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돋보이는 어느 가을 오후,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광장에는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짧은 갈색 머리를 흰 띠로 동여매고 꽃으로 장식한 모습은 마치 꽃의 화신과도 같았다. 그러면서도 배꼽과 허벅지를 훤히 드러낸 의복을 입어 자신의 활발한 성격을 말하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소녀는 시선을 돌려 광장 구석에 있는 화단을 바라보았다. 갖은 꽃들이 자신의 아름다운 색을 뽐내며 사람들의 눈을 끌고 있었다. 연분홍빛 코스모스, 샛노란 국화, 피처럼 붉은 석산 등.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꽃을 하나씩 둘러보던 소녀의 눈동자가 문득 한 곳에서 멈추었다. 그곳에는 수수한 보랏빛을 자랑하는 라벤더가 있었다.

말없이 라벤더를 지그시 바라보던 소녀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라벤더가 적잖이 마음에 들었다. 아마 보랏빛을 띤 라벤더가 그녀의 머리색과 닮았기 때문이겠지. 문득 소녀는 그녀를 떠올렸다. 이곳에서 기다리는 그 사람. 언제나 짧은 보랏빛 머리카락을 흔들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미안! 오래 기다렸어?”


뒤쪽에서 목소리와 동시에 거칠고 작은 손이 소녀의 어깨에 살포시 닿았다. 소녀는 금방이라도 환한 미소와 함께 그녀를 맞이하고 싶었으나, 여기서는 좀 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미소를 억누른 채 일부러 짐짓 화난 표정을 짓는다. 어쨌든 그녀가 잘못했으니까. 한마디 해야지.


늦어!”


고개를 돌려보자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역시나 짧은 보라색 머리였다. 잘 정돈된 소녀와는 달리 다소 헝클어지고 땀에 젖은 머리는 그녀가 급하게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팔과 손목에 걸린 팔찌와 붉은 스커트에 달린 장식들은 연신 짤랑거리며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활동적이지만 정돈된 모습인 소녀와는 달리, 보라색 머리의 그녀는 역동적임 그 자체였다. 그녀의 움직임은 하나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아하하. 미안, 미안해. 미아. 공연이 늦게 끝나서 그만. 팬들이 자리를 안 비켜주더라니까.”


미아라 불린 소녀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크게 볼을 부풀렸다. 하여간 이 여자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다.


보나 마나 또 쏟아지는 앵콜 요청을 이기지 못하고 다 들어줬구나. 내 말 맞지, 리첼?”


리첼은 미아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정말 거짓말도 못 해요. 너무나도 귀여운 그 모습에 미아의 기분이 조금씩 풀어졌다. 결국 참지 못하고 미소가 터져 나오자 리첼의 얼굴도 덩달아 밝아졌다.


하여간 길거리에서 통기타 칠 때부터 그렇더니, 아직도 못 고쳤어? 우리 락스타 리첼님?”


문득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리첼이 아직 무명의 가수이던 시절, 이 광장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때가. 동료인 미쉘과 만나기 위해 광장을 지나가던 미아는 그 소리에 매료되어 공연 내내 멍하니 리첼을 바라보았다. 그게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사람들이 내 노래를 좋아해 준다는 거잖아. 어쩔 수 없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 연신 미아의 눈치를 살피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니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데이트 할 시간이 아까우니까.

미아의 눈치를 보던 리첼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화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자신을 용서하는 척하면서 분위기를 이끌어 나갈까 고민하는 저 모습이 귀여워서 절로 미소가 나왔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한결같이 순수할까. 리첼에게 있어 미아는 순수 그 자체였다.


하여간 거리에서 노래할 때가 더 좋았다니까. 그땐 나만의 뮤지션이었는데.”


미아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연인의 성공은 정말 기쁜 일이지만, 성공한 만큼 함께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때론 기뻤지만, 때론 슬프기도 했다.

연인의 불평에 리첼은 말없이 미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꽃을 한 송이 꺼내 미아의 손에 쥐여주었다. 화단에 피어있던 라벤더와 색깔이 비슷한 보라색 꽃이었다. 멍하니 꽃을 바라보던 미아가 환하게 웃었다.


도라지꽃이네.”

. 나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꼭 가지고 다녀.”


미아는 꽃을 꽉 끌어안았다. 꽃과 식물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꼭 알맞은 선물이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라벤더는 머릿속에서 지운 채, 그녀는 도라지꽃만을 기억했다.

 




2015. 11. 03. 

서유님 생일 축하드려요!

작중 등장한 보라색 꽃들의 꽃말을 찾아보시면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짧은 분량을 부디 용서해주시길... 그래도 올해는 시간은 맞췄잖아요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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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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