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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4.05 악마는 비를 싫어한다

이자요이 사쿠야는 그녀의 주인과 함께 환상향으로 온 지 몇 년이 지나도 늙지 않았다. 언제나 윤기가 흐르는 은발을 휘날리며 얼룩 하나 없는 단정한 메이드복을 입고 뭇 남성들을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용모를 자랑하던 완벽하고 소쇄한 메이드. 몇 없는 인간 친구였던 하쿠레이 레이무나 키리사메 마리사, 코치야 사나에가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에도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마리사가 얼굴에 생긴 주름을 매만지며 사쿠야에게 부러운 듯 말한 적이 있다.

너는 여전히 소쇄하구나.”

사쿠야는 말없이 웃었다.

왜 그녀는 늙지 않을까.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논리를 펼쳤다. 시간을 멈추기 때문에 자신의 시간조차 멈춘 것이다. 사실 다른 사람처럼 늙었는데 어떻게든 완벽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 감추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미 우리가 알던 이자요이 사쿠야는 죽었고 지금 돌아다니는 사람은 2대째 사쿠야라는 음모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하쿠레이 레이무가 노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전혀 늙지 않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결국 한참 전에 레밀리아가 사쿠야를 흡혈귀로 만들었다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사쿠야가 얼마나 자신의 주인을 지극히 모시는지, 레밀리아가 얼마나 자신의 종자를 끔찍이 아끼는 지 환상향에 거주하는 인요라면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오후. 안개 때문에 멀리 보이지 않아 눈을 찌푸리며 앞을 보고 있던 문지기 홍 메이링은 천천히 들려오는 발소리에 긴장하며 전방을 주시했다. 그러나 눈에 익은 은발의 메이드가 보이자 긴장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몇 시간 전에 인간 마을에 장을 보러 가신다더니 조금 늦게 오셨네, 메이링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다녀오셨어요. 조금 늦으셨네요.”

. 수고가 많구나. 메이링.”

사쿠야는 상쾌한 미소로 답례를 해 주었다. 잠시 그녀를 지켜보던 메이링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사쿠야씨! 왜 다 젖었어요?”

왜라니? 비 오는 날에 옷이 젖는 건 당연하잖니.”

그렇지만 평소엔 안 젖었잖아요!”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에 우산도 쓰지 않고 우의도 입지 않은 사람이 물에 젖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사쿠야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시간을 멈추는 정도의 능력을 가진 그녀의 능력이라면 비 오는 날에도 거의 젖지 않은 채로 외출할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했다. 비에 젖은 사쿠야라니, 메이링이 수년간 홍마관의 문지기를 하면서 본 적 없는 광경이다.

오랜만에 비를 맞고 싶어서 그랬어.”

그러나 사쿠야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굉장히 편안한 어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금방 속아 넘어갈 듯한 빼어난 연기. 하지만 기를 읽을 수 있는 메이링은 쉽사리 속지 않았다.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러나 본인이 그렇다고 말하니,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메이링에게 인사를 건넨 사쿠야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현관을 지나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홍마관 안에서 각자의 일을 하던 요정 메이드들이 그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관인 사쿠야가 혼자서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을 멈출 수 있는 그녀는 항상 시간을 멈춘 채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같이 있지 않은 이상,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오늘까지는.

자기들끼리 뒤에서 수군거리던 요정 메이드들은 급히 제비뽑기를 하여 대표를 한 명 선출했다. 재수 없게 걸린 한 요정이 투덜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기, 사쿠야님!”

? 무슨 일이니?”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사쿠야는 잠시 그 요정을 바라보다가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모퉁이에 숨어 이쪽을 보고 있는 요정들이 있었다. 하여간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들이라니까. 평소에는 일도 안 하고 자기들끼리 장난만 치는 요정들의 모습이 짜증나기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꼭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였다.

오늘따라 걷고 싶어서 그렇단다.”

대표로 나선 요정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쿠야는 잠시 무릎을 굽혀 그 요정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다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젖은 옷을 벗고 말끔히 목욕재계를 한 뒤 거울 앞에 섰다. 머리를 단정히 빗고 메이드복을 단정하게 입은 뒤 마지막으로 메이드용 헤드 드레스를 쓰는 것으로 몸단장을 마무리했다. 평소에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사쿠야지만, 오늘만큼은 더욱 완벽하게 하려는 듯 잘못된 점이 없는지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홍마관의 가장 높은 곳으로 향했다.

레밀리아의 방 앞에 도착하자 먼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고 규칙적인 노크 소리가 두 번 울려 퍼졌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다시 두들겼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사쿠야는 세 번째로 방문을 두드리는 대신 큰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일어날 시간입니다.”

일어났어.”

그제야 안에서 대답이 들렸다. 사쿠야는 레밀리아의 목소리가 방금 잠에서 깬 목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역시 알고 있는 것일까. 사쿠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완벽하고 소쇄한 메이드의 얼굴로 돌아가 방문을 열었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레밀리아 스칼렛의 등이 보였다. 언제나 위엄 있게 펼쳐져 있던 날개가 축 늘어져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난 비가 싫어.”

레밀리아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물론 흡혈귀가 비를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흡혈귀는 태생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종족이지만, 그만큼 약점도 많았다. 마늘, 정어리 머리, 부러진 호랑가시나무, 볶은 콩 같은 것들이 모두 흡혈귀의 약점이었다. 여기에 햇빛과 더불어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흐르는 물이었다. 흐르는 물은 흡혈귀에게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흡혈귀는 강이나 바다를 건널 수 없었고 비가 오는 날에는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전형적인 흡혈귀인 레밀리아가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긴 하죠.”

당연히 사쿠야 또한 레밀리아가 비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무언가 달랐다. 아무리 비가 오는 날이라 해도 이렇게 레밀리아가 축 늘어진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완벽하고 소쇄한 종자로서 주인의 기분을 좋지 않은 상태로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저와 아가씨가 처음 만난 날도 비가 오는 날이었잖아요. 첫 만남과 같은 날씨라니, 로맨틱하지 않나요?”

사쿠야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 그들이 환상들이 하기 전, 바깥 세계에서 레밀리아와 처음 만났던 그 날을. 그 날도 오늘처럼 비가 세차게 쏟아지던 날이었다.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두 인요는 서로를 향해 웃었고, 전력을 다해 격돌했다.

그야 네가 날 잡으려고 작정했으니까 비 오는 날을 골라서 쳐들어 온 거잖아.”

부정하진 않을게요.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맞잖아요.”

나 잡으려고 비 오는 날에 찾아온 놈들이 세 자리가 넘는다.”

과거에 한 이름 날렸던 악마사냥꾼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이기 위해 사냥꾼들은 한낮이나 비 오는 날에 악마의 본거지로 쳐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그렇게 해도 레밀리아를 쓰러뜨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그래서 전 비가 좋아요. 아가씨와 만나게 해 준 고마운 날씨니까요.”

그래도 난 싫다. 싫은 건 싫은 거야.”

멍하니 앞을 보던 레밀리아가 손바닥을 펴더니 작은 창을 만들었다. 어리둥절한 사쿠야가 말리기도 전에 창문을 향해 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창문이 깨졌고 틈새를 통해 비가 들어왔다. 자연스레 창가에 앉아 있던 레밀리아의 손등에도 빗물이 묻었다. 순간 작은 소음과 함께 피부가 녹아내렸다. 깜짝 놀란 사쿠야가 재빨리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호들갑 떨지 마. 조금 따가운 정도니까.”

사쿠야는 레밀리아의 의자를 뒤로 당겨 빗물이 들어오는 범위 밖으로 꺼낸 뒤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빗물과 피로 범벅이 된 손등을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조금씩 닦아내자 안쪽에서 새하얀 뼈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안쪽에서부터 새살이 올라오고 있었다.

금방 재생될 텐데.”

그녀의 말처럼 상처는 곧 회복되었다. 흡혈귀는 약점이 많지만, 그 약점에 잠깐 노출된 정도로 죽지 않는다. 만약 강력한 재생력이 없었다면 이미 흡혈귀는 멸종되었을 터. 그들은 쉽게 죽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종족이었다.

오늘따라 빠르게 움직이는구나. 사쿠야.”

……아가씨가 부상을 입으셨는데 느릿느릿할 수는 없죠.”

그래. 빨리 움직여야지. 그래야 내 종자답지.”

순간 사쿠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려왔다. 그녀는 잡고 있던 레밀리아의 손을 놓고 자신의 손을 뒤로 감추었다.

아가씨. 오늘따라 이상하시네요.”

글쎄. 난 그저 비를 맞아보고 싶었을 뿐이야. 우리가 처음 만난 날처럼.”

자신이 했던 말을 인용해서 대답하자 사쿠야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다. 대신 재생이 끝난 손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고통을 느끼고 싶으신 건가요? 아가씨는 그런 취향이 아니었잖아요.”

가끔은 나도 그런 취향이 되는 날이 있어. 대략 500년에 한 번 정도?”

난생처음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레밀리아가 오늘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미소였다. 사쿠야는 떨리는 두 손을 꽉 잡았다. 레밀리아의 시선이 사쿠야의 다리에 머물렀다가 팔을 거쳐 다시 눈으로 향했다.

그런데 사쿠야. 왜 나이프는 하나도 안 차고 있는 거야?”

저도 나이프를 가지지 않고 다니는 날이 있답니다. 대략 100년에 한 번?”

태어나서 처음이라는 말이군.”

아가씨처럼요.”

둘 다 첫 경험인가? 두근거리는데.”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사쿠야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 상태에서 사쿠야의 눈을 바라보자 자연히 레밀리아가 사쿠야를 올려다보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곧바로 사쿠야가 무릎을 꿇어 높이를 맞췄다. 두 인요가 같은 높이에서 서로의 눈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레밀리아는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를 보았고, 사쿠야는 반쯤 감긴 붉은 눈동자를 보았다.

인간들을 첫 경험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잖아? 나도 그런 기분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서 굉장히 기쁜걸.”

축하해요. 아가씨. 저도 모처럼 가슴이 뛰네요.”

레밀리아가 웃었다. 사쿠야도 따라서 웃었다. 두 인요는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겨우 웃음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쿠야는 무릎을 가볍게 털고 나서 방을 나섰다.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레밀리아에게 인사를 하는데, 레밀리아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사쿠야.”

. 아가씨.”

지금 행복하니?”

잠시 아무 말을 하지 못하던 사쿠야는 오늘 가장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행복해요.”

……그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는 사쿠야를 부르지 않았다.

 

 

레밀리아의 방에서 나온 사쿠야는 복도를 계속 걸었다. 가는 길마다 요정 메이드들이 그녀를 보고 쑥덕거렸으나 정작 본인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발걸음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홍마관에서 가장 낮은 곳이었다.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방 하나. 마치 남에게 보여주면 곤란한 것이라도 있는 듯 깊숙이 숨겨진 곳이었다.

육중한 철문을 밀자 쇠와 벽돌이 갈리며 나는 마찰음이 사쿠야의 귀를 긁었다. 불빛 하나 없는 방 안에 성한 물건은 커다란 침대 하나뿐이었다. 그 외에는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서지고 찢어진 잔해들만이 가득했다. 사쿠야가 눈을 찌푸리며 침대 쪽을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이상함을 느끼고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녀의 목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끼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장난은 그만두세요. 작은 아가씨.”

아깝다. 한 발만 더 디뎠다면 목이 툭 하고 날아갔을 텐데.”

서늘한 기운이 사라지자 사쿠야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 손에 붉게 타오르는 검을 쥔 플랑드르 스칼렛이 있었다. 오색창연하게 빛나는 날개를 흔들던 플랑드르가 도약하자 순식간에 문 앞에서 침대까지 이동했다.

재미없어. 재미없다구. 밖에는 비도 오고.”

어쩔 수 없지요.”

장난에 금방 염증을 느끼고 침대에 누워서 바동거리는 플랑드르를 보자 사쿠야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분명 평소의 작은 아가씨다. 다소 축 늘어지긴 했지만 그건 바깥에 비가 오기 때문이겠지.

그런 작은 아가씨를 위해 특별히 향림당에서 사탕을 사왔답니다.”

침대에서 사쿠야의 앞으로 이동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마치 새로운 마도서를 발견한 마리사처럼 눈 속에 별빛을 담고 사쿠야를, 아니 정확히는 사쿠야가 손에 든 봉지를 바라보는 플랑드르였다.

사탕! 사탕! 사탕!”

자자, 사탕은 없어지지 않으니까요. 천천히 드세요.”

향림당에서 비정기적으로 판매하는 바깥세계의 사탕은 환상향에서 굉장히 인기가 높은 품목이었다. 향림당의 점주 모리치카 린노스케는 뛰어난 발명품들이 아니라 고작 설탕 덩어리에 불과한 이 물건이 가장 인기가 많은 상품이라는 사실에 한숨을 내쉬곤 했지만, 손님들은 사탕 언제 들어오느냐고 성화를 부릴 뿐이었다. 사쿠야는 나름 향림당의 단골이었기 때문에 미리 예약해놓을 수 있었고, 타이밍 좋게 오늘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탕이 그렇게 좋으신가요?”

! 내 귀생 최고의 즐거움이야!”

양손 가득 사탕을 들고 씹어 먹느라 정신이 없는 플랑드르를 사쿠야는 포근하게 웃으며 지켜보았다. 문득 생각이 떠오른 사쿠야가 플랑드르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오늘같이 비 오는 날이 싫으신가요?”

?”

양 볼이 터지도록 사탕을 물고 있던 플랑드르가 급하게 사탕을 깨물었다. 잠시 천장을 보고 생각하면 플랑드르는 이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물론 싫어!”

그런가요…….”

하지만 이렇게 사쿠야가 사탕을 사오는 날이라면, 좋아!”

그녀는 의외라는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플랑드르의 해맑은 미소에서 진심을 읽은 사쿠야도 따라서 웃었다.

그렇군요. 고마워요. 작은 아가씨.”

그러나 사쿠야의 미소는 조금 전에 레밀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미소였다.

 

이번에는 플랑드르가 갇혀 있는 지하실보다는 조금 위에 있는 대도서관으로 향했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마녀 파츄리 널릿지가 그녀를 맞이했다. 전에 만났던 두 사람과는 달리, 파츄리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앞에 놓인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사쿠야?”

내일 아침까지만 해주세요. 환상향 최고의 마법사시잖아요.”

아무리 내가 대마법사라고 해도 환상향 전역에 비를 내리게 하는 건 힘들어.”

분명히 파츄리는 환상향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의 마법사다. 특히 속성을 다루는 마법에서는 그녀를 따라올 마법사가 없었다. 앨리스는 인형술의 대가이고, 뱌쿠렌은 자기 강화 마법에 특화된 마법사였다. 마리사는 고화력 중심의 마법을 연구하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는 파츄리를 따라올 마법사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환상향 전체에 비를 내리게 하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죄송해요. 그래도 제가 이렇게 개인적인 부탁을 하는 건 처음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지금까지 파츄리가 사쿠야에게 무얼 사오라고 부탁하거나 알아보라고 시킨 적은 많았지만 사쿠야가 직접 파츄리에게 사적인 일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해주겠다고 해도 거절하던 사쿠야다. 모처럼 해준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저번에 빌려주신 책 잘 읽었어요. 갖고 온다는 걸 깜빡했네요. 제가 지금 다시 외출해야 해서 그런데 좀 가져가 주시겠어요?”

오늘은 참 여러 가지를 부탁하는구나. 그래. 이런 날은 처음이니까. 나중에 소악마를 보낼게.”

아뇨. 파츄리님이 직접 해주세요.”

파츄리가 고개를 홱 돌려 사쿠야를 노려보았다.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움직이지 않는 대도서관이라는 별명이 붙은 마녀를 움직이려 하다니, 그녀의 절친한 친구 레밀리아조차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사쿠야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파츄리는 깜짝 놀랐다. 그 어느 때보다 사쿠야의 눈빛은 진지했다. 자신의 의지를 꺾을 수밖에 없는 눈빛이었다.

알았어. 내가 갈 게. 가면 되잖아.”

감사합니다. 파츄리님.”

다시 환하게 웃는 사쿠야를 보며 괜한 짓을 했나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 파츄리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가시게요?”

햇빛이 있는 동안 건초를 만들라고 하잖아.”

그럼, 1층까지는 같이 갈까요?”

두 인요는 천천히 홍마관을 걸었다. 복도를 거닐던 요정 메이드들의 눈이 두 배로 휘둥그레졌다. 복도를 걸어 다니는 메이드장과 마녀라니. 항상 홍마관에서 시간을 멈추고 다니는 사쿠야와 도서관에서 나오지 않는 파츄리였는데. 요정 메이드들은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을지 심각하게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1층으로 올라온 사쿠야가 걸음을 멈추고 옆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걷고 있던 파츄리도 자연스레 그쪽을 바라보았다. 홍마관에 몇 없는 창문이 있는 장소였다. 세찬 비가 창문에 부딪치며 자신의 몸을 망가뜨리는 광경을 사쿠야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비의 상태를 보고 있는 것일까. 파츄리는 자신의 마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가 걱정이 들었다.

좀 더 세게 내려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 정도면 문제없어요.”

고개를 내젓는 사쿠야의 표정을 보아하니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렇다면 왜 비를 보고 있지? 파츄리도 사쿠야를 따라 뚫어지게 비를 바라보았다.

빗소리만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비를 보고 있자니 조금 감성적인 기분이 들었다. 파츄리는 모처럼 옛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와 레밀리아가 처음 만난 날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었지.”

파츄리님도요?”

. 물론 그때도 내가 마법으로 내리게 한 비였지만 말야. 다짜고짜 쳐들어오기에 비를 뿌려줬어.”

그때나 지금이나 정말 못 말리는 녀석이야, 하고 파츄리가 그리운 듯 덧붙였다. 어느새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는 두 친우의 관계란, 정말 특별한 것이겠지. 사쿠야는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동시에 약간의 질투심이 들었다.

우리 홍마관 식구들은 다들 비가 오는 날에 아가씨랑 만났군요. 메이링도 비슷한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쟤는 그냥 의식주를 제공해준다고 하니까 좋다고 온 게 아닐까?”

두 인요가 함께 킬킬거렸다. 지금쯤 문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의 귀가 제법 가려울 것이다. 그것도 양쪽 다. 내친김에 낮잠을 너무 많이 자니 근무태만이니 허구한 날 마리사에게 뚫리니 하며 메이링의 뒷담을 계속했다.

그렇게 창문 앞에서 한참을 떠들다가 갑자기 사쿠야가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회중시계를 꺼내 보는 게 아닌가. 떨리는 손에서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느껴졌다.

왜 그래, 사쿠야. 괜찮아?”

한 번도 본 적 없는 메이드장의 이상한 행동에 파츄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사쿠야는 손을 내저었으나 여전히 낯빛이 좋지 않았다.

괜찮아요. 시간이 지체된 거 같으니 슬슬 가죠.”

대화를 멈춘 두 인요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파츄리가 계속 사쿠야를 힐끔 쳐다보았으나 사쿠야는 조용히 갈 길을 재촉했다. 이윽고 목적지인 계단 앞에 도착했다. 파츄리는 이 계단을 올라가야 했고, 사쿠야는 계단을 지나 현관으로 가야 했다. 파츄리가 먼저 계단을 올라가며 사쿠야에게 말했다.

몸 상태가 안 좋으면 너무 무리하지 마. 레미한테 일러둘까?”

아뇨. 아가씨에겐 말해주지 말아 주세요. 걱정을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역시나. 파츄리가 예상했던 대답이 들렸다. 파츄리도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기에 그녀를 향해 손을 한 번 흔들고 사쿠야의 방으로 향했다. 계단 앞에 서서 파츄리가 올라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사쿠야는 몸을 돌렸다.

…….”

지금까지 참아왔던 격통이 그녀를 덮쳤다. 조금 전 파츄리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억지로 참았지만, 슬슬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숨이 턱턱 막혔으나 벽을 잡고서라도 걸었다.

마침내 저 앞에 현관이 보였다. 사쿠야는 메이링이 보일 만큼 앞으로 갔다. 붉은 머리카락이 장식하고 있는 초록색 등이 보이자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보니 또 졸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쿠야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보는 모습이 졸고 있는 모습이라니, 정말 메이링다웠다.

사쿠야는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진 벽과 광적일 만큼 붉은색 장식으로 치장된 자신의 집을. 친구들은 이 집을 볼 때마다 주인 놈의 악취미라며 비웃었지만 사쿠야는 이 집을 사랑했다.

친구들, 인가.”

먼저 간 레이무와 사나에가 떠올랐다. 이제 남겨질 마리사를 떠올렸다. 평범한 인간들에겐 요괴로, 요괴들에겐 특이한 인간으로 취급받던 자신과 같은 처지의 친구들. 요괴와 인간의 경계에서 마지막에는 인간으로 끝을 맺은 친구들. 이제 사쿠야의 차례였다.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회중시계의 초침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멈출 듯한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이미 시침과 분침은 멈춘 지 오래였다.

아가씨. 작은 아가씨. 파츄리님. 메이링.”

사쿠야는 자세를 바로잡고 허리를 굽혔다. 양쪽 스커트를 잡고 우아하게, 공손하게.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마음을 담아.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사쿠야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시간을 멈췄다.

 

 

 

무언가를 느낀 메이링이 잠에서 깨어났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 현관 안쪽을 살펴보았으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잘못 느낀 건가. 하지만 어딘가 모를 찜찜함이 가슴 한구석에서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메이링은 조만간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 직감했다.

 

사탕을 먹던 플랑드르가 갑자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봉지 안에 들어 있던 모든 사탕이 가루가 되었다. 멍하니 부서진 사탕을 보다가 플랑드르 자신도 깜짝 놀랐다. 왜 갑자기 능력을 썼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사쿠야의 방에 도착한 파츄리는 책상에 놓인 책을 들다가 그 자리에 놓여 있던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를 읽은 파츄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알고 있는 신체 강화 마법을 전부 자신에게 걸었다. 그리고 수부를 응용해 비에 젖지 않게 물방울로 자신을 감싼 뒤 급히 홍마관을 나섰다.

 

깨진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비를 계속 바라보던 레밀리아는 다시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빗물은 그녀의 손등을 파고들어 깊은 상처를 남겼다. 흘러내린 피는 바닥에 고인 채로 꿈틀거렸다. 그녀는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두 날개를 활짝 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흡사 피가 서린 듯했다.

 

 

 

파츄리가 급히 도착한 곳은 홍마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물길 이었다. 그러나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물이 넘쳐흘러 큰 강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반대편에, 이자요이 사쿠야가 누워 있었다. 파츄리는 재빨리 강을 건너 사쿠야에게로 달려갔다.

편안하게 누워있는 사쿠야의 가슴에 귀를 대 보았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코에 손을 갖다 대었다. 공기가 움직이는 느낌이 나질 않았다. 파츄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쿠야가 남긴 쪽지를 봤을 때 겨우 참았던 감정이 속에서 들끓었다.

파츄리님. 이렇게 쪽지로 알려 드리는 것을 부디 용서하시길.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말할 용기가 나질 않았고, 또 아가씨가 엿들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죽으러 갑니다. 인간으로서 수명이 다 되었음을 직감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제가 죽는 걸 그냥 놔두지 않겠지요. 아마 저를 흡혈귀로 만들 거에요. 물론 저는 아가씨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인간으로서 죽고 싶습니다. 그걸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파츄리님 뿐입니다. 아가씨가 오지 못하는 빗속, 강 건너에 있는 제 시체를 태워주세요.”

비와 함께 흐르는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마음을 다잡은 파츄리는 하늘에 있는 먹구름을 조종해 사쿠야의 시신이 있는 부근만 비가 내리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자 그 부분에만 햇볕이 내리쬐게 되어, 마치 하늘에서 천사가 강림한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악마의 종자가 죽는데 천사가 데리러 오다니, 이런 기묘한 모순이 또 어디 있겠는가. 파츄리는 쓰게 웃었다.

그럼. 웃기는 일이지. 악마의 종자는 악마가 데리러 와야 하지 않겠어?”

순간 파츄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절대 헷갈리지 않을 목소리였건만, 오늘만큼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여기서는, 절대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였다.

안 그래, 파체?”

그러나 그 목소리가 자신의 애칭을 불렀을 때, 파츄리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홍마관의 마녀. 지식과 그늘의 소녀, 움직이지 않는 대도서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의 근원, 화담의 마법사. 자신을 지칭하는 수많은 명칭이 있었지만, 그녀를 파체라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레미, 어째서……!”

친우의 모습을 확인한 파츄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 있는 흡혈귀의 모습이란 상상 이상이었다. 빗방울이 하나하나 몸에 닿을 때마다 살이 녹아내렸다. 끊어진 혈관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재생되었고 돋아난 살과 피는 또다시 흘러내렸다. 레밀리아가 걸어온 길은 살점과 피가 뒤엉겨 끔찍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운명을 보았지. 근데 날아오다가 날개가 다 녹아서, 걷다 보니 좀 늦었네.”

언제나 자랑스럽게 펼치던 두 날개도 지금은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뭉개져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계속 걸어왔단 말인가. 파츄리는 레밀리아가 빗속에서 서 있는 걸로도 모자라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사실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 그래. 네 능력을 잊고 있었구나. 아니, 그것보다, 대체. 안 아파?”

말을 더듬던 파츄리가 힘들게 질문을 내뱉었다. 같이 살게 된 이후로 처음 보는 친우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레밀리아는 웃었다.

아프지. 엄청 아파. 죽을 만큼 아파.”

레밀리아가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이윽고 강 앞에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세차게 흐르는 강을 건널 엄두는 나지 않는지 거기서 더 앞으로 오진 않았다.

하지만, 사쿠야는 더 아팠을 거야. 죽을 만큼 아프다 해도, 죽는 것보다 아프지는 않을 테니까.”

그녀는 잠시 강을 살펴보았다. 지금도 아파 죽을 것만 같은데, 강에 뛰어들게 된다면 어떨까. 상상도 하기 싫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홍마관에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몸을 말리고 의자에 앉아 사쿠야가 타주는 홍차를…….

사쿠야는 나 때문에 더 일찍 죽었어. 다른 인간들처럼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겼으면 되었을 것을, 내가 완벽하고 소쇄한 종자라는 이명을 붙여줬기 때문에 언제나 완벽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사용해 노화조차 막은 거야. 고작 그런 것 때문에!”

힘찬 도약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었다. 빗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속도로 흐르는 강물은, 상상 이상이었다. 레밀리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늘을 가득 메우는 고함과 함께,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다. 발이 없어지면 무릎으로, 무릎이 타 들어가면 손으로, 손이 떨어져 나가면 팔로, 팔마저 녹아내리면 다시 재생된 발로.

사쿠야의 옆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파츄리의 앞에, 레밀리아가 천천히 강에서 기어 나왔다. 뭉개진 전신의 모습은 이게 레밀리아라는 흡혈귀인지 알아보기도 힘든 수준이었다. 아니, 살아 있는 생물이기는 한 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빌어먹을. 내가 다시는 이 짓거리 안 한다.”

어느새 발을 재생한 레밀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파츄리가 비를 뿌리는 것을 멈추고 모든 마력을 모아 여섯 빛깔의 현자의 돌을 주변에 띄웠다. 영롱하게 빛나는 현자의 돌은 금방이라도 강력한 마력을 내뿜을 것만 같았다.

레미. 넌 내 친구지만, 사쿠야도 소중한 친구야. 친구의 마지막 부탁을 헛수고로 만들 순 없어!”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파체.”

찰나의 순간, 레밀리아는 파츄리의 앞에 서 있었다. 파츄리가 반응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레밀리아의 손톱이 번뜩였고, 현자의 돌은 두 동강이 난 채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파츄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지근거리에 접근한 이상 네게 승산은 없어.”

망연자실한 표정의 파츄리를 놔두고 레밀리아는 천천히 사쿠야에게 다가갔다. 비에 젖은 사쿠야의 시체를 보자 그 날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사쿠야와 만날 그 날. 빗속에서 서로 웃으며 싸우던 그 날을. 사실 그녀는 오늘 사쿠야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부터 이미 그 날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 날도 오늘처럼 비가 왔었지. 사쿠야.”

그리고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고, 종자로 삼았다. 너는 말했지.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나는 항상 비 오는 날을 싫어했어. 당연하지. 흡혈귀니까. 너와 만나기 전에는 비가 조금만 와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잠만 잤단다. 하지만 너와 만난 이후로는 나도 비를 조금씩 좋아하려고 노력했어. 너는 항상 비를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사쿠야의 목을 쓰다듬었다. 아직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전히 새하얀 살결은 물어뜯기 딱 좋은 상태였다. 레밀리아는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대었고, 파츄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너는 비 오는 날에 태어나, 비 오는 날에 가는구나.”

불길이 피어올랐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사쿠야를 금방 집어삼켰다. 시체를 태운 불꽃은 더이상 태울 것이 없어지자 금방 사그라졌고, 그 자리에는 그을린 회중시계만이 있을 뿐이었다. 레밀리아는 허리를 굽혀 회중시계를 집어 들었다.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조금씩 비치기 시작했다. 파츄리는 레밀리아의 옆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얼굴에 물방울이 묻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미. 우는 거야?”

그냥 비야.”

비는 이미 그쳤는데.”

레밀리아는 파츄리를 쳐다보지 않은 채로 담담히 말했다.

악마는 울지 않아.”

그렇구나.”

그녀의 말을 들은 파츄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금방 마음을 가다듬은 파츄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악마라 해도 소중한 이를 잃는다면 울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레밀리아가 손에 든 회중시계를 열었다. 수명이 다 되었는지 이미 멈춘 뒤였다. 그녀는 시계에 새겨진 시간을 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럴지도.”

 

 

 

이자요이 사쿠야가 죽었다. 시체가 없었기에 빈 관을 가지고 간단히 장례를 치렀다.

그녀의 장례식에 수많은 인요들이 찾아왔다. 홍마관의 마당을 인요들이 가득 메웠으나 그중에 그녀의 주인이자 홍마관의 주인인 레밀리아 스칼렛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동생인 플랑드르조차 그녀의 관을 안고 펑펑 울고 있었는데.

장례식은 홍마관에 거주하는 마녀 파츄리 널릿지의 주관 아래 무사히 끝났다. 늙은 몸을 이끌고 온 키리사메 마리사는 이제 친구들이 모두 갔다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이를 갈며 홍마관의 가장 높은 곳을 쳐다보았으나 홍마관의 주인은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다시 비가 내렸다. 레밀리아는 자신의 방에 앉아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직 고치지 않은 창문을 통해 비가 들어왔다. 그녀는 손을 뻗어 비를 잡았다. 살점과 피가 한데 엉겨 괴기하게 녹았다.

아파.”

그래도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손이 녹고, 재생되고, 다시 뭉개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을 계속 지켜보기만 하였다. 이 정도는 사쿠야가 느꼈던 고통에 비하면, 사쿠야를 잃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 비가 싫어.”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레밀리아는 홀로 중얼거렸다.

난 비가 좋아.”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활짝 웃었다.

 

그 뒤로 문지기였던 홍 메이링이 홍마관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호칭은 여전히 문지기였고, 레밀리아가 외출할 때 같이 다니지도 않았다. 홍마관에서 메이드장이라는 이름이 다시 쓰이는 일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비 오는 날이면 사쿠야의 무덤 근처에서 레밀리아를 볼 수 있다는 괴소문이 퍼졌다. 피를 철철 흘리며 가만히 서 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은 믿지 않았다. 흡혈귀가 어찌 흐르는 물 아래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소문이 퍼지면 호기심이 강한 누군가가 조사해보기 마련이다. 참지 못한 누군가가 레밀리아에게 가서 직접 물어보았다. 레밀리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난 비가 좋아.”

 

 

 




2015년에 쓴겁니다. 몇월에 썼는지는 잘...

선배님이 주최하신 팬픽 대회에서 2등 했었네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제가 지금까지 쓴 동방프로젝트 팬픽 중에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작품이 아닌가 하네요.

마지막에 파츄리와 레밀리아가 나누는 대사는 Devil may cry 3 엔딩에서 단테와 레이디가 나누던 그 대사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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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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