러 오는 것도 안 돼?”

순간 친구라는 말에 가슴이 뭉클해진 하타테였지만, 여기서 아야를 집 안으로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다른 텐구면 몰라도 아야에게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게 있기 때문이다.

, 정말 고마워. 그런데 미안하지만, 다음에 오면 안 될까? 말도 하지 않고 와서 집 정리도 제대로 안 했고, 어수선하고 엉망인데…….”

괜찮아. 괜찮아. 네가 더럽게 지낸다는 건 평소에도 잘 알고 있으니까. 새삼스럽게 뭘 그러니?”

그러면서 아야는 막무가내로 하타테를 밀치고 집 안에 들어왔다. 하타테가 온몸으로 막으려 했지만, 집에만 틀어박혀 사는 하타테가 건강한 아야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집에 들어온 아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역시 하타테가 사는 곳답게 쓰레기 같은 집이구나! 너무 어울리는데?”

악의가 가득 차다 못해 넘치는 말이었지만 그걸 내뱉는 아야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전혀 변함이 없었다. 하타테 또한 심한 말을 들으면서도 화를 내거나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차분하게 뒤를 따라왔다.

, 저쪽이 하타테의 방이구나! 나 저 방 볼래!”

잠깐, 아야. 내 방은 좀…….”

허무하게 밀린 방금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하타테가 아야의 팔을 강하게 잡았다. 반드시 보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친구의 집에 왔으면 방을 보는 건 당연한 거야. 넌 애가 상식이 없니? 아니면, 나한테 보여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거야?”

순간 하타테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분명 공포가 어린 표정이었다. 동공이 살짝 풀림과 동시에 팔도 살짝 풀렸다. 아야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팔을 뿌리쳤다. 힘이 풀린 하타테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지만, 아야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찰칵, 하고 열린 판도라의 상자 안에는 수많은 아야의 사진이 있었다. 바닥부터 벽, 천장까지. 하늘을 나는 아야. 기사를 쓰는 아야. 무녀를 취재하는 아야. 우아하게 부채를 흔드는 아야. 아야. 아야. 아야. 하타테의 방인지 아야의 방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아야가 존재했다.

아하.”

아야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는 규모였다. 물론, 그래서 나쁠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았다. 하타테를 매도할 명분이 더욱 뚜렷해졌으니.

이게 어떻게 된 걸까. . . ?”

고개를 돌려 하타테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절망이 그녀의 얼굴에 있었다. 온몸이 마치 병에 걸린 사람처럼 떨렸다. 아야는 그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눈에 새겨 넣었다.

더럽고 칙칙한 네 방에 어째서 내 사진이 이렇게 많이 있는 거지?”

…………………….”

간신히 입을 뗐지만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크나큰 충격으로 인해 실어증에 걸린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좀 더 강한 충격으로 낫게 해야지. 아야는 준비해두었던 결정타를 던졌다.

너 설마……. 나 좋아하니?”

사시나무 떨듯 떨리던 몸이 순간 굳었다. 마치 홍마관의 메이드가 시간을 정지한 것처럼. 그 모습을 본 아야의 입꼬리가 절로 솟구쳤다.

설마? 진짜야? ! 너같이 더럽고 추악하고 아는 텐구 하나 없는 히키코모리가? 나를? 정말 어울린다고 생각해? 주제를 알아야지!”

아야의 비웃음을 들으며 하타테의 몸이 무너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이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끊임없이 절망이 섞인 단어를 내뱉었다. 끝났어. 난 바보야. 이제 없어. 죽자. 죽어야 해. 나 같은 건…….

그녀의 말은 아야의 손짓으로 막혔다. 손을 뻗어 하타테의 턱을 부여잡아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 들이댔다. 그렁그렁한 눈물에 아야의 눈망울이 비쳤다.

울어? 너 정말 꼴사납구나!”

계속되는 아야의 매도에 결국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턱선을 따라 흘러내린 눈물은 아야의 손을 적셨다. 아야는 잠시 얼굴을 찡그리더니 턱에서 손을 떼고 하타테의 옷에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넌 애가 자존심도 없니? 어떻게 매일같이 괴롭히는 사람을 좋아할 수가 있어? 나에게 있어 너란 존재는 음식물 쓰레기보다도 밑에 있는 구제불능의 쓰레기야. 음식물 쓰레기는 거름이라도 쓸 수 있지.”

…… 그래도…… 난 네가…… 좋은 걸…….”

눈물이 섞인 목소리로 간신히 고백을 했다. 하타테의 목소리로 직접 좋아한다는 말을 듣게 되자 아야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집이 떠나갈 만큼 크게 웃었다. 도저히 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너랑 같은 까마귀 텐구라는 사실조차 치욕스러운데, 고백이라니 하…….”

간신히 웃음을 멈춘 아야가 이번에는 하타테의 머리를 잡았다. 그대로 끌어당기자 다시 눈과 눈이 마주보는 상황이 되었다. 아야는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 채로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이 히키코모리야. 넌 내게 욕을 먹어도 좋고, 괴롭힘을 당해도 좋고, 맞아도 좋은 거지? 그럼 평생 그렇게 살아. 평생 널 괴롭힐 테니까. 물론 내가 너에게 사랑을 주는 일 따윈 없어. 내 사랑은 너같은 쓰레기에게 주긴 너무 아까운 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타테의 머리를 홱 뿌리쳤다. 균형을 잃은 하타테가 엎어졌지만 아야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일어나 집을 나갔다. 홀로 바닥에 쓰러진 하타테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다.

그래도……. 좋은 걸…….”

 

 

 

 

 2014. 11. 03

서유님 생일 축하드려요! 

사흘이나 늦었지만... 흑흑 제가 죄인입니다 죽여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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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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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카리! 일단 대화를…."

"지금은 대화를 할 때가 아니잖아?"


유카리가 레이무의 두 팔을 잡고 천천히 누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약한 요괴라도 어느 정도의 세월을 살았다면 순수한 완력으로는 절대 인간에게 지지않는다. 하물며 상대는 요괴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요괴의 현자, 야쿠모 유카리다. 수많은 요괴를 퇴치하고 다니는 레이무지만 완력은 보통 여자아이와 크게 다를바 없다. 자연히 레이무는 바닥에 쓰러졌고, 유카리가 레이무 위에 올라타는 자세가 되었다.


"아앗!"


바닥에 등을 세게 부딪쳤는지 레이무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는 살짝 두려움에 떠는 표정과 잘 어우러져 유카리의 가학심을 자극했다. 유카리는 사디스틱한 미소를 지으며 레이무의 귓가에 속삭였다.


"레이무, 나쁜 아이에겐 벌을 줘야겠지?"


말을 끝맺으며 입김을 살짝 불어넣자 레이무가 움찔거렸다. 아아, 어린 양을 눈앞에 둔 늑대의 심정이 이러할까. 반응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다. 유카리는 천천히 레이무의 옷 안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읏… 차가워…."


계절은 겨울. 방안은 따뜻하지만 방금 밖에서 들어온 유카리의 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질적인 차가움에 레이무는 또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유카리의 입에 걸린 미소가 더 짙어졌고 손은 부드럽게 레이무의 흉부를 더듬다가 순간 밑으로 내려갔다.


"안돼, 거긴…!"


레이무가 깜짝 놀라 손으로 막으려 했지만 유카리의 왼손이 레이무의 두 손을 잡아 봉쇄했다. 방해물이 사라진 오른손은 자신의 본래 목적을 다 하기 위해 계속 아래로 내려갔고, 마침내 목표물을 찾을 수 있었다.


"흐응, 여기 있었구나. 맛있는 꽃잎☆"


레이무가 몸속 깊숙히 숨겨둔, 그 누구의 손도 닿지 않았던 꽃잎에 처음으로 외부의 손길이 닿았다. 마침내 찾아낸 그 부드러운 감촉. 유카리는 기쁨은 한껏 느끼며 살짝 꽃잎을 어루만졌다. 여전히 움찔거리던 레이무의 표정은 이제 거의 울 것 같이 되어 있었다.


"유카리… 제발… 그것만은…."

"후후, 그런 얼굴의 레이무도 정말 귀여워. 하지만, 더이상 그만둘 수 없는걸."


혀로 입술을 햝으며 한껏 요염함을 뽐내며 레이무를 괴롭히던 유카리는 이제 슬슬 끝낼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레이무. 이제 슬슬… 이 꽃잎의 처음을 가져가야겠어."

"안돼!"


유카리의 행동을 레이무가 꿈틀거리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 결국, 유카리는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바를 실행하고야 말았다. 









"바이바이, 레이무. 차는 잘 마실게!"

"다신 오지마!"


유카리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꽃잎을 가져갔다. 과연 오래산 요괴답게 눈썰미가 좋았다. 설마 옷 안쪽에 숨겨놨는데 발견하다니. 레이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극상의 차 맛을 내는 희귀한 꽃잎을…."

"원래 내꺼니까 억울해 할 필요 없어."

"사라져!"


스키마 사이로 나타난 유카리의 머리를 후려치려고 했지만 금세 사라졌다. 힘이 빠진 레이무는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유카리의 말이 맞는 말이다. 분명 유카리는 향림당에 그 꽃잎이 들어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미리 린노스케에게 예약을 해 놓았다. 그리고 린노스케가 잠시 나간 사이에 향림당에 온 레이무가 그 꽃잎을 발견한 것이다. 레이무는 평소처럼 아무 생각없이 그냥 들고왔고, 결국 이런 일이 발생했다. 어디에 하소연 할 것도 없이, 레이무의 잘못이다.


"예약품이라면 예약품이라고 써 놓아야 하는거 아냐?"


그렇지만 레이무는 린노스케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하는지 혼자 투덜거리다가 그것도 귀찮은지 바닥에 벌렁 누워서 잠이 들었다. 








환소담에 낚시용 (...) 으로 쓴 팬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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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

요괴의 탁한 눈망울에 비친 그녀는 꽃이었다. 아름다운 한 송이의 백련. 순결하고 청순하여 성스럽기까지 느껴지는 하얀 연꽃. 요괴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고귀함이 그녀에게 있었다. 그래서 요괴는 그녀에게 이끌렸고,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위해 일했다. 


그래서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요괴는 믿지 않았다. 아무리 인간들이 어리석고 멍청한 족속들이라고 해도 그녀에게 위해를 끼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인격적으로만 훌륭한 요괴가 아니다. 그녀의 신체강화 마법은 마법에 대해 문외한인 요괴가 봐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웬만한 인간들이라면 칼 한번 휘둘러 보지 못한 채 패배하게 되겠지. 요괴는 떠도는 소문을 비웃으며 수련에 계속 정진했다.


요괴가 진실을 알게 된 때는 법회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하기 위해 인간들이 사는 마을에 내려갔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북적거리는 시장터를 누비며 자신이 사야 할 물건들을 사다가 우연히 상인들끼리 떠드는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


"마법사가 드디어 잡혔다면서?"

"그래. 요상한 술수를 부리며 요괴들을 돕는 그년이 드디어 끝난 거야."

"암. 많은 퇴마사분들이 직접 저 멀리에 봉인했으니까 다시는 볼일이 없을 꺼야."

"이제야 속이 시원하군. 하하하!"


그들의 이야기는 어느 한 마법사가 다수의 퇴마사에게 퇴치되어 봉인되었다, 라는 이야기였다. 평소라면 더는 들을 것도 없이 무심하게 지나갔겠지만 얼마 전부터 그녀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많이 들었고 또한 그들이 떠드는 마법사란 존재가 그녀와 너무나도 비슷했기에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괴는 조심스럽게 상인들에게 다가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즐겁게 말씀을 나누는 중에 실례합니다. 저는 비사문천을 모시는 토라마루 쇼우라고 합니다."

"아, 이거 어이 여기까지 귀한 발걸음을, 일단 앉으시지요!"


살이 뒤룩뒤룩 찐 교활한 인상의 인간이 쇼우를 보며 연방 굽실대며 자리를 권했다. 비사문천의 이름은 어디에나 잘 먹힌다. 


"아닙니다. 금방 가야 합니다. 저, 그런데 방금 나누고 계시던 이야기 말입니다."

"예예, 뭐든지 물어보십쇼."

"혹시 그 봉인되었다는 마법사의 이름을 아십니까?"


쇼우는 인간들의 안색을 살피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혹시라도 그녀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이 알게 되면 그녀도 자신도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별로 눈치가 없는지 그저 좋다고 웃으며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 주었다. 


"물론입죠. 그 마법사의 이름은 히… 뭐더라?"

"뭐시기 뱌쿠렌 이라고 안 했어?"

"아, 그래. 예, 분명히 그런 이름이었을 겁니다."


순간 쇼우는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떨어뜨릴 뻔 했다. 다행히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실낱같은 이성이 근육에 힘을 불어넣어 떨어뜨리진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은 이미 육체에서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뱌쿠렌… 이라고요?"

"네. 그럽죠. 아시는 분인가요?"

"아니, 아닙니다. 이름이 조금 비슷했을 뿐이군요. 그럼 실례했습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은 쇼우는 서둘러 시장을 빠져나왔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금방이라도 육체를 찢고 나와 그녀를 찾아 헤멜 것만 같았다. 다시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서 쇼우는 자신을 세뇌시켰다. 그녀는 괜찮아. 안전할 거야. 그녀를 건드릴 수 있는 인간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설령 그녀보다 강한 인간이 있다 해도 그녀 같은 인격자를 봉인시킬 리가 없다. 그렇게 계속 암시를 걸었다. 






"당신이 이 산을 수호하는 요괴로군요. 반갑습니다. 히지리 뱌쿠렌이라고 합니다."

"…돌아가라. 죽기 전에."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래서 손대고 싶지 않았다. 나의 손으로 꽃을 꺾어 시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머릿속에 강렬한 트라우마로 남아 두고두고 후회할 게 분명했다.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 요괴의 편이니까요."

"마법사라고 하나, 본연의 모습은 인간. 네년도 결국 정신머리는 인간과 같을 터."


이 세상 어디에 요괴의 편을 드는 인간이 있을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그러나 이런 헛소리도 그녀의 입에서 나오니 왠지 그럴싸하게 들렸다. 이대로 그녀의 말을 믿고 그녀를 따르고 싶었다. 그러니 이것은 본능이 속삭이는 악마의 유혹. 본능에 충실하게 살면 언젠가는 파멸하고 만다. 스스로 이성으로 억누르며 그녀를 조용히 보내고자 노력했다. 


"네. 저 자신도 스스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 요괴의 편입니다."

"재미없는 소리를 하는군. 돌아가라. 별로 죽이고 싶진 않다."


끈질긴 인간. 끝까지 말도 안되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싫지만은 않다.


"역시 당신은 좋은 요괴군요."

"뭣…?!"


지금까지 몇천 년을 살면서 난생처음으로 들어본 소리에 놀라 얼굴이 빨개졌다. 나의 반응을 본 그녀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해탈한듯한 순수한 미소다.


"의외로 귀여운 면모도 가지고 있었네요. 당신."

"시끄러워!"


이성이 흐트러졌다. 덕분에 본능이 이성의 감옥을 깨고 본능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전 당신이 마음에 드네요. 어떤가요, 저와 함께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어보지 않겠습니까? 요괴가 퇴치당하지 않고,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그런 세계를."

"그런 세계가 있을 리가 없잖아. 절대 현실은 될 수 없는 이상이야."


입은 그렇게 움직였지만, 마음은 동요하고 있다. 진정하자. 사기꾼의 사탕발림과 다를게 무어란 말인가. 결코 실천되지 못할 일이다. 적당히 기절시켜서 산 밑으로 내려 보내자. 그게 최선의 방법이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죠?"

"…토라마루 쇼우."


…가끔은, 본능에 몸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법회는 무사히 끝났지만, 쇼우는 자신이 무얼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기계적으로 몸만 움직였을 뿐. 비사문천이 보았다면 진노하며 그녀에게 몇 시간동안 설교를 퍼부었겠지만, 다행히 오늘 비사문천은 없었다. 


쇼우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에는 오늘 들었던 소문들만이 맴돌고 있었다. 신빙성없는 소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게 걸렸다. 예전부터 계속 들려오던 이야기도 있고. 지금 당장이라도 법계로 날아가 진위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다. 쇼우는 뱌쿠렌이 그녀에게 내려준 임무를 수행할 의무가 있다. 


그때 가볍게 노트를 하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쇼우는 무의식적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끼익, 하고 문이 열리고 나즈린이 들어왔다. 쇼우는 깜짝 놀라서 정신이 들었다. 나즈린이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자 쇼우도 자세를 고쳐앉고 말했다.


"무슨 일이죠?"

"들으셨습니까, 주인님."

"무엇을?"

"히지리 뱌쿠렌이 법계에 봉인되었다는 소식 말입니다."


순간적으로 들끓은 나즈린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리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의 방향을 돌렸다. 분명 나즈린은 '소문'이 아니라 '소식'이라고 했다. 나즈린의 쥐를 이용한 정보수집능력은 그녀도 잘 알고 있다. 거기다 나즈린은 제자인 쇼우보다 더 비사문천에게 신뢰받는 요괴다. 결론. 저 정보는 정확한 소식이다. 재차 온몸이 꿈틀거렸다.


"들었습니다만, 그래서요?"

"…아닙니다, 들으셨다면 됐습니다."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여 대답했다. 나즈린은 비사문천이 쇼우를 감시하기 위해 붙인 감시역. 나즈린 자신은 어디까지나 쇼우의 밑을 자청하지만, 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섣부른 언행은 곧 비사문천에게 보고되고, 결국 비사문천은 뱌쿠렌을 신뢰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이대로 날릴 수는 없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가보겠습니다."


나즈린은 다시 한번 목례를 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쇼우는 앉은 채로 조용히 이를 갈았다. 절대 분노를 표출해서는 안된다. 






"성실하고 올곧은 요괴가 필요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녀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최근 여러모로 고민이 많아진 그녀였다. 그 중 가장 큰 고민은 역시 비사문천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비사문천을 신봉하여 절로 비사문천을 소환했지만 비사문천은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절에 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며칠간 고민을 하다가 급히 쇼우를 부른 것이다. 


"요괴를 한 명 비사문천께 제자로 보내려고 합니다."

"제자…라고요?"


좋은 생각이다. 뱌쿠렌과 친분이 있는 요괴 중 한 명이 비사문천의 제자가 된다면 비사문천을 대신하여 신앙을 모을 수도 있고 비사문천과 뱌쿠렌의 관계도 더욱 깊어질 테니까. 문제는 갈 만한 요괴가 있느냐, 가 문제이다. 비사문천이 요괴를 제자로 받아줄 리가 없으니 자신의 정체를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요괴. 동시에 비사문천의 신뢰도 얻어야 하니 능력도 좋아야 한다. 


"보낼만한 요괴가 있을까요?"

"그래서 당신을 부른 겁니다. 쇼우."

"네?"

"비사문천의 제자로 보낼만한 요괴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제안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분명히 좋은 의견이라 생각하고 지지하고 있었지만, 그 대상이 나라면 달라진다. 나 같은 한낱 잡요괴가 그렇게 큰일을 맡을 수 있을 리가. 괜히 그녀에게 방해될 뿐이다. 이번만큼은 그녀가 틀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그릇이 못됩…."

"아니요. 쇼우라면 할 수 있어요. 저는 쇼우를 믿습니다."


그녀는 손을 펴 나의 두 손을 맞잡았다. 따뜻하다. 이 따뜻함에 나와 다른 요괴들이 이끌린 것이리라. 얼음장같이 차가운 내 손이 부끄러워 슬며시 손을 빼려고 했으나 그녀가 꽉 잡아서 빼지 못했다. 그녀를 고개를 흔들었다. 그 움직임에 사로잡혀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어요. 아니, 쇼우밖에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맡아 주겠죠?"


자신과 함께하자는 말 이후로 처음으로 그녀에게 들어본 부탁이었다. 첫 만남 이후로 그녀는 내게 바라는 게 없었으니까. 오히려 그녀는 내게 계속 베풀어 주었다. 물론 나도 스스로 생각하여 그녀를 위해 여러가지 일을 해 주었지만. 그녀가 직접적으로 부탁한 적은 이번이 두 번째. 당연히 거절 따윈 할 수 없다.


"네. 알겠습니다.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쇼우의 정신이 반쯤 나간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그녀에 대한 정보를 더 듣진 못했다. 다만, 조만간 그녀를 법계에 봉인한 퇴마사 중 일부가 귀환할 거라는 소식만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찾아가서 사지를 찢어놓고 싶지만, 최근 비사문천의 감시가 심해졌다. 일부러 평소보다 몇 배의 일을 시키고 항상 나즈린을 딸려 보낸다. 절대 딴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겠지. 뻔한 수작이다.


모처럼 휴식시간을 얻어 쇼우는 절 근처 커다란 바위로 찾아갔다. 쇼우가 심란한 마음을 달래는 곳이다. 산 아래의 풍경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장소라 보고 있자면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높은 장소 특유의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고. 오늘도 멋진 가을의 절경을 보며 열을 식히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절벽 밑에서 갑작스레 하얀 연기가 튀어나왔다. 경계하며 뒤로 물러서는데 그 연기가 빠르게 움직였다. 자세히 보니 손을 내젓는 동작이었다. 싸울 마음이 없다는 뜻. 그러고 보니 이 연기는 쇼우가 잘 알고있는 뉴도가 아닌가.


"운잔님이로군요. 그렇다면, 이치린도?"


쇼우의 말에 호응하듯 수녀복을 입은 이치린이 날아왔다. 평소에 항상 수녀복을 단정히 갖추어 입던 이치린이지만 오늘은 어찌나 급히 왔는지 수도복이 온통 구겨지고 흙이 묻어 엉망이었다. 하지만, 제일 엉망진창이 된 부위는 역시 얼굴이었다. 날아오면서도 계속 울고 있었는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고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이치린은 오자마자 쇼우의 품에 달려들었다.


"미안해요. 쇼우. 아까부터 통제가 안되네요. 잠시만 그렇게 있어 줄래요?"


그 뒤를 따라 무라사가 쇼우의 앞에 나타났다. 이치린을 나무라고 있었지만 무라사의 얼굴도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하긴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운잔조차 표정을 험악하게 찡그린 채로 있었으니 말 다했다. 


그녀의 인품에, 그녀의 이상에 이끌려 그녀의 곁으로 온 요괴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그녀를 따른 요괴를 꼽아보라면 누구나 이치린과 무라사, 쇼우를 꼽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세 요괴가 지금 한자리에 모였다. 당연히 화제는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서 우린 지금이라도 당장 법계로 향할 겁니다. 그분을 구하기 위해서요."

"언니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어느새 울음을 그친 이치린이 두 주먹을 꽉 쥐며 분노를 표현했다. 운잔도 그에 동의하듯이 양 주먹을 부딪치며 툭툭거리고 있었다. 무라사 역시 두 눈이 적의로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8개의 닻으로 인간을 도륙할 기세다.


"쇼우, 당신도 함께 갈 거죠?"


쇼우는 잠시 하늘을 보다가 절 쪽에 있는 나무를 보았다. 쥐 한 마리가 급히 올라갔다. 돌담 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쥐 한 마리가 구석에 숨어서 이쪽을 감시하고 있다. 주변에 쇼우가 감지한 쥐만 해도 열 마리가 넘어간다. 말할 필요도 없이 나즈린의 짓이다. 과연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활용할 줄 아는 영악한 작은 현장이다. 쇼우는 작게 한숨을 짓고 답했다.


"아뇨. 저는 가지 않습니다."

"에?"

"뭐라고요?"


이치린이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고 무라사는 잘 못 들었다는 태도로 반문했다. 쇼우는 한글자 한글자 힘을 줘서 똑바로 말했다.


"저는 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무라사의 적의가 인간이 아닌 쇼우를 향했다. 옆에서 볼 땐 몰랐는데 직접 받아보니 굉장한 기세가 아닐 수 없다. 무라사보다 강한 쇼우였지만 온몸이 오싹했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계속,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이제 와서 감정을 드러내면 안된다.


"실망입니다. 쇼우. 적어도 당신은, 가장 앞에 서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시다. 이치린."


그간의 정 때문인지 차마 때리진 못하고 무라사는 이치린을 데리고 날아갔다. 두 눈을 부릅뜨고 쇼우를 노려보던 운잔이 뒤늦게 그 뒤를 따라갔다. 쇼우는 조용히 요괴들을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쥐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느껴졌다. 쇼우는 혼자 중얼거렸다. 


"오늘만큼 당신이 원망스러울 때가 없었습니다. 비사문천."


꽉 쥔 두 주먹을 펴자 적지않은 양의 피가 떨어졌다.






"당분간 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분간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고? 언제나 조금만 참으면 그녀를 볼 수 있을 거야, 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며 수행을 하던 나에게 그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네. 조금 멀리 갈 일이 생겼습니다. 한 몇 달간은… 만나지 못하겠네요. 어쩌면 몇 년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도 이별이 아쉬운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도 힘든 선택이었으리라. 이왕 이별해야 한다면, 마지막엔 웃는 얼굴로 보내주는 게 좋겠지. 억지로 안면근육을 움직여 보았지만, 결과는 굉장히 안 좋았다. 어두운 표정의 그녀가 순식간에 웃음보가 터졌으니까. 


"아하하. 고마워요. 쇼우."


그녀는 내가 그녀의 암울한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이러한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뭐라 반박을 하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찌 되었건 결론적으로는 좋아졌으니까. 


"그럼, 쇼우. 작별입니다. 비사문천께 여러가지 잘 배우도록 하세요."

"네. 제가 할 수 있는 바를 다하겠습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살짝 어리둥절하다가 곧 악수를 청한다는 걸 깨닫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맞잡은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가 불안해 떨고 있었다. 나는 나머지 한쪽 손도 내밀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잠깐 놀랬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고마워요. 쇼우. 또 신세를 지고 가네요."

"아닙니다."

"그럼, 가볼게요. 쇼우. 마지막까지 염치없지만,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나요?"

"어…? 아. 물론입니다."


갑작스레 그녀에게서 받는 3번째 부탁. 무슨 일일까? 의문을 띄우는 나의 손을 놓고서 그녀는 옷을 고쳐입고 날아갈 준비를 끝마쳤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했다.


"…에?!"


나는 깜짝 놀라 반문을 했지만, 그녀는 이미 멀리 날아간 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이미 인간들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었으리라. 자신을 봉인시키려 하는 사악한 인간들의 술수를. 그래서 그녀는 나나 다른 요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혼자 모든 걸 짊어지고 법계로 간 것이다. 가장 눈엣가시인 자신만 봉인된다면 다른 요괴들은 무사할 테니까. 실로 그녀다운 생각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녀의 마지막 말을 잊지 못하고 계속 떠올린다. 그녀가 나에게 직접 부탁한 말들은 언령이 되어 계속 나의 몸을 구속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말고 계속해서 비사문천의 아래에서 수행을 해주세요."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던가. 좋지 않은 소문을 빠르게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 굳이 인간마을에 내려가지 않아도 절에 찾아오는 인간들이 알아서 소식들은 전해준다. 비사문천의 이름이란 참으로 편리하다.


"허허, 그래서 마법사를 풀어주러 온 요괴들까지도 우리 퇴마사님들께서 봉인을 해 주셨지요. 아주 기쁜 일입니다."

"그렇군요. 실례지만 그 요괴들이 어디에 봉인됬는지 아십니까?"

"어, 그게 아마 지저도시? 여하튼 지하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쯤 땅밑에서 흙이라도 파먹고 있겠지요."

"저런 퇴마사분들이 있으셔서 우리 같은 천민들도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습디다 그려."


벌써 어디서 술이라도 한 잔 먹고 왔는지 남자들은 최신의 정보를 술술 내뱉었다. 쇼우가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자 더 신이 나서 자세한 속사정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감정을 억누른 채 남자들을 보내고 나서 쇼우는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이제는 익숙한 쥐들이 그녀의 행동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결국 무라사와 이치린, 운잔까지 당했다. 무라사들도 약하진 않지만, 그녀에 비하면 약한 편이다. 그녀조차 퇴마사들을 이겨내지 못했는데, 하물며 그녀보다 약한 무라사, 이치린, 운잔 3명으론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쇼우는 자신이 갔으면 어떻게 됬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곧 지워버렸다. 퇴마사들은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 분노로써 스스로 몸을 태우는 무라사들은 절대로 그들을 이길 수 없다.


빌어먹을 인간들. 쇼우는 이를 갈았다. 본디 요괴와 인간의 관계는 괴롭히고 괴롭힘을 받는 관계. 그래서 항상 요괴는 악하고 인간은 선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무엇인가. 그녀는 요괴지만 오히려 인간처럼 선한 존재이다. 아니, 인간보다도 더 선에 가까운 존재다. 그런 그녀를 요괴를 위해 산다는 이유만으로 봉인해버렸다. 그녀가 요괴를 위하여 움직이는 행동이 자신들에게도 훨씬 좋은 일이라는걸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 그녀의 높은 이상을 인간 따위가 이해할 리가 없지.


"이래서야 누가 인간이고, 누가 요괴인지 모르겠군."


이번만큼은 관계가 뒤집혔다. 그녀는 선이고 인간이 악이다. 그녀가 옳다. 틀린 건 인간들이다. 이 사실이 언젠가는 증명될 것이다. 

지금은 그저, 비사문천의 밑에서 조용히 수행을 해야 할 때이다. 그녀를 대신해서 비사문천의 신뢰를 얻어내고야 말겠다고 쇼우는 다짐했다.






그리고 환상과 실체의 경계가 생기고, 하쿠레이 대결계가 만들어지고, 환상향이라는 공간이 형성되었다. 여러가지 일도 많았고 혼란도 적잖이 있었지만, 요괴의 현자와 하쿠레이의 무녀가 잘 해결하였다. 어느덧 세계는 그녀가 바라던 이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동안 쇼우는 착실하게 일해서 비사문천의 신뢰를 쌓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의심을 품고 있는지 나즈린이 계속 따라다녔다. 그렇기에 쇼우는 단 하나의 허점도 보이지 않고 수행만을 계속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꾸 그녀가 생각났다. 쌓이고 쌓인 그리움은 세월의 칼날이 스쳐 지나간 언령의 구속을 풀어버렸다. 쇼우는 그녀를 만나고 싶었고, 또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러나 쇼우가 그녀에게 은혜를 갚으려 해도 혼자서는 그녀의 봉인을 해제할 방법이 없다. 적어도 무라사나 이치린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쇼우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여러가지 이유를 핑계로 삼아 지하를 수색했지만, 아직 그녀들이 봉인된 장소를 찾지 못했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쇼우의 머릿속이 절망감으로 가득 찰 때쯤, 하늘을 나는 배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절로 흘러들어왔다.


틀림없다, 무라사들이다. 쇼우는 확신했다. 최근에 간헐천이 곳곳에서 솟아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같이 빠져나온 모양이다. 다행히 지금 비사문천은 없다. 마침내 쇼우는 결심을 하고 성련선으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그때, 방문을 누군가가 두들겼다. 쇼우는 혀를 차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보통 때라면 쇼우의 대답이 없으면 그냥 가겠지만, 오늘만큼은 문이 열렸다. 서 있는 요괴는 당연히 나즈린.


"어딜 가시는 겁니까."

"잠시 갔다 올데가 있습니다. 그럼."

"동료분들에게 가십니까?"


쇼우가 홱 돌아보았다. 약 천 년 동안 비사문천의 밑에서 수행을 쌓으며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진 쇼우였지만 그녀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어김없이 예전으로 돌아갔다. 지금처럼.


"비켜주시겠습니까? 나즈린, 난 바쁩니다."

"주인님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 역할이 무엇인지."


나즈린은 쇼우의 생각까지도 눈치채고 있었다. 자신이 비사문천이 붙인 감시역이라는 사실을 쇼우가 알고 있다고. 역시 비사문천이 작은 현장이라 부르며 신뢰할 정도의 비상한 두뇌다. 


"비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무력이라도 쓰실 작정이십니까?"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나즈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쇼우는 사방에 탄막을 뿌리며 나즈린을 압박했다. 나즈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다가 자그마한 구슬을 꺼내 들었다. 조용히 진언을 읊조리자 갑자기 모든 탄막들이 사라졌다. 놀란 쇼우는 재차 탄막을 뿌리며 돌진하려 했지만, 갑자기 강한 압박감을 느끼며 그 자리에 쓰려졌다. 마치 중력이 100배쯤 증가한 느낌이다.


"비사문천의 결계입니다. 요력을 제압하는 결계이지요."


나즈린 본인은 무사한 걸로 미루어보아 저 구슬이 매개물이고 매개물을 소지한 요괴는 무사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저걸 빼앗는 것이 급선무다. 요력을 쓸 수 없으니 남은 건 비사문천에게 익힌 법력뿐. 일전에 비사문천에게 하사받은 보탑을 꺼내 공격하려 했지만, 문득 옆구리에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보탑이 보이지 않았다. 


"제길, 잃어버렸나?"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대로 끝인가?


"포기하시고 얌전히 절에 계신다고 약속하면 풀어 드리겠습니다. 괜한 고생 하시지 마시고 맹세하시길."

"그…럴순 없습…니다!"

"그러면 계속 그렇게 계십시오. 비사문천께서 오실 때까지."


나즈린은 끝났다고 판단하여 몸을 돌렸다. 지금이 기회다. 본래 끝났다고 생각한 때가 가장 위험한 때이다. 쇼우는 이를 악물었다. 결계가 요력을 제압한다면 더 큰 요력으로 결계를 제압하면 그만이다. 지금도 그녀는 봉인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봉인된 천 년의 세월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스스로 암시를 걸고, 마침내 일어섰다. 그리고 달렸다. 발소리를 들은 나즈린이 뒤를 돌아봤을 땐 이미 늦었다. 쇼우의 영혼을 담은 펀치가 배에 작렬했다. 자연히 나즈린의 손에 힘이 빠졌고 구슬이 허공을 거쳐 쇼우의 손에 떨어졌다.


"하아, 그럼 이제 난 가보겠습니다."

"죄송하지만, 그건… 안됩니다."


날아간 나즈린이 자세를 고쳐잡고 재차 진언을 외우자 아까보다 더 강한 힘이 쇼우를 내리찍었다. 


"무슨…!"

"으으, 당연히 가짜입니다. 진짜를 당당히 들고 싸울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나즈린 정도 되는 요괴가 중요한 매개물을 보란 듯이 꺼내서 싸울 때 의심을 했어야 했다. 평소라면 침착하게 여러가지 생각을 해서 더 나은 결론을 도출했을 테지만, 지금 쇼우의 머릿속은 모조리 그녀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냉정한 판단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방금전과는 다르게 쇼우는 쓰러지지 않고 두 발로 서 있었다.


"응?"


나즈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진언을 계속 외웠다. 두 배, 세 배, 네 배, 점점 더 많은 압력이 쇼우를 짓눌렀지만 쇼우는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애꿎은 땅에 발이 파고들 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구하러 가는걸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작지만 뚜렷하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했다. 버티기도 어려운 상황에 말까지 하다니. 천 년간 쇼우를 관찰해온 나즈린은 쇼우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다. 쇼우는 이미 한계를 넘었다. 오직 그녀에 대한 집념 하나로 서 있는 것이다. 나즈린은 쇼우의 정신력에 탄복했다. 그리고 짧게 진언을 내뱉었다. 압력은 소리없이 사라지고 무형무색의 결계는 존재 자체를 감추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제야 쇼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나즈린이 다가오자 다시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런데 나즈린은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다가와 쇼우의 앞에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이게 뭐죠?"

"당신의 의지를 시험했습니다."

"……."

"당신이 천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법계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시험해 본 것입니다. 이제 당신의 의지를 알았으니, 전 당신의 편입니다."

"갑자기 무슨 생각입니까?"

"그분을 생각하는 마음에 감명받았다고 해 두지요."


고개를 든 나즈린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다우징을 챙겼다.


"그럼 갑시다. 비사문천께는 말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나즈린."


나즈린이 이런 친근한 말투고 쇼우에게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천 년 동안 언제나 사무적이고 수동적인 말투가 아니었던가. 쇼우의 진심이 나즈린에게도 전해졌기에 나즈린도 진심으로 그녀를 도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까 싸울 때 왜 보탑을 꺼내지 않으셨습니까? 훨씬 유리했을 텐데."

"어, 그게… 실은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는 게 잃어버린 듯합니다."


미소를 띄고있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맥이 풀려버린 탓이다.


"그런 표정은 처음 보는군요. 나즈린."

"저도 당신의 이런 면모는 처음 봅니다."


둘은 동시에 웃었다.


"보탑은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제 능력이면 금방이니까요."

"부탁합니다. 나즈린."

"부하가 주인의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출발합시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즈린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확실히 쇼우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방금전만 해도 결계에 억눌려지고 있었으니. 빈말이라도 좋은 컨디션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쇼우는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녀를 구할 생각만 해도 힘이 솟아나니까요."

"…중증이군요."

"방금 뭐라고 했죠, 나즈린?"

"아니, 아닙니다. 빨리 출발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능청스럽게 손을 내젓는 나즈린. 쇼우는 그저 웃었다. 


"그럼 갑시다."


드디어 때가 왔다. 그녀와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할 시간이, 그녀를 다시 세상 밖으로 내보낼 시간이, 그녀에게 멋진 환상향을 보여줄 시간이, 그녀를 구할 때가. 이젠 쇼우가 구해줄 차례였다. 산에 침입하는 인간이나 요괴를 죽이는 일만 반복하며 언젠간 퇴마사에게 죽을 운명이었던 쇼우를 그녀가 구해준 것처럼.


"이제 히지리에게 은혜를 갚을 차례입니다."


그녀, 히지리 뱌쿠렌을 구하러.










이것도 예전 작품.

환소담 오픈 기념 공모전 출품해서 5등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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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내 몸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거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나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내 존재를 자각하자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내가 왜 살아있는가, 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분명히 죽었다. 내가 죽기 직전의 순간까지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내가 생전에 보았던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아닌 이상 붕괴되는 건물 속에서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왜? 수십 번을 생각해봐도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나는 현재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상체가 바람에 흩날리는 건 느껴지는데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다. 하체는 마치 갯벌에 빠진 다리처럼 푹 박혀서 움직이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는 바람 소리, 그리고 각종 풀과 꽃들이 흔들리는 소리뿐. 보이는 것 또한 풀과 꽃뿐이다. 그런데 눈높이가 딱 눈앞에 핀 새빨간 꽃과 같았다.


그렇군. 마침내 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난 죽어서 꽃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헌데 환생을 하는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된 것인지 인간일때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꽃임에도 인간과 비슷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생각도 할 수 있고. 염마가 실제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다시 죽어서 염마를 만나게 된다면 한번 따져보아야 겠다.


그래도 제법 나쁘지 않은 광경이다. 보아하니 문명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은 시골인 듯했다. 어릴 적에나 보았던 새파랗게 우거진 풀과 나무들이 참 보기 좋았다. 무엇보다 주위에 핀 새빨간 꽃들이 매우 몽환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간다. 아, 나도 저 꽃처럼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을까. 이왕 꽃이 된 거, 예쁜 꽃으로 태어나 순수한 소녀의 손에 들려 자그마한 꽃병에 꽂혀서 생을 마감하면 소원이 없겠다. 


그때, 바스락하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오고 있었다. 스스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어서 머릿속에 물음표만 42개째 띄우던 찰나, 그 사람의 모습이 나의 시선이 포착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소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밝은색 계통의 체크무늬 옷과 하얀색 블라우스. 손에 든 하얀 양산과 잘 어울리는 녹색 머리. 깊고 맑은 연두색 눈동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밝은 미소. 


아아, 여신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총각, 아니 이제는 꽃이지. 여하튼 열매를 맺지 않은 꽃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물론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다. 나는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무수한 꽃 중 하나일 뿐이니까. 설령 그녀가 꽃을 원해서 이곳에 왔다고 해도 주변의 붉은 꽃들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내가 선택될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소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생긋 웃었다. 주위에 예쁜 꽃들이 많아서 행복한 모양이다. 나도 그녀의 행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게 기뻤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이렇게나 많은 피안화라니…."


소녀는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주위에 붉은 꽃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저 아름다운 꽃의 이름이 피안화인가. 나도 나름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꽃에 대한 지식은 꽤 해박한 편이지만 피안화라는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마 이 지방에만 피는 특이한 꽃인 모양이다.


"60년에 한 번밖에 이 광경을 즐기지 못하는 게 슬플 따름이야."


60년에 한 번? 60년마다 피는 꽃인가? 그렇다면 정말 희귀한 꽃이다. 그런데 소녀의 말투는 마치 이 60년마다 피는 꽃을 여러 번 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분명히 외형은 이제 10대 후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으음… 에이, 하지도 못하는 추리는 그만두자. 머리만 아프다. 그냥 저 소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꽃의 선녀라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어머? 이 빛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색깔인데."


갑자기 소녀가 무언가 발견했는지 무릎을 펴고 조심스럽게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의 심장이(엄밀히 말하면 심장이라는 기관은 이미 없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심장)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내 앞에 멈춰줘. 내 주위의 꽃을 선택해 줘. 그래서 일 초라도 더 나의 가까이에…!


그런데 놀랍게도, 소녀의 얼굴은 점점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소녀의 얼굴과 나의 얼굴(꽃잎)이 거의 닿을 거리까지 접근했다. 소녀는 말없이 몇 초간 관찰을 하더니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그러더니 손으로 조심스럽게 나를 잡았다. 아! 그 따스한 감촉이란. 이 환희와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다.


소녀가 나의 꽃잎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러자 갑자기 나의 내면에서 에너지가 마구 솟구치기 시작했다. 에너지는 온몸으로 퍼져 나갔고 이내 내 몸은 생기를 가득 머금게 되었다. 마치 소녀가 내게 생명 에너지를 건네준 듯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피안화도 오랜만이네."


다행이다. 나는 소녀의 마음에 들 만큼 아름다운 모양이다. 나중에 염마를 만나면 절대로 화내지 말고 감사부터 해야겠다. 이런 꽃으로 태어나게 해 줘서 고맙다고.


그때, 나와 소녀의 시간을 방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소녀 쪽으로 온 것이다. 


"카자미 유카!"


앳된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이쪽도 어린 소녀다. 하지만, 평화 그 자체인 소녀의 목소리와는 달리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녀의 이름이 카자미 유카인 모양이다. 카자미 유카. 유카. 그녀의 외모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어머, 하쿠레이의 무녀로구나."


"어머, 라니!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이 이변은 네 짓이지?"


"미안하지만 잘못 짚었어. 물론 내가 할 수는 있지만, 이건 내가 일으킨 이변은 아니야."


"거짓말 하지마! 좋아, 그렇다면 승부야! 너에게 이기고 나서, 진실을 듣겠어."


"좋으실 대로. 단, 나에게 이긴다면 말야."


그러더니 유카가 날았다. 문자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설마 진짜 선녀란 말인가? 하늘 높이 날아가서 더는 유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뒤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조금 전에 온 신경질 소녀와 싸우는 모양이었다. 제발 그녀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덧 싸움이 끝났는지 요란한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날고 있던 두 소녀가 땅으로 내려와 숨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유카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이겼네. 하쿠레이의 무녀님?"


"윽……!"


"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한가지 힌트를 줄게. 사신을 찾아."


"사신?"


"환상향을 담당하는 붉은 머리의 땡땡이 사신. 뭐, 찾을 필요 없이 곧 올 것 같지만."


유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갑자기 나에게 왔다. 그리고 나를 가리키며 신경질 소녀에게 말을 했다.


"이 피안화를 보렴."


"오늘 너무 많이 봐서 짜증밖에 안 나는데."


"이 피안화는 다른 피안화와는 조금 다르지 않니?"


"어머, 그렇긴 하네. 확실히 다른 피안화들보다 훨씬 아름다운걸."


"그렇지?"


유카가 천천히 손을 뻗어 나의 꽃잎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온기가 가득 담긴 부드러운 손길. 부처의 자비로운 손길조차 그녀에 미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피안화는 영혼이 머무르는 꽃. 때문에 피안화의 아름다움은 머무르는 영혼에 따라 결정되지. 그 영혼이 생전에 얼마나 아름답게 살았는지에 따라 피안화의 아름다움은 달라져."


유카의 말 대로라면 나의 삶이 아름다웠다는 것인가? 일개 회사원으로 평범한 삶을 보내던 내가? 남들과 다른 점이라면 단지 취미가 봉사활동이라는 것 밖에 없을텐데. 그리고 죽을 때, 남을 살려주고 죽은 것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삶이 아름답다는 건가?


"이 꽃에 머무르는 영혼은… 틀림없이 아름다운 삶을 살았겠지."


아아, 그런가. 나의 삶은 아름다웠구나. 나조차 모르는 사실을, 유카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너는 어때, 네가 죽어서 피안화에 머물게 된다면 이 꽃보다도 더 아름다울 수 있겠니? 이변만 생기면 요괴를 패고 다니기 바쁜 네가?"


"윽."


신경질 소녀는 기세가 한풀 꺾인 채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본인 스스로 찔리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겠지.


"내가 볼 땐 넌 아름다운 피안화가 될 수 없어. 그러니 좀 더 삶을 열심히 살도록 하렴."


"마치 염마님 같은 말을 하는군."


갑자기 또 다른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3의 소녀가 나타난 것이다.


"댁이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아도 저 무녀는 염마님께 똑같은 소릴 수없이 들을 테니 댁까지 그럴 필요는 없어."


"넌 일단 일부터 하는 게 어때?"


유카가 살짝 화를 내며 말했다. 그 기세에 눌린 제 3의 소녀는 약간 어눌한 어조로 답했다.


"때때로 사신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구."


"때때로 가 아닐 텐데."


"저기, 사계절의 플라워 마스터님? 제게 말할 때도 꽃에 대해 이야기 할 때처럼 해주시면 안될까요?"


"꽃이랑 넌 다르잖아."


"…이럴 땐 보통 꽃보다 사신의 인권이 우선이지 않아?"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


결국 제 3의 소녀가 졌다는듯이 태도를 바꾸었다.


"네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제 일을 처리해야 하니 두 분은 신사에서 차라도 한 잔 하며 담소라도 나누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염마님이 오실 겁니다."


염마? 염마도 실제로 있는 건가. 하긴, 선녀도 있는데 염마가 없을 이유는 없잖아? 아무튼 신경질 소녀와 유카는 염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염마가 온다고 하니 곧 떠날 준비를 하는 걸로 미루어보아.


"아참, 땡땡이 사신?"


"오노즈카 코마치. 이름은 좀 기억해 주는 게 어때? 한두 번 보는 사이도 아닌데."


"저 피안화에 머무는 영혼은 대우를 좀 해 줘. 아름답잖아?"


"오? 확실히 그렇군. 최근에 본 피안화 중에 가장 아름다운데. 저 정도라면 내가 굳이 특별대우를 해 주지 않아도 염마님께 좋은 판결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자, 그럼 이분부터 모셔볼까."


순간 내 몸이 붕 떠오르는 감각을 느끼며 제 3의 소녀의 손에 이끌려 자그마한 나룻배에 탑승했다. 그제서야 나는 자신을 오노즈카 코마치라고 소개한 제 3의 소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붉은색 갈래 머리에 블라우스와 긴 스커트를 입고, 굽이 높은 게다를 신어 제법 눈에 띄는 모습이었지만 무엇보다 눈에 들어오는 건 손에 든 커다란 대낫이었다. 유카가 사신이라도 하더니만, 진짜 사신인가?


"이 대낫이 좀 멋지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겐 사신은 낫을 들고 있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결국 들게 되었어.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는 사신들도 있지만 나는 이 낫을 꽤 좋아해."


코마치는 내가 낫에 관심을 둔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과시하려는 듯 대낫을 크게 몇 번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이 위협적이었다. 내가 살짝 움찔거리자 씨익 웃으며 나룻배 한쪽 구석에 낫을 내려놓았다. 대신 나룻배에 놓여 있던 긴 노를 들었다. 


"자, 그럼 출발할까."


그리고 배를 천천히 저어가기 시작했다. 여자치고는 신장이 꽤 큰 편이지만, 그래도 여자가 배를 저어가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능숙하게 저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그런데 형씨. 아까 그 녹발의 요괴 봤지?"


요괴? 요샌 선녀도 요괴로 취급하는 모양이다. 뭐, 인간 외의 존재를 요괴로 규정하면 틀린 말은 아닐지도….


"그 요괴 참 성질이 고약하지 않아? 오죽하면 히에다 가의 환상향 연기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겠어. 인간우호도도 최악이고."


그건 아니다. 유카가 성격이 나쁘다니?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어떻게든 저 소녀에게 부정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행히 내 노력이 빛을 발해 나의 몸은 아주 조금 좌우로 움직였다.


"응? 아니라고? 하긴, 저 요괴는 꽃에게는 한없이 친절하니까. 형씨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을 수 도 있겠군. 뭐, 형씨의 견해가 그러하다면 더는 말하진 않지. 사람은 각자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까 말이야." 


소녀는 하핫, 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노를 저어갔다. 




그 후로 나는 염마를 만나서 재판을 받고 명계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지금까지 별 일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지만, 다른 유령들과는 달리 최대한 빨리 전생하려고 애쓰고 있다. 물론 나는 사람으로 전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꽃으로 전생하여,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만나보고 싶다. 꽃을 사랑하는 요괴, 사계절의 플라워 마스터, 카자미 유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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