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중천에 뜬 야심한 시각. 화려한 건물에서 한 무리의 회사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들 퀭한 몰골에 걸음도 불안정했다. 하루이틀 야근을 한 폼이 아니다. 가장 뒤에서 걷고 있던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회사원의 얼굴에는 다크서클이 짙었다.

문득 앞에 있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덕분에 가장 뒤에서 걷던 회사원은 앞서 걷던 회사원의 등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픈 머리를 매만지며 소리를 치려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회사원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들을 제치고 앞으로 갔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길게 기른 은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서 있는 미남자의 얼굴은 웬만한 여성들이 울고 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강렬한 남성미가 존재했다. 지나가던 여성들은 그 얼굴을 보며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고 남성들은 불타는 질투심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짜증이 폭발한 누군가 달려들 법도 하지만, 범접하기 힘든 날카로운 분위기와 더불어 허리에 차고 있는 두 자루의 칼을 보자 그 누구도 선뜻 나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지루한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다가 앞으로 나온 회사원을 보자 고개를 들고 다가왔다.

.”

자신의 이름이 불린 릭 톰슨은 슬며시 웃었다. 환영의 의미였건만 피곤함에 절여 있는 채로 미소를 짓자 상당히 괴기한 표정이 나왔다. 주변의 회사원들이 숨죽여 웃었지만, 미남자는 웃지 않았다.

아니, 벨져. 여기는 어쩐 일로 왔소.”

변덕이다.”

벨져 홀든이 즉각 대답했다. 릭은 크게 웃었다. 아까보다는 좀 나은 표정이 나왔다.

그나저나 정말 늦게 나오는군. 회사원이라는 직업은 보통 저녁 즈음에 일이 끝난다고 들었는데.”

보통은 그렇지만, 야근이라는 게 있지. 식사는 했소? 여기서 서 있지 말고 뭐라고 먹으러 갑시다.”

주변의 지나친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방금 일을 마친지라 배가 고프기도 한 릭은 벨져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가게로 갔다. 늦은 시간이라 식당 대부분이 문을 닫은 상태였기에 어딜 가는가 궁금했으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늦은 시간까지 영업하는 도넛 전문점이었다.

뭐든 먹고 싶은 걸 고르시오. 멀리서 왔으니 먹을 건 내가 사야지.”

이것저것 도넛을 고르는 릭과는 달리 벨져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저 입구에 서서 무표정으로 도넛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언가 잘못된 줄 안 종업원이 그의 옆에 와서 물었다.

저기, 손님……? 뭐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런 건 아니다.”

벨져가 짧게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말이 없었다. ‘내가 잘못한 건가?’ 옆에 있던 종업원은 자신이 무얼 잘못한 건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그러자 멀리서 보고 사태를 이해한 릭이 그들의 곁에 다가왔다.

신경 쓰지 마시오. 직원분이 실수를 한 건 아니니까.”

, .”

미심쩍은 얼굴로 종업원이 자기 할 일을 하러 가자 릭이 고개를 숙이고 벨져에게 조용히 물었다.

자네, 혹시 도넛 먹는 게 처음인가?”

네가 먹는 건 본 적이 있지만.”

벨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릭이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명문 귀족집의 후예답게 서민들의 음식인 도넛을 먹어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별수 없이 릭이 벨져의 것까지 골라주었다. 벨져의 입맛을 고려하여 최대한 달지 않은 걸로 골랐으나 한 입 베어먹은 벨져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너무 달아.”

하하, 그 맛에 먹는 거지.”

벌써 세 개째 도넛을 먹어치우고도 모자라 다시 손을 뻗는 릭을 보고 벨져도 다시 도넛을 베어 물었다. 벨져의 눈빛이 절로 흐려졌다.

이런 걸 입에 달고 다니는 건가. 이해할 수 없군.”

자네도 먹다 보면 그 이유를 깨닫게 될 걸세. 그리고 머리 쓰는 데에는 당분이 필요하거든.”

릭의 말을 들은 벨져가 도넛을 노려보았다.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는 도넛은 스스로 몸을 빛내며 그를 유혹했다. 이를 꽉 깨문 벨져는 다시 도넛을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여전히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았지만 제법 괜찮은 맛이 느껴졌다. 천천히 도넛을 다 먹는 벨져의 모습을 보며 릭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때, 맛있지 않나?”

그럭저럭 먹을 만하군.”

입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 낸 뒤 옆에 있던 커피로 손을 뻗었다. 당분으로 가득 찬 입안을 쓴 커피로 달래려고 했으나 한 모금 마시는 순간 곧바로 뱉어냈다. 혀가 본능적으로 커피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렇게 맛없는 커피는 처음이군.”

그야 자네가 평소에 먹던 고급품에 비하면……. 어쩔 수 없네.”

릭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직원의 시선을 살피다가 한 손으로 공간을 열어 물 한 잔을 꺼내왔다. 벨져는 릭에게 컵을 받자마자 바로 입에 털어 넣었다. 끔찍해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안타리우스의 클론들이 끊임없이 몰려오던 디시카의 전투 이후 저 표정은 처음 봤다.

문득 릭은 안타리우스와의 전쟁을 떠올렸다. 전쟁. 그래. 이제는 끝난 전쟁. 예전에는 자주 본 여행지의 풍경을 지긋지긋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이제는 같은 풍경을 몇 번이고 봐도 지겹지 않다. 세상 거 어떤 것도 전쟁보다 지긋지긋하지는 않으리라.

요즘 바쁜가?”

그의 상념 너머에서 벨져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 속에서 빠져나온 릭이 벨져를 보았다. 팔짱을 끼고 지그시 바라보는 폼이 심상치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언제나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벨져의 감정을 읽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저 친구, 제법 화가 나 있군.

하하, 미안하네. 벨져. 회사에서 매일 야근에 특근에, 사람을 제대로 부려 먹는 중이야.”

미국에 사는 릭과 오스트리아에 사는 벨져.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제법 멀었기 때문에 항상 공간능력자인 릭이 벨져를 만나러 갔었다. 벨져는 오기 힘들었지만, 릭에게 그 정도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최근엔 일로 바빠서 벨져를 만나러 가지 못한지가 제법 되었다.

그러게 홀든 가에서 일하라니까.”

재빨리 사과의 말을 건네서 그런지 벨져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릭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했지 않나.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났으니 원래의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제발 야근은 좀 줄여줬으면 좋겠지만, 하고 릭이 덧붙였다.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 벨져도 더는 권할 수 없었다. 그들은 뒤이어 좀 더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윗사람 이야기가 나오자 릭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자신의 상사를 욕했고 벨져는 제레온을 떠올리며 연신 찬양을 늘어놓았다.

이윽고 점원이 와서 폐장할 시간이 되었다고 알려주자 릭과 벨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를 걸었다. 사근사근하게 담소를 나누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높은 건물 앞이었다. 걸음을 멈춘 릭이 뒤를 돌아 벨져를 보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좋은 걸 보여주리다.”

릭이 벨져에게 손을 내밀었다. 벨져는 익숙하다는 듯 릭의 손을 잡았다.

눈 감으시오.”

이제는 릭의 공간이동이 익숙했기에 굳이 눈을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벨져는 그의 말에 따라 눈을 감았다. 낯익은 느낌이 전신을 감싸 안았고, 잠시 뒤 주변의 공기가 바뀌었다. 조금 전보다 다소 쌀쌀한 공기가 벨져의 몸을 파고들었다. 살짝 춥다고 느낄 즈음, 귓가에 릭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눈을 떠도 괜찮소.”

벨져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 그를 환영하듯 빛나고 있었다. 수많은 빌딩의 숲이 만들어 낸 화려한 야경. 인간이 만들어 낸 극한의 불빛이 반짝이며 벨져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가 항상 보아오던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과는 다르지만, 분명히 감탄을 토할 가치가 있는 광경이었다. 벨져는 진심으로 이 풍경을 만든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언젠가 전쟁이 끝나면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었소. 마침 기회가 되어서 다행이오.”

……그래. 고맙다. .”

별말씀을.”

벨져가 릭을 보며 웃었다. 릭도 벨져를 보며 웃었다. 반짝이는 야경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to. 나메코님

모든 전쟁이 끝난 뒤에 릭과 벨져의 일상이라는 느낌으로 썼습니다. 그림 선물해줘서 고마워요! 어린이날이 9일이나 지났지만 ㅎㅎ... 늦게나마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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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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