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내리쬐는 한적한 오후. 좌판을 벌여놓은 상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을 정도로 포근한 날씨.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서로 손을 맞잡은 두 소녀가 대로를 걷고 있었다.

앞서 걷고 있는 보라색 단발머리의 소녀는 소매가 없는 검은 옷과 붉은색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어 활동적인 면모가 돋보였다. 뒤에서 따라가는 긴 갈색 머리의 소녀는 하얀색 블라우스에 긴 파란색 치마를 입고 있어서 그런지 앞에 가는 소녀에 비해 차분한 인상이었다. 이렇게 서로 대조적인 모습의 두 소녀였으나 두 사람의 얼굴은 같은 사람이라도 해도 믿을 정도로 매우 흡사했다.

이윽고 그들은 어느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제법 낡았으나 고풍스러움이 묻어나는 건물이었다. 잠시 건물을 살펴보던 보라색 머리의 소녀가 갈색 머리 소녀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언니?”

. 고마워. 리첼.”

리첼이라 불린 소녀는 자신의 쌍둥이 언니, 리사 스트라우스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리사의 간곡한 부탁에 여기까지 데려다주기는 했으나, 이제 혼자서 가겠다니……. 예전보다는 많이 밝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혼자 돌아다니기에는 불안한 리사다.

밝아진 게 그 사람 때문이라는 건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말이지.’

리사에게 들리지 않게 조심하며 혀를 찼다. 정말 그가 리사와 어울리는 사람일까? 리첼의 눈에 비친 그는 냉정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재수 없는 귀족이었다. 자신의 언니와는 전혀 맞지 않는 사람. 성질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건물을 음파로 다 부수고 언니를 데려가려면 나를 밟고 가라!’ 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미소를 짓고 있는 리사를 보며 꾹 참았다.

그럼 언니.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해야 해. 알겠지?”

얘도 참. 무슨 일이 생기겠니.”

하긴 여기만큼 안전한 곳도 별로 없을 테다. 이곳은 제레온 프리츠가 창설한 그 이름 높은 검의 형제 기사단의 본부니까. 오스트리아 황실 호위대원들이 만든 단체인 만큼, 명예와 긍지가 높은 기사들이 모인 곳이다. 그들이 함부로 여성에게 손을 대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단지 리첼의 심술에 불과했다.

그럼, 리첼. 갔다 올게.”

알았어. 다녀와.”

결국, 리첼은 크게 한숨을 쉬며 갔다. 그녀의 뒷모습에 손을 흔들어주던 리사는 그녀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검의 형제 기사단 본부의 정문을 쳐다보았다. 약간의 초조함을 느낀 그녀는 습관대로 오르골을 쥐려고 했으나 자신이 오르골을 들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불안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근육질의 남자가 나왔다. 하품을 하며 나오던 그는 문 앞에 서 있는 리사를 발견하고 잠시 흠칫했으나 곧 낯익은 얼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단장의 여자친구잖아.”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를 인식한 리사가 고개를 들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몇 번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검의 형제 기사단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만 기억이 났다. 그 사람과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자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 안녕하세요. , 저기…….”

바이런 헌터다. 단장을 만나러 온 건가?”

바이런이 문을 열어주자 리사는 쭈뼛거리며 내부로 들어왔다. 벽돌로 된 통로는 오래되었으나 굉장히 튼튼한 느낌을 주었다. 바이런이 앞장섰고 리사는 한참 뒤에서 따라왔다. 구면인 사람이라 해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인지 계속 바이런을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바이런은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단장 같은 사람하고 매일 지내다 보면 이상한 사람들에 대해 무감각해진단 말이지.’

이윽고 복도 가장 안쪽에 있는 문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따라서 멈춘 리사를 향해 바이런이 말했다.

여기가 단장실이다. 그럼 이만.”

. , ……. 감사합니다.”

리사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바이런은 손을 내저으며 쿨하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다시 홀로 남은 리사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으나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렸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결국, 리사는 침을 삼키며 방문을 열었다. 다행히 잠겨있지는 않았다.

방 안에는 커다란 책장과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책상 뒤에 한 남자가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 마치 조각과도 같은 뚜렷한 이목구비는 누구나 감탄을 할 만한 것이었다. 뭇 여성보다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남성스러운 미가 물씬 풍기는 미남이 그곳에 있었다.

벨져씨……?”

리사가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눈은 굳게 감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밤새 일을 했다고 했다. 아까 만난 바이런도 다소 피곤한 눈치였는데, 벨져 또한 상당히 피곤한 모양이다. 리사는 그를 깨우지 않게 조심스레 움직여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고요한 방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존재했다. 규칙적인 그의 호흡이 들려주는 편안한 소리를 듣자, 리사의 마음이 고요해졌다. 벨져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 온몸을 짓누르던 불안감은 모두 사라진 지 오래다. 리사는 미소를 지으며 벨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보아도 벨져의 아름다움은 제일이었다. 그야말로 침어낙안의 용모, 폐월수화의 아름다움. 오래전에 태어났으면 필시 경국지색이라 불렸으리라. 이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이 또 있을까. 리사도 절대 어디서 꿀릴 미모가 아니었지만, 벨져의 앞에서는 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문득 리사는 벨져의 얼굴을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저도 모르게 서서히 손가락을 뻗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벨져의 얼굴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중지가 벨져의 하얀 볼에 닿으려고 하는 순간, 리사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손을 뒤로 당겼다. 그리고 빠르게 올라간 벨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확 하고 잡았다.

너무나도 놀란 리사는 비명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벌어진 입에서 작은 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천천히 눈을 뜬 벨져는 그녀의 표정을 한 번 보더니 그대로 자신의 볼을 리사의 손가락에 갖다 대었다. 얼어붙은 리사의 표정에 서서히 붉은색이 퍼졌다.

만져도 상관없다만.”

잠시 뜸을 들이던 벨져가 덧붙였다.

너라면.”

이제 리사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새빨개졌다. 갑자기 손목을 잡혀 느낀 놀라움과 벨져가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모르는 당혹스러움과 손끝에서 전해지는 부드러운 볼의 감촉과 온갖 감정으로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한데 뒤섞인 머릿속에선 온갖 잡념이 들끓었다. 통일된 한 가지 의사를 표현하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벨져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자신의 뺨에 비볐다. 마침내 간신히 제대로 된 행동을 할 수 있게 된 리사는 우선 벨져의 볼에 붙어 있는 손을 뺐다. 그리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뺨은 여전히 발그레한 채였다.

, ,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거예요?”

네가 들어올 때부터.”

벨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그의 날카로운 감각은 평소에도 항상 예리한 날을 세우고 있었고, 이는 자고 있을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만약 리사가 오르골을 들고 있어서 조금만 더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면 그 사실을 눈치챘겠지.

그런데 왜 인기척을 내지 않은 거에요!”

당황함이 불러낸 용기일까. 평소에 내지 않던 큰소리까지 내며 벨져를 밀어붙이는 리사였지만, 정작 벨져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아주 평온하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일어났겠지만 네가 오는데 굳이 일어날 필요는 없지. 너는 내가 무방비한 모습을 볼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정말이지, 그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네요.”

리사는 더 이상 반박을 하지 못했다. 단지 혼자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런 점을 좋아하지만요.”

 

 

 

 

2015. 08. 19.... 인듯?

앞서 올린 [천둥]과 같이 올려서 오늘의 사이퍼즈에 올라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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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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