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내 몸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거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나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내 존재를 자각하자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내가 왜 살아있는가, 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분명히 죽었다. 내가 죽기 직전의 순간까지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내가 생전에 보았던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아닌 이상 붕괴되는 건물 속에서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왜? 수십 번을 생각해봐도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나는 현재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상체가 바람에 흩날리는 건 느껴지는데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다. 하체는 마치 갯벌에 빠진 다리처럼 푹 박혀서 움직이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는 바람 소리, 그리고 각종 풀과 꽃들이 흔들리는 소리뿐. 보이는 것 또한 풀과 꽃뿐이다. 그런데 눈높이가 딱 눈앞에 핀 새빨간 꽃과 같았다.


그렇군. 마침내 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난 죽어서 꽃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헌데 환생을 하는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된 것인지 인간일때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꽃임에도 인간과 비슷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생각도 할 수 있고. 염마가 실제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다시 죽어서 염마를 만나게 된다면 한번 따져보아야 겠다.


그래도 제법 나쁘지 않은 광경이다. 보아하니 문명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은 시골인 듯했다. 어릴 적에나 보았던 새파랗게 우거진 풀과 나무들이 참 보기 좋았다. 무엇보다 주위에 핀 새빨간 꽃들이 매우 몽환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간다. 아, 나도 저 꽃처럼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을까. 이왕 꽃이 된 거, 예쁜 꽃으로 태어나 순수한 소녀의 손에 들려 자그마한 꽃병에 꽂혀서 생을 마감하면 소원이 없겠다. 


그때, 바스락하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오고 있었다. 스스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어서 머릿속에 물음표만 42개째 띄우던 찰나, 그 사람의 모습이 나의 시선이 포착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소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밝은색 계통의 체크무늬 옷과 하얀색 블라우스. 손에 든 하얀 양산과 잘 어울리는 녹색 머리. 깊고 맑은 연두색 눈동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밝은 미소. 


아아, 여신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총각, 아니 이제는 꽃이지. 여하튼 열매를 맺지 않은 꽃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물론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다. 나는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무수한 꽃 중 하나일 뿐이니까. 설령 그녀가 꽃을 원해서 이곳에 왔다고 해도 주변의 붉은 꽃들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내가 선택될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소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생긋 웃었다. 주위에 예쁜 꽃들이 많아서 행복한 모양이다. 나도 그녀의 행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게 기뻤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이렇게나 많은 피안화라니…."


소녀는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주위에 붉은 꽃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저 아름다운 꽃의 이름이 피안화인가. 나도 나름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꽃에 대한 지식은 꽤 해박한 편이지만 피안화라는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마 이 지방에만 피는 특이한 꽃인 모양이다.


"60년에 한 번밖에 이 광경을 즐기지 못하는 게 슬플 따름이야."


60년에 한 번? 60년마다 피는 꽃인가? 그렇다면 정말 희귀한 꽃이다. 그런데 소녀의 말투는 마치 이 60년마다 피는 꽃을 여러 번 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분명히 외형은 이제 10대 후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으음… 에이, 하지도 못하는 추리는 그만두자. 머리만 아프다. 그냥 저 소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꽃의 선녀라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어머? 이 빛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색깔인데."


갑자기 소녀가 무언가 발견했는지 무릎을 펴고 조심스럽게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의 심장이(엄밀히 말하면 심장이라는 기관은 이미 없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심장)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내 앞에 멈춰줘. 내 주위의 꽃을 선택해 줘. 그래서 일 초라도 더 나의 가까이에…!


그런데 놀랍게도, 소녀의 얼굴은 점점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소녀의 얼굴과 나의 얼굴(꽃잎)이 거의 닿을 거리까지 접근했다. 소녀는 말없이 몇 초간 관찰을 하더니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그러더니 손으로 조심스럽게 나를 잡았다. 아! 그 따스한 감촉이란. 이 환희와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다.


소녀가 나의 꽃잎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러자 갑자기 나의 내면에서 에너지가 마구 솟구치기 시작했다. 에너지는 온몸으로 퍼져 나갔고 이내 내 몸은 생기를 가득 머금게 되었다. 마치 소녀가 내게 생명 에너지를 건네준 듯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피안화도 오랜만이네."


다행이다. 나는 소녀의 마음에 들 만큼 아름다운 모양이다. 나중에 염마를 만나면 절대로 화내지 말고 감사부터 해야겠다. 이런 꽃으로 태어나게 해 줘서 고맙다고.


그때, 나와 소녀의 시간을 방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소녀 쪽으로 온 것이다. 


"카자미 유카!"


앳된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이쪽도 어린 소녀다. 하지만, 평화 그 자체인 소녀의 목소리와는 달리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녀의 이름이 카자미 유카인 모양이다. 카자미 유카. 유카. 그녀의 외모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어머, 하쿠레이의 무녀로구나."


"어머, 라니!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이 이변은 네 짓이지?"


"미안하지만 잘못 짚었어. 물론 내가 할 수는 있지만, 이건 내가 일으킨 이변은 아니야."


"거짓말 하지마! 좋아, 그렇다면 승부야! 너에게 이기고 나서, 진실을 듣겠어."


"좋으실 대로. 단, 나에게 이긴다면 말야."


그러더니 유카가 날았다. 문자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설마 진짜 선녀란 말인가? 하늘 높이 날아가서 더는 유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뒤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조금 전에 온 신경질 소녀와 싸우는 모양이었다. 제발 그녀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덧 싸움이 끝났는지 요란한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날고 있던 두 소녀가 땅으로 내려와 숨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유카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이겼네. 하쿠레이의 무녀님?"


"윽……!"


"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한가지 힌트를 줄게. 사신을 찾아."


"사신?"


"환상향을 담당하는 붉은 머리의 땡땡이 사신. 뭐, 찾을 필요 없이 곧 올 것 같지만."


유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갑자기 나에게 왔다. 그리고 나를 가리키며 신경질 소녀에게 말을 했다.


"이 피안화를 보렴."


"오늘 너무 많이 봐서 짜증밖에 안 나는데."


"이 피안화는 다른 피안화와는 조금 다르지 않니?"


"어머, 그렇긴 하네. 확실히 다른 피안화들보다 훨씬 아름다운걸."


"그렇지?"


유카가 천천히 손을 뻗어 나의 꽃잎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온기가 가득 담긴 부드러운 손길. 부처의 자비로운 손길조차 그녀에 미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피안화는 영혼이 머무르는 꽃. 때문에 피안화의 아름다움은 머무르는 영혼에 따라 결정되지. 그 영혼이 생전에 얼마나 아름답게 살았는지에 따라 피안화의 아름다움은 달라져."


유카의 말 대로라면 나의 삶이 아름다웠다는 것인가? 일개 회사원으로 평범한 삶을 보내던 내가? 남들과 다른 점이라면 단지 취미가 봉사활동이라는 것 밖에 없을텐데. 그리고 죽을 때, 남을 살려주고 죽은 것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삶이 아름답다는 건가?


"이 꽃에 머무르는 영혼은… 틀림없이 아름다운 삶을 살았겠지."


아아, 그런가. 나의 삶은 아름다웠구나. 나조차 모르는 사실을, 유카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너는 어때, 네가 죽어서 피안화에 머물게 된다면 이 꽃보다도 더 아름다울 수 있겠니? 이변만 생기면 요괴를 패고 다니기 바쁜 네가?"


"윽."


신경질 소녀는 기세가 한풀 꺾인 채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본인 스스로 찔리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겠지.


"내가 볼 땐 넌 아름다운 피안화가 될 수 없어. 그러니 좀 더 삶을 열심히 살도록 하렴."


"마치 염마님 같은 말을 하는군."


갑자기 또 다른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3의 소녀가 나타난 것이다.


"댁이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아도 저 무녀는 염마님께 똑같은 소릴 수없이 들을 테니 댁까지 그럴 필요는 없어."


"넌 일단 일부터 하는 게 어때?"


유카가 살짝 화를 내며 말했다. 그 기세에 눌린 제 3의 소녀는 약간 어눌한 어조로 답했다.


"때때로 사신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구."


"때때로 가 아닐 텐데."


"저기, 사계절의 플라워 마스터님? 제게 말할 때도 꽃에 대해 이야기 할 때처럼 해주시면 안될까요?"


"꽃이랑 넌 다르잖아."


"…이럴 땐 보통 꽃보다 사신의 인권이 우선이지 않아?"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


결국 제 3의 소녀가 졌다는듯이 태도를 바꾸었다.


"네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제 일을 처리해야 하니 두 분은 신사에서 차라도 한 잔 하며 담소라도 나누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염마님이 오실 겁니다."


염마? 염마도 실제로 있는 건가. 하긴, 선녀도 있는데 염마가 없을 이유는 없잖아? 아무튼 신경질 소녀와 유카는 염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염마가 온다고 하니 곧 떠날 준비를 하는 걸로 미루어보아.


"아참, 땡땡이 사신?"


"오노즈카 코마치. 이름은 좀 기억해 주는 게 어때? 한두 번 보는 사이도 아닌데."


"저 피안화에 머무는 영혼은 대우를 좀 해 줘. 아름답잖아?"


"오? 확실히 그렇군. 최근에 본 피안화 중에 가장 아름다운데. 저 정도라면 내가 굳이 특별대우를 해 주지 않아도 염마님께 좋은 판결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자, 그럼 이분부터 모셔볼까."


순간 내 몸이 붕 떠오르는 감각을 느끼며 제 3의 소녀의 손에 이끌려 자그마한 나룻배에 탑승했다. 그제서야 나는 자신을 오노즈카 코마치라고 소개한 제 3의 소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붉은색 갈래 머리에 블라우스와 긴 스커트를 입고, 굽이 높은 게다를 신어 제법 눈에 띄는 모습이었지만 무엇보다 눈에 들어오는 건 손에 든 커다란 대낫이었다. 유카가 사신이라도 하더니만, 진짜 사신인가?


"이 대낫이 좀 멋지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겐 사신은 낫을 들고 있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결국 들게 되었어.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는 사신들도 있지만 나는 이 낫을 꽤 좋아해."


코마치는 내가 낫에 관심을 둔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과시하려는 듯 대낫을 크게 몇 번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이 위협적이었다. 내가 살짝 움찔거리자 씨익 웃으며 나룻배 한쪽 구석에 낫을 내려놓았다. 대신 나룻배에 놓여 있던 긴 노를 들었다. 


"자, 그럼 출발할까."


그리고 배를 천천히 저어가기 시작했다. 여자치고는 신장이 꽤 큰 편이지만, 그래도 여자가 배를 저어가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능숙하게 저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그런데 형씨. 아까 그 녹발의 요괴 봤지?"


요괴? 요샌 선녀도 요괴로 취급하는 모양이다. 뭐, 인간 외의 존재를 요괴로 규정하면 틀린 말은 아닐지도….


"그 요괴 참 성질이 고약하지 않아? 오죽하면 히에다 가의 환상향 연기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겠어. 인간우호도도 최악이고."


그건 아니다. 유카가 성격이 나쁘다니?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어떻게든 저 소녀에게 부정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행히 내 노력이 빛을 발해 나의 몸은 아주 조금 좌우로 움직였다.


"응? 아니라고? 하긴, 저 요괴는 꽃에게는 한없이 친절하니까. 형씨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을 수 도 있겠군. 뭐, 형씨의 견해가 그러하다면 더는 말하진 않지. 사람은 각자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까 말이야." 


소녀는 하핫, 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노를 저어갔다. 




그 후로 나는 염마를 만나서 재판을 받고 명계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지금까지 별 일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지만, 다른 유령들과는 달리 최대한 빨리 전생하려고 애쓰고 있다. 물론 나는 사람으로 전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꽃으로 전생하여,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만나보고 싶다. 꽃을 사랑하는 요괴, 사계절의 플라워 마스터, 카자미 유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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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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