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고상

팬픽/사이퍼즈 2015. 11. 15. 23:43

예배의 끝을 고하는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앉아있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성당을 나서기 시작했다. 출입구를 향해 가던 그들은 맨 뒷자리에 홀로 앉아있는 청년을 발견했다. 깔끔하게 빗어 올린 갈색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 오뚝한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 검은 양복을 갖춰 입은 모습은 주변에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성당에 혼자 오는 사람은 드물기에 누군가 청년에게 이유를 물어볼 법도 하지만, 그 누구도 청년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 나가고, 강단에 서 있던 신부까지 사라졌지만, 청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앉아 정면에 있는 십자고상을 바라보았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형상화한 십자고상. 성물이라 할 수 있는 이 물건을 바라보는 청년의 눈에는 다른 신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경외 같은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뒤에 있는 문이 열리고 또 다른 청년이 들어왔다. 헝클어진 흰색 머리에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청년이었다. 안경을 끼고 흰 가운을 입은 그는 앉아 있는 청년과는 달리 화사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맨 뒷자리에 앉은 청년을 발견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히카르도! 여기 있었군.”

히카르도라 불린 청년이 고개를 돌려 방금 들어온 청년을 보았다. 무뚝뚝한 얼굴에 자그마한 미소가 지어졌다.

까미유인가. 오랜만이다.”

까미유는 손을 내저으며 히카르도의 옆에 다가와 털썩 앉았다. 그를 보며 히카르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부는 잘되어가나?”

할 만해. 어렵긴 하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야. 이왕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니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 너라면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누가 뭐래도 카모라 마피아 제일의 두뇌를 자랑하는 까미유니까 말야.”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수년간 같이 지낸 두 사람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문득 까미유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내가 공부를 하는 동안 여기에 자주 온다면서? 피에르가 그러더라. 갑자기 신학이라도 빠졌나, 하고.”

내가 공부하곤 전혀 연이 없다는 걸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나.”

물론이지. 그래서 더 궁금해진 거야. 학문에도, 신앙에도 관심 없던 네가 갑자기 성당을 오게 된 이유가.”

히카르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십자고상이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의 눈길을 따라가던 까미유도 곧 십자고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성당에서나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물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까미유의 호기심이 동했다.

십자고상? 저걸 보러 오는 건가?”

그래. 저 물건은 예수라는 성자를 표현한 거지? 그에게 흥미가 생겼어.”

매일 피를 보는 게 일인 마피아가 성자를? 행동대장인 조지프가 알면 박장대소를 할 일이다. 피에르는 진지하게 말하겠지. 신이 있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까미유 역시 신을 믿지 않았다. 인간을 구원하는 건 같은 인간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의술을 배우기 시작한 거고.

뭔가 잘못 짚고 있는 듯한데, 내가 관심 있는 건 예수의 고난에 관한 거다.”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까미유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를 챈 모양이다. 히카르도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예수는 죽은 지 삼일 뒤에 부활했다지?”

성경에는 그렇게 나와 있더군. 넌 그걸 진지하게 믿는 건가?”

믿고 안 믿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나는 부활을 했다는 그 자체가 재밌을 따름이야.”

그렇군. 그런 거였나. 죽었으나 살아났다는 데에 흥미를 느끼고 매번 성당을 오다니. 이유가 정말 히카르도 다웠다. 이것도 다른 의미에서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신앙이라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히카르도. 예수가 되어 보겠나?”

그렇게 말하며 까미유는 품속에서 초록색 액체가 들어 있는 작은 시험관을 꺼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어느새 검은 숨을 내뿜는 긴 머리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와 시험관을 본 히카르도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으나, 마음을 굳게 먹고 친구의 손을 잡았다.

까미유는 곧바로 주사기를 꺼냈고, 액체를 넣은 뒤 히카르도의 팔에 찔렀고, 액체는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향했고, 히카르도는 비명을 질렀고, 고통과 벌레와 고통, 끝없는 고통이…….

 

 

 

그만……. 그만해!”

이불을 박차며 벌떡 일어났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거친 숨을 고르며 히카르도는 옆에 있는 탁자를 더듬거렸다. 먹다 남은 물병이 잡히자 뚜껑을 박살내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물을 마시자 다소 정신이 들었다. 벌레들이 그의 몸을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꿈이었군.”

오랜만에 친구의 얼굴을 보아서 길몽이라 해야 할지, 그때의 고통을 상기하게 되어서 악몽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꿈이었다. 히카르도는 애써 길몽이라고 위로하며 몸을 일으켰다. 문득 고개를 돌려 한쪽 벽을 바라보았다. 부식되고 있는 낡은 십자고상이 걸려 있었다. 어제 탄야의 행적을 좇다가 발견한 폐쇄된 성당에서 가져왔는데, 어느새 벌레들이 갉아먹은 모양이다.

어제 저걸 봐서 그때의 꿈을 꾼 건가.”

그는 벽으로 다가가 가까이서 십자고상을 바라보았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 십자가에 매달려 괴로워하는 예수의 모습이 그의 눈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고통. 예수는 인간의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갔다고 했다. 이런 몸이 되기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의 고통을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예수처럼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몸이 되었다. 그렇다면, 비록 예수처럼 인류 전체의 고통을 짊어지진 못해도 한 사람의 고통은 짊어질 수 있지 않을까.

네 고통은 나의 것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레들이 그의 온몸에서 흘러나왔다. 살에서, 뼈에서, 혈관에서 나오는 벌레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물론, 고통을 통해서다. 매일같이 느끼는 고통이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히카르도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친구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고통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금은 까미유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까미유를 잘못되게 만든 모든 것에게. 그리고 그의 고통만을 짊어지고, 히카르도는 홀로 사라질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십자고상을 한 번 쳐다본 뒤, 걸음을 옮겼다.

고통을 즐길 시간이다.”

 

 

 



To. 적신님

2015. 11. 16.

적신님 생일 축하드려요!

히카가 주인공인 짧은 엽편을 쓰려고 했는데 음... 아무리 봐도 쌍충이네요.

딱히 커플링을 의식하지 않고 쓰니까 이런 결과가 흑흑

어쨌든 본의아니게 쌍충 커플링 엽편이 되었지만 아무쪼록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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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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