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14.11.06 아야하타
  2. 2014.09.20 레이무의 은밀한 꽃잎
  3. 2014.02.07 요괴는 비사문천의 제자인가?
  4. 2014.02.05 꽃이 되다

, 하고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연거푸 울려 퍼졌다. 분명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히메카이도 하타테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들과 교류를 하지 않는 그녀이기에 약속도 없이 누군가 방문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든 신문을 읽어보라고 집집이 극성을 부리는 까마귀 텐구들도 하타테의 집만은 찾아오지 않을 정도이니.

그러나 그런 하타테의 생각을 비웃듯이 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결국, 하타테는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보나 마나 이상한 까마귀 텐구가 신문 권유하러 왔겠지.

신문 안 받…….”

하타테의 예상과 달리 상대는 신문은 권유하러 온 까마귀 텐구가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차라리 신문 권유를 하러 온 까마귀 텐구였으면 했다. 아는 얼굴을 만나는 게 이토록 끔찍한 행위일 줄은 몰랐다.

안녕?”

설마 그녀가 자신의 집에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하타테는 입만 뻐끔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면 손님으로 찾아온 샤메이마루 아야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굉장히 즐거운 표정이었다.

인사를 했으면 받아주는 게 예의 아닐까, 하타테?”

가시 돋친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하타테가 어색하게 말했다.

, . …… 안녕. 아야.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 친구네 집에 놀러 오는 것도 안 돼?”

순간 친구라는 말에 가슴이 뭉클해진 하타테였지만, 여기서 아야를 집 안으로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다른 텐구면 몰라도 아야에게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게 있기 때문이다.

, 정말 고마워. 그런데 미안하지만, 다음에 오면 안 될까? 말도 하지 않고 와서 집 정리도 제대로 안 했고, 어수선하고 엉망인데…….”

괜찮아. 괜찮아. 네가 더럽게 지낸다는 건 평소에도 잘 알고 있으니까. 새삼스럽게 뭘 그러니?”

그러면서 아야는 막무가내로 하타테를 밀치고 집 안에 들어왔다. 하타테가 온몸으로 막으려 했지만, 집에만 틀어박혀 사는 하타테가 건강한 아야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집에 들어온 아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역시 하타테가 사는 곳답게 쓰레기 같은 집이구나! 너무 어울리는데?”

악의가 가득 차다 못해 넘치는 말이었지만 그걸 내뱉는 아야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전혀 변함이 없었다. 하타테 또한 심한 말을 들으면서도 화를 내거나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차분하게 뒤를 따라왔다.

, 저쪽이 하타테의 방이구나! 나 저 방 볼래!”

잠깐, 아야. 내 방은 좀…….”

허무하게 밀린 방금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하타테가 아야의 팔을 강하게 잡았다. 반드시 보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친구의 집에 왔으면 방을 보는 건 당연한 거야. 넌 애가 상식이 없니? 아니면, 나한테 보여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거야?”

순간 하타테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분명 공포가 어린 표정이었다. 동공이 살짝 풀림과 동시에 팔도 살짝 풀렸다. 아야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팔을 뿌리쳤다. 힘이 풀린 하타테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지만, 아야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찰칵, 하고 열린 판도라의 상자 안에는 수많은 아야의 사진이 있었다. 바닥부터 벽, 천장까지. 하늘을 나는 아야. 기사를 쓰는 아야. 무녀를 취재하는 아야. 우아하게 부채를 흔드는 아야. 아야. 아야. 아야. 하타테의 방인지 아야의 방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아야가 존재했다.

아하.”

아야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는 규모였다. 물론, 그래서 나쁠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았다. 하타테를 매도할 명분이 더욱 뚜렷해졌으니.

이게 어떻게 된 걸까. . . ?”

고개를 돌려 하타테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절망이 그녀의 얼굴에 있었다. 온몸이 마치 병에 걸린 사람처럼 떨렸다. 아야는 그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눈에 새겨 넣었다.

더럽고 칙칙한 네 방에 어째서 내 사진이 이렇게 많이 있는 거지?”

…………………….”

간신히 입을 뗐지만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크나큰 충격으로 인해 실어증에 걸린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좀 더 강한 충격으로 낫게 해야지. 아야는 준비해두었던 결정타를 던졌다.

너 설마……. 나 좋아하니?”

사시나무 떨듯 떨리던 몸이 순간 굳었다. 마치 홍마관의 메이드가 시간을 정지한 것처럼. 그 모습을 본 아야의 입꼬리가 절로 솟구쳤다.

설마? 진짜야? ! 너같이 더럽고 추악하고 아는 텐구 하나 없는 히키코모리가? 나를? 정말 어울린다고 생각해? 주제를 알아야지!”

아야의 비웃음을 들으며 하타테의 몸이 무너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이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끊임없이 절망이 섞인 단어를 내뱉었다. 끝났어. 난 바보야. 이제 없어. 죽자. 죽어야 해. 나 같은 건…….

그녀의 말은 아야의 손짓으로 막혔다. 손을 뻗어 하타테의 턱을 부여잡아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 들이댔다. 그렁그렁한 눈물에 아야의 눈망울이 비쳤다.

울어? 너 정말 꼴사납구나!”

계속되는 아야의 매도에 결국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턱선을 따라 흘러내린 눈물은 아야의 손을 적셨다. 아야는 잠시 얼굴을 찡그리더니 턱에서 손을 떼고 하타테의 옷에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넌 애가 자존심도 없니? 어떻게 매일같이 괴롭히는 사람을 좋아할 수가 있어? 나에게 있어 너란 존재는 음식물 쓰레기보다도 밑에 있는 구제불능의 쓰레기야. 음식물 쓰레기는 거름이라도 쓸 수 있지.”

…… 그래도…… 난 네가…… 좋은 걸…….”

눈물이 섞인 목소리로 간신히 고백을 했다. 하타테의 목소리로 직접 좋아한다는 말을 듣게 되자 아야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집이 떠나갈 만큼 크게 웃었다. 도저히 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너랑 같은 까마귀 텐구라는 사실조차 치욕스러운데, 고백이라니 하…….”

간신히 웃음을 멈춘 아야가 이번에는 하타테의 머리를 잡았다. 그대로 끌어당기자 다시 눈과 눈이 마주보는 상황이 되었다. 아야는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 채로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이 히키코모리야. 넌 내게 욕을 먹어도 좋고, 괴롭힘을 당해도 좋고, 맞아도 좋은 거지? 그럼 평생 그렇게 살아. 평생 널 괴롭힐 테니까. 물론 내가 너에게 사랑을 주는 일 따윈 없어. 내 사랑은 너같은 쓰레기에게 주긴 너무 아까운 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타테의 머리를 홱 뿌리쳤다. 균형을 잃은 하타테가 엎어졌지만 아야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일어나 집을 나갔다. 홀로 바닥에 쓰러진 하타테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다.

그래도……. 좋은 걸…….”

 

 

 

 

 2014. 11. 03

서유님 생일 축하드려요! 

사흘이나 늦었지만... 흑흑 제가 죄인입니다 죽여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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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

"유카리! 일단 대화를…."

"지금은 대화를 할 때가 아니잖아?"


유카리가 레이무의 두 팔을 잡고 천천히 누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약한 요괴라도 어느 정도의 세월을 살았다면 순수한 완력으로는 절대 인간에게 지지않는다. 하물며 상대는 요괴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요괴의 현자, 야쿠모 유카리다. 수많은 요괴를 퇴치하고 다니는 레이무지만 완력은 보통 여자아이와 크게 다를바 없다. 자연히 레이무는 바닥에 쓰러졌고, 유카리가 레이무 위에 올라타는 자세가 되었다.


"아앗!"


바닥에 등을 세게 부딪쳤는지 레이무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는 살짝 두려움에 떠는 표정과 잘 어우러져 유카리의 가학심을 자극했다. 유카리는 사디스틱한 미소를 지으며 레이무의 귓가에 속삭였다.


"레이무, 나쁜 아이에겐 벌을 줘야겠지?"


말을 끝맺으며 입김을 살짝 불어넣자 레이무가 움찔거렸다. 아아, 어린 양을 눈앞에 둔 늑대의 심정이 이러할까. 반응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다. 유카리는 천천히 레이무의 옷 안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읏… 차가워…."


계절은 겨울. 방안은 따뜻하지만 방금 밖에서 들어온 유카리의 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질적인 차가움에 레이무는 또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유카리의 입에 걸린 미소가 더 짙어졌고 손은 부드럽게 레이무의 흉부를 더듬다가 순간 밑으로 내려갔다.


"안돼, 거긴…!"


레이무가 깜짝 놀라 손으로 막으려 했지만 유카리의 왼손이 레이무의 두 손을 잡아 봉쇄했다. 방해물이 사라진 오른손은 자신의 본래 목적을 다 하기 위해 계속 아래로 내려갔고, 마침내 목표물을 찾을 수 있었다.


"흐응, 여기 있었구나. 맛있는 꽃잎☆"


레이무가 몸속 깊숙히 숨겨둔, 그 누구의 손도 닿지 않았던 꽃잎에 처음으로 외부의 손길이 닿았다. 마침내 찾아낸 그 부드러운 감촉. 유카리는 기쁨은 한껏 느끼며 살짝 꽃잎을 어루만졌다. 여전히 움찔거리던 레이무의 표정은 이제 거의 울 것 같이 되어 있었다.


"유카리… 제발… 그것만은…."

"후후, 그런 얼굴의 레이무도 정말 귀여워. 하지만, 더이상 그만둘 수 없는걸."


혀로 입술을 햝으며 한껏 요염함을 뽐내며 레이무를 괴롭히던 유카리는 이제 슬슬 끝낼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레이무. 이제 슬슬… 이 꽃잎의 처음을 가져가야겠어."

"안돼!"


유카리의 행동을 레이무가 꿈틀거리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 결국, 유카리는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바를 실행하고야 말았다. 









"바이바이, 레이무. 차는 잘 마실게!"

"다신 오지마!"


유카리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꽃잎을 가져갔다. 과연 오래산 요괴답게 눈썰미가 좋았다. 설마 옷 안쪽에 숨겨놨는데 발견하다니. 레이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극상의 차 맛을 내는 희귀한 꽃잎을…."

"원래 내꺼니까 억울해 할 필요 없어."

"사라져!"


스키마 사이로 나타난 유카리의 머리를 후려치려고 했지만 금세 사라졌다. 힘이 빠진 레이무는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유카리의 말이 맞는 말이다. 분명 유카리는 향림당에 그 꽃잎이 들어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미리 린노스케에게 예약을 해 놓았다. 그리고 린노스케가 잠시 나간 사이에 향림당에 온 레이무가 그 꽃잎을 발견한 것이다. 레이무는 평소처럼 아무 생각없이 그냥 들고왔고, 결국 이런 일이 발생했다. 어디에 하소연 할 것도 없이, 레이무의 잘못이다.


"예약품이라면 예약품이라고 써 놓아야 하는거 아냐?"


그렇지만 레이무는 린노스케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하는지 혼자 투덜거리다가 그것도 귀찮은지 바닥에 벌렁 누워서 잠이 들었다. 








환소담에 낚시용 (...) 으로 쓴 팬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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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

요괴의 탁한 눈망울에 비친 그녀는 꽃이었다. 아름다운 한 송이의 백련. 순결하고 청순하여 성스럽기까지 느껴지는 하얀 연꽃. 요괴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고귀함이 그녀에게 있었다. 그래서 요괴는 그녀에게 이끌렸고,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위해 일했다. 


그래서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요괴는 믿지 않았다. 아무리 인간들이 어리석고 멍청한 족속들이라고 해도 그녀에게 위해를 끼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인격적으로만 훌륭한 요괴가 아니다. 그녀의 신체강화 마법은 마법에 대해 문외한인 요괴가 봐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웬만한 인간들이라면 칼 한번 휘둘러 보지 못한 채 패배하게 되겠지. 요괴는 떠도는 소문을 비웃으며 수련에 계속 정진했다.


요괴가 진실을 알게 된 때는 법회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하기 위해 인간들이 사는 마을에 내려갔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북적거리는 시장터를 누비며 자신이 사야 할 물건들을 사다가 우연히 상인들끼리 떠드는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


"마법사가 드디어 잡혔다면서?"

"그래. 요상한 술수를 부리며 요괴들을 돕는 그년이 드디어 끝난 거야."

"암. 많은 퇴마사분들이 직접 저 멀리에 봉인했으니까 다시는 볼일이 없을 꺼야."

"이제야 속이 시원하군. 하하하!"


그들의 이야기는 어느 한 마법사가 다수의 퇴마사에게 퇴치되어 봉인되었다, 라는 이야기였다. 평소라면 더는 들을 것도 없이 무심하게 지나갔겠지만 얼마 전부터 그녀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많이 들었고 또한 그들이 떠드는 마법사란 존재가 그녀와 너무나도 비슷했기에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괴는 조심스럽게 상인들에게 다가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즐겁게 말씀을 나누는 중에 실례합니다. 저는 비사문천을 모시는 토라마루 쇼우라고 합니다."

"아, 이거 어이 여기까지 귀한 발걸음을, 일단 앉으시지요!"


살이 뒤룩뒤룩 찐 교활한 인상의 인간이 쇼우를 보며 연방 굽실대며 자리를 권했다. 비사문천의 이름은 어디에나 잘 먹힌다. 


"아닙니다. 금방 가야 합니다. 저, 그런데 방금 나누고 계시던 이야기 말입니다."

"예예, 뭐든지 물어보십쇼."

"혹시 그 봉인되었다는 마법사의 이름을 아십니까?"


쇼우는 인간들의 안색을 살피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혹시라도 그녀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이 알게 되면 그녀도 자신도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별로 눈치가 없는지 그저 좋다고 웃으며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 주었다. 


"물론입죠. 그 마법사의 이름은 히… 뭐더라?"

"뭐시기 뱌쿠렌 이라고 안 했어?"

"아, 그래. 예, 분명히 그런 이름이었을 겁니다."


순간 쇼우는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떨어뜨릴 뻔 했다. 다행히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실낱같은 이성이 근육에 힘을 불어넣어 떨어뜨리진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은 이미 육체에서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뱌쿠렌… 이라고요?"

"네. 그럽죠. 아시는 분인가요?"

"아니, 아닙니다. 이름이 조금 비슷했을 뿐이군요. 그럼 실례했습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은 쇼우는 서둘러 시장을 빠져나왔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금방이라도 육체를 찢고 나와 그녀를 찾아 헤멜 것만 같았다. 다시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서 쇼우는 자신을 세뇌시켰다. 그녀는 괜찮아. 안전할 거야. 그녀를 건드릴 수 있는 인간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설령 그녀보다 강한 인간이 있다 해도 그녀 같은 인격자를 봉인시킬 리가 없다. 그렇게 계속 암시를 걸었다. 






"당신이 이 산을 수호하는 요괴로군요. 반갑습니다. 히지리 뱌쿠렌이라고 합니다."

"…돌아가라. 죽기 전에."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래서 손대고 싶지 않았다. 나의 손으로 꽃을 꺾어 시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머릿속에 강렬한 트라우마로 남아 두고두고 후회할 게 분명했다.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 요괴의 편이니까요."

"마법사라고 하나, 본연의 모습은 인간. 네년도 결국 정신머리는 인간과 같을 터."


이 세상 어디에 요괴의 편을 드는 인간이 있을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그러나 이런 헛소리도 그녀의 입에서 나오니 왠지 그럴싸하게 들렸다. 이대로 그녀의 말을 믿고 그녀를 따르고 싶었다. 그러니 이것은 본능이 속삭이는 악마의 유혹. 본능에 충실하게 살면 언젠가는 파멸하고 만다. 스스로 이성으로 억누르며 그녀를 조용히 보내고자 노력했다. 


"네. 저 자신도 스스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 요괴의 편입니다."

"재미없는 소리를 하는군. 돌아가라. 별로 죽이고 싶진 않다."


끈질긴 인간. 끝까지 말도 안되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싫지만은 않다.


"역시 당신은 좋은 요괴군요."

"뭣…?!"


지금까지 몇천 년을 살면서 난생처음으로 들어본 소리에 놀라 얼굴이 빨개졌다. 나의 반응을 본 그녀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해탈한듯한 순수한 미소다.


"의외로 귀여운 면모도 가지고 있었네요. 당신."

"시끄러워!"


이성이 흐트러졌다. 덕분에 본능이 이성의 감옥을 깨고 본능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전 당신이 마음에 드네요. 어떤가요, 저와 함께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어보지 않겠습니까? 요괴가 퇴치당하지 않고,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그런 세계를."

"그런 세계가 있을 리가 없잖아. 절대 현실은 될 수 없는 이상이야."


입은 그렇게 움직였지만, 마음은 동요하고 있다. 진정하자. 사기꾼의 사탕발림과 다를게 무어란 말인가. 결코 실천되지 못할 일이다. 적당히 기절시켜서 산 밑으로 내려 보내자. 그게 최선의 방법이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죠?"

"…토라마루 쇼우."


…가끔은, 본능에 몸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법회는 무사히 끝났지만, 쇼우는 자신이 무얼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기계적으로 몸만 움직였을 뿐. 비사문천이 보았다면 진노하며 그녀에게 몇 시간동안 설교를 퍼부었겠지만, 다행히 오늘 비사문천은 없었다. 


쇼우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에는 오늘 들었던 소문들만이 맴돌고 있었다. 신빙성없는 소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게 걸렸다. 예전부터 계속 들려오던 이야기도 있고. 지금 당장이라도 법계로 날아가 진위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다. 쇼우는 뱌쿠렌이 그녀에게 내려준 임무를 수행할 의무가 있다. 


그때 가볍게 노트를 하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쇼우는 무의식적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끼익, 하고 문이 열리고 나즈린이 들어왔다. 쇼우는 깜짝 놀라서 정신이 들었다. 나즈린이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자 쇼우도 자세를 고쳐앉고 말했다.


"무슨 일이죠?"

"들으셨습니까, 주인님."

"무엇을?"

"히지리 뱌쿠렌이 법계에 봉인되었다는 소식 말입니다."


순간적으로 들끓은 나즈린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리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의 방향을 돌렸다. 분명 나즈린은 '소문'이 아니라 '소식'이라고 했다. 나즈린의 쥐를 이용한 정보수집능력은 그녀도 잘 알고 있다. 거기다 나즈린은 제자인 쇼우보다 더 비사문천에게 신뢰받는 요괴다. 결론. 저 정보는 정확한 소식이다. 재차 온몸이 꿈틀거렸다.


"들었습니다만, 그래서요?"

"…아닙니다, 들으셨다면 됐습니다."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여 대답했다. 나즈린은 비사문천이 쇼우를 감시하기 위해 붙인 감시역. 나즈린 자신은 어디까지나 쇼우의 밑을 자청하지만, 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섣부른 언행은 곧 비사문천에게 보고되고, 결국 비사문천은 뱌쿠렌을 신뢰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이대로 날릴 수는 없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가보겠습니다."


나즈린은 다시 한번 목례를 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쇼우는 앉은 채로 조용히 이를 갈았다. 절대 분노를 표출해서는 안된다. 






"성실하고 올곧은 요괴가 필요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녀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최근 여러모로 고민이 많아진 그녀였다. 그 중 가장 큰 고민은 역시 비사문천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비사문천을 신봉하여 절로 비사문천을 소환했지만 비사문천은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절에 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며칠간 고민을 하다가 급히 쇼우를 부른 것이다. 


"요괴를 한 명 비사문천께 제자로 보내려고 합니다."

"제자…라고요?"


좋은 생각이다. 뱌쿠렌과 친분이 있는 요괴 중 한 명이 비사문천의 제자가 된다면 비사문천을 대신하여 신앙을 모을 수도 있고 비사문천과 뱌쿠렌의 관계도 더욱 깊어질 테니까. 문제는 갈 만한 요괴가 있느냐, 가 문제이다. 비사문천이 요괴를 제자로 받아줄 리가 없으니 자신의 정체를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요괴. 동시에 비사문천의 신뢰도 얻어야 하니 능력도 좋아야 한다. 


"보낼만한 요괴가 있을까요?"

"그래서 당신을 부른 겁니다. 쇼우."

"네?"

"비사문천의 제자로 보낼만한 요괴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제안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분명히 좋은 의견이라 생각하고 지지하고 있었지만, 그 대상이 나라면 달라진다. 나 같은 한낱 잡요괴가 그렇게 큰일을 맡을 수 있을 리가. 괜히 그녀에게 방해될 뿐이다. 이번만큼은 그녀가 틀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그릇이 못됩…."

"아니요. 쇼우라면 할 수 있어요. 저는 쇼우를 믿습니다."


그녀는 손을 펴 나의 두 손을 맞잡았다. 따뜻하다. 이 따뜻함에 나와 다른 요괴들이 이끌린 것이리라. 얼음장같이 차가운 내 손이 부끄러워 슬며시 손을 빼려고 했으나 그녀가 꽉 잡아서 빼지 못했다. 그녀를 고개를 흔들었다. 그 움직임에 사로잡혀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어요. 아니, 쇼우밖에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맡아 주겠죠?"


자신과 함께하자는 말 이후로 처음으로 그녀에게 들어본 부탁이었다. 첫 만남 이후로 그녀는 내게 바라는 게 없었으니까. 오히려 그녀는 내게 계속 베풀어 주었다. 물론 나도 스스로 생각하여 그녀를 위해 여러가지 일을 해 주었지만. 그녀가 직접적으로 부탁한 적은 이번이 두 번째. 당연히 거절 따윈 할 수 없다.


"네. 알겠습니다.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쇼우의 정신이 반쯤 나간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그녀에 대한 정보를 더 듣진 못했다. 다만, 조만간 그녀를 법계에 봉인한 퇴마사 중 일부가 귀환할 거라는 소식만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찾아가서 사지를 찢어놓고 싶지만, 최근 비사문천의 감시가 심해졌다. 일부러 평소보다 몇 배의 일을 시키고 항상 나즈린을 딸려 보낸다. 절대 딴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겠지. 뻔한 수작이다.


모처럼 휴식시간을 얻어 쇼우는 절 근처 커다란 바위로 찾아갔다. 쇼우가 심란한 마음을 달래는 곳이다. 산 아래의 풍경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장소라 보고 있자면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높은 장소 특유의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고. 오늘도 멋진 가을의 절경을 보며 열을 식히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절벽 밑에서 갑작스레 하얀 연기가 튀어나왔다. 경계하며 뒤로 물러서는데 그 연기가 빠르게 움직였다. 자세히 보니 손을 내젓는 동작이었다. 싸울 마음이 없다는 뜻. 그러고 보니 이 연기는 쇼우가 잘 알고있는 뉴도가 아닌가.


"운잔님이로군요. 그렇다면, 이치린도?"


쇼우의 말에 호응하듯 수녀복을 입은 이치린이 날아왔다. 평소에 항상 수녀복을 단정히 갖추어 입던 이치린이지만 오늘은 어찌나 급히 왔는지 수도복이 온통 구겨지고 흙이 묻어 엉망이었다. 하지만, 제일 엉망진창이 된 부위는 역시 얼굴이었다. 날아오면서도 계속 울고 있었는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고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이치린은 오자마자 쇼우의 품에 달려들었다.


"미안해요. 쇼우. 아까부터 통제가 안되네요. 잠시만 그렇게 있어 줄래요?"


그 뒤를 따라 무라사가 쇼우의 앞에 나타났다. 이치린을 나무라고 있었지만 무라사의 얼굴도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하긴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운잔조차 표정을 험악하게 찡그린 채로 있었으니 말 다했다. 


그녀의 인품에, 그녀의 이상에 이끌려 그녀의 곁으로 온 요괴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그녀를 따른 요괴를 꼽아보라면 누구나 이치린과 무라사, 쇼우를 꼽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세 요괴가 지금 한자리에 모였다. 당연히 화제는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서 우린 지금이라도 당장 법계로 향할 겁니다. 그분을 구하기 위해서요."

"언니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어느새 울음을 그친 이치린이 두 주먹을 꽉 쥐며 분노를 표현했다. 운잔도 그에 동의하듯이 양 주먹을 부딪치며 툭툭거리고 있었다. 무라사 역시 두 눈이 적의로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8개의 닻으로 인간을 도륙할 기세다.


"쇼우, 당신도 함께 갈 거죠?"


쇼우는 잠시 하늘을 보다가 절 쪽에 있는 나무를 보았다. 쥐 한 마리가 급히 올라갔다. 돌담 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쥐 한 마리가 구석에 숨어서 이쪽을 감시하고 있다. 주변에 쇼우가 감지한 쥐만 해도 열 마리가 넘어간다. 말할 필요도 없이 나즈린의 짓이다. 과연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활용할 줄 아는 영악한 작은 현장이다. 쇼우는 작게 한숨을 짓고 답했다.


"아뇨. 저는 가지 않습니다."

"에?"

"뭐라고요?"


이치린이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고 무라사는 잘 못 들었다는 태도로 반문했다. 쇼우는 한글자 한글자 힘을 줘서 똑바로 말했다.


"저는 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무라사의 적의가 인간이 아닌 쇼우를 향했다. 옆에서 볼 땐 몰랐는데 직접 받아보니 굉장한 기세가 아닐 수 없다. 무라사보다 강한 쇼우였지만 온몸이 오싹했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계속,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이제 와서 감정을 드러내면 안된다.


"실망입니다. 쇼우. 적어도 당신은, 가장 앞에 서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시다. 이치린."


그간의 정 때문인지 차마 때리진 못하고 무라사는 이치린을 데리고 날아갔다. 두 눈을 부릅뜨고 쇼우를 노려보던 운잔이 뒤늦게 그 뒤를 따라갔다. 쇼우는 조용히 요괴들을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쥐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느껴졌다. 쇼우는 혼자 중얼거렸다. 


"오늘만큼 당신이 원망스러울 때가 없었습니다. 비사문천."


꽉 쥔 두 주먹을 펴자 적지않은 양의 피가 떨어졌다.






"당분간 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분간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고? 언제나 조금만 참으면 그녀를 볼 수 있을 거야, 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며 수행을 하던 나에게 그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네. 조금 멀리 갈 일이 생겼습니다. 한 몇 달간은… 만나지 못하겠네요. 어쩌면 몇 년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도 이별이 아쉬운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도 힘든 선택이었으리라. 이왕 이별해야 한다면, 마지막엔 웃는 얼굴로 보내주는 게 좋겠지. 억지로 안면근육을 움직여 보았지만, 결과는 굉장히 안 좋았다. 어두운 표정의 그녀가 순식간에 웃음보가 터졌으니까. 


"아하하. 고마워요. 쇼우."


그녀는 내가 그녀의 암울한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이러한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뭐라 반박을 하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찌 되었건 결론적으로는 좋아졌으니까. 


"그럼, 쇼우. 작별입니다. 비사문천께 여러가지 잘 배우도록 하세요."

"네. 제가 할 수 있는 바를 다하겠습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살짝 어리둥절하다가 곧 악수를 청한다는 걸 깨닫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맞잡은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가 불안해 떨고 있었다. 나는 나머지 한쪽 손도 내밀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잠깐 놀랬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고마워요. 쇼우. 또 신세를 지고 가네요."

"아닙니다."

"그럼, 가볼게요. 쇼우. 마지막까지 염치없지만,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나요?"

"어…? 아. 물론입니다."


갑작스레 그녀에게서 받는 3번째 부탁. 무슨 일일까? 의문을 띄우는 나의 손을 놓고서 그녀는 옷을 고쳐입고 날아갈 준비를 끝마쳤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했다.


"…에?!"


나는 깜짝 놀라 반문을 했지만, 그녀는 이미 멀리 날아간 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이미 인간들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었으리라. 자신을 봉인시키려 하는 사악한 인간들의 술수를. 그래서 그녀는 나나 다른 요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혼자 모든 걸 짊어지고 법계로 간 것이다. 가장 눈엣가시인 자신만 봉인된다면 다른 요괴들은 무사할 테니까. 실로 그녀다운 생각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녀의 마지막 말을 잊지 못하고 계속 떠올린다. 그녀가 나에게 직접 부탁한 말들은 언령이 되어 계속 나의 몸을 구속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말고 계속해서 비사문천의 아래에서 수행을 해주세요."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던가. 좋지 않은 소문을 빠르게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 굳이 인간마을에 내려가지 않아도 절에 찾아오는 인간들이 알아서 소식들은 전해준다. 비사문천의 이름이란 참으로 편리하다.


"허허, 그래서 마법사를 풀어주러 온 요괴들까지도 우리 퇴마사님들께서 봉인을 해 주셨지요. 아주 기쁜 일입니다."

"그렇군요. 실례지만 그 요괴들이 어디에 봉인됬는지 아십니까?"

"어, 그게 아마 지저도시? 여하튼 지하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쯤 땅밑에서 흙이라도 파먹고 있겠지요."

"저런 퇴마사분들이 있으셔서 우리 같은 천민들도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습디다 그려."


벌써 어디서 술이라도 한 잔 먹고 왔는지 남자들은 최신의 정보를 술술 내뱉었다. 쇼우가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자 더 신이 나서 자세한 속사정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감정을 억누른 채 남자들을 보내고 나서 쇼우는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이제는 익숙한 쥐들이 그녀의 행동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결국 무라사와 이치린, 운잔까지 당했다. 무라사들도 약하진 않지만, 그녀에 비하면 약한 편이다. 그녀조차 퇴마사들을 이겨내지 못했는데, 하물며 그녀보다 약한 무라사, 이치린, 운잔 3명으론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쇼우는 자신이 갔으면 어떻게 됬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곧 지워버렸다. 퇴마사들은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 분노로써 스스로 몸을 태우는 무라사들은 절대로 그들을 이길 수 없다.


빌어먹을 인간들. 쇼우는 이를 갈았다. 본디 요괴와 인간의 관계는 괴롭히고 괴롭힘을 받는 관계. 그래서 항상 요괴는 악하고 인간은 선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무엇인가. 그녀는 요괴지만 오히려 인간처럼 선한 존재이다. 아니, 인간보다도 더 선에 가까운 존재다. 그런 그녀를 요괴를 위해 산다는 이유만으로 봉인해버렸다. 그녀가 요괴를 위하여 움직이는 행동이 자신들에게도 훨씬 좋은 일이라는걸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 그녀의 높은 이상을 인간 따위가 이해할 리가 없지.


"이래서야 누가 인간이고, 누가 요괴인지 모르겠군."


이번만큼은 관계가 뒤집혔다. 그녀는 선이고 인간이 악이다. 그녀가 옳다. 틀린 건 인간들이다. 이 사실이 언젠가는 증명될 것이다. 

지금은 그저, 비사문천의 밑에서 조용히 수행을 해야 할 때이다. 그녀를 대신해서 비사문천의 신뢰를 얻어내고야 말겠다고 쇼우는 다짐했다.






그리고 환상과 실체의 경계가 생기고, 하쿠레이 대결계가 만들어지고, 환상향이라는 공간이 형성되었다. 여러가지 일도 많았고 혼란도 적잖이 있었지만, 요괴의 현자와 하쿠레이의 무녀가 잘 해결하였다. 어느덧 세계는 그녀가 바라던 이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동안 쇼우는 착실하게 일해서 비사문천의 신뢰를 쌓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의심을 품고 있는지 나즈린이 계속 따라다녔다. 그렇기에 쇼우는 단 하나의 허점도 보이지 않고 수행만을 계속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꾸 그녀가 생각났다. 쌓이고 쌓인 그리움은 세월의 칼날이 스쳐 지나간 언령의 구속을 풀어버렸다. 쇼우는 그녀를 만나고 싶었고, 또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러나 쇼우가 그녀에게 은혜를 갚으려 해도 혼자서는 그녀의 봉인을 해제할 방법이 없다. 적어도 무라사나 이치린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쇼우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여러가지 이유를 핑계로 삼아 지하를 수색했지만, 아직 그녀들이 봉인된 장소를 찾지 못했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쇼우의 머릿속이 절망감으로 가득 찰 때쯤, 하늘을 나는 배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절로 흘러들어왔다.


틀림없다, 무라사들이다. 쇼우는 확신했다. 최근에 간헐천이 곳곳에서 솟아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같이 빠져나온 모양이다. 다행히 지금 비사문천은 없다. 마침내 쇼우는 결심을 하고 성련선으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그때, 방문을 누군가가 두들겼다. 쇼우는 혀를 차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보통 때라면 쇼우의 대답이 없으면 그냥 가겠지만, 오늘만큼은 문이 열렸다. 서 있는 요괴는 당연히 나즈린.


"어딜 가시는 겁니까."

"잠시 갔다 올데가 있습니다. 그럼."

"동료분들에게 가십니까?"


쇼우가 홱 돌아보았다. 약 천 년 동안 비사문천의 밑에서 수행을 쌓으며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진 쇼우였지만 그녀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어김없이 예전으로 돌아갔다. 지금처럼.


"비켜주시겠습니까? 나즈린, 난 바쁩니다."

"주인님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 역할이 무엇인지."


나즈린은 쇼우의 생각까지도 눈치채고 있었다. 자신이 비사문천이 붙인 감시역이라는 사실을 쇼우가 알고 있다고. 역시 비사문천이 작은 현장이라 부르며 신뢰할 정도의 비상한 두뇌다. 


"비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무력이라도 쓰실 작정이십니까?"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나즈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쇼우는 사방에 탄막을 뿌리며 나즈린을 압박했다. 나즈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다가 자그마한 구슬을 꺼내 들었다. 조용히 진언을 읊조리자 갑자기 모든 탄막들이 사라졌다. 놀란 쇼우는 재차 탄막을 뿌리며 돌진하려 했지만, 갑자기 강한 압박감을 느끼며 그 자리에 쓰려졌다. 마치 중력이 100배쯤 증가한 느낌이다.


"비사문천의 결계입니다. 요력을 제압하는 결계이지요."


나즈린 본인은 무사한 걸로 미루어보아 저 구슬이 매개물이고 매개물을 소지한 요괴는 무사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저걸 빼앗는 것이 급선무다. 요력을 쓸 수 없으니 남은 건 비사문천에게 익힌 법력뿐. 일전에 비사문천에게 하사받은 보탑을 꺼내 공격하려 했지만, 문득 옆구리에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보탑이 보이지 않았다. 


"제길, 잃어버렸나?"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대로 끝인가?


"포기하시고 얌전히 절에 계신다고 약속하면 풀어 드리겠습니다. 괜한 고생 하시지 마시고 맹세하시길."

"그…럴순 없습…니다!"

"그러면 계속 그렇게 계십시오. 비사문천께서 오실 때까지."


나즈린은 끝났다고 판단하여 몸을 돌렸다. 지금이 기회다. 본래 끝났다고 생각한 때가 가장 위험한 때이다. 쇼우는 이를 악물었다. 결계가 요력을 제압한다면 더 큰 요력으로 결계를 제압하면 그만이다. 지금도 그녀는 봉인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봉인된 천 년의 세월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스스로 암시를 걸고, 마침내 일어섰다. 그리고 달렸다. 발소리를 들은 나즈린이 뒤를 돌아봤을 땐 이미 늦었다. 쇼우의 영혼을 담은 펀치가 배에 작렬했다. 자연히 나즈린의 손에 힘이 빠졌고 구슬이 허공을 거쳐 쇼우의 손에 떨어졌다.


"하아, 그럼 이제 난 가보겠습니다."

"죄송하지만, 그건… 안됩니다."


날아간 나즈린이 자세를 고쳐잡고 재차 진언을 외우자 아까보다 더 강한 힘이 쇼우를 내리찍었다. 


"무슨…!"

"으으, 당연히 가짜입니다. 진짜를 당당히 들고 싸울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나즈린 정도 되는 요괴가 중요한 매개물을 보란 듯이 꺼내서 싸울 때 의심을 했어야 했다. 평소라면 침착하게 여러가지 생각을 해서 더 나은 결론을 도출했을 테지만, 지금 쇼우의 머릿속은 모조리 그녀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냉정한 판단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방금전과는 다르게 쇼우는 쓰러지지 않고 두 발로 서 있었다.


"응?"


나즈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진언을 계속 외웠다. 두 배, 세 배, 네 배, 점점 더 많은 압력이 쇼우를 짓눌렀지만 쇼우는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애꿎은 땅에 발이 파고들 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구하러 가는걸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작지만 뚜렷하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했다. 버티기도 어려운 상황에 말까지 하다니. 천 년간 쇼우를 관찰해온 나즈린은 쇼우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다. 쇼우는 이미 한계를 넘었다. 오직 그녀에 대한 집념 하나로 서 있는 것이다. 나즈린은 쇼우의 정신력에 탄복했다. 그리고 짧게 진언을 내뱉었다. 압력은 소리없이 사라지고 무형무색의 결계는 존재 자체를 감추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제야 쇼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나즈린이 다가오자 다시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런데 나즈린은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다가와 쇼우의 앞에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이게 뭐죠?"

"당신의 의지를 시험했습니다."

"……."

"당신이 천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법계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시험해 본 것입니다. 이제 당신의 의지를 알았으니, 전 당신의 편입니다."

"갑자기 무슨 생각입니까?"

"그분을 생각하는 마음에 감명받았다고 해 두지요."


고개를 든 나즈린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다우징을 챙겼다.


"그럼 갑시다. 비사문천께는 말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나즈린."


나즈린이 이런 친근한 말투고 쇼우에게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천 년 동안 언제나 사무적이고 수동적인 말투가 아니었던가. 쇼우의 진심이 나즈린에게도 전해졌기에 나즈린도 진심으로 그녀를 도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까 싸울 때 왜 보탑을 꺼내지 않으셨습니까? 훨씬 유리했을 텐데."

"어, 그게… 실은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는 게 잃어버린 듯합니다."


미소를 띄고있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맥이 풀려버린 탓이다.


"그런 표정은 처음 보는군요. 나즈린."

"저도 당신의 이런 면모는 처음 봅니다."


둘은 동시에 웃었다.


"보탑은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제 능력이면 금방이니까요."

"부탁합니다. 나즈린."

"부하가 주인의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출발합시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즈린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확실히 쇼우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방금전만 해도 결계에 억눌려지고 있었으니. 빈말이라도 좋은 컨디션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쇼우는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녀를 구할 생각만 해도 힘이 솟아나니까요."

"…중증이군요."

"방금 뭐라고 했죠, 나즈린?"

"아니, 아닙니다. 빨리 출발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능청스럽게 손을 내젓는 나즈린. 쇼우는 그저 웃었다. 


"그럼 갑시다."


드디어 때가 왔다. 그녀와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할 시간이, 그녀를 다시 세상 밖으로 내보낼 시간이, 그녀에게 멋진 환상향을 보여줄 시간이, 그녀를 구할 때가. 이젠 쇼우가 구해줄 차례였다. 산에 침입하는 인간이나 요괴를 죽이는 일만 반복하며 언젠간 퇴마사에게 죽을 운명이었던 쇼우를 그녀가 구해준 것처럼.


"이제 히지리에게 은혜를 갚을 차례입니다."


그녀, 히지리 뱌쿠렌을 구하러.










이것도 예전 작품.

환소담 오픈 기념 공모전 출품해서 5등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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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내 몸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거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나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내 존재를 자각하자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내가 왜 살아있는가, 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분명히 죽었다. 내가 죽기 직전의 순간까지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내가 생전에 보았던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아닌 이상 붕괴되는 건물 속에서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왜? 수십 번을 생각해봐도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나는 현재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상체가 바람에 흩날리는 건 느껴지는데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다. 하체는 마치 갯벌에 빠진 다리처럼 푹 박혀서 움직이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는 바람 소리, 그리고 각종 풀과 꽃들이 흔들리는 소리뿐. 보이는 것 또한 풀과 꽃뿐이다. 그런데 눈높이가 딱 눈앞에 핀 새빨간 꽃과 같았다.


그렇군. 마침내 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난 죽어서 꽃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헌데 환생을 하는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된 것인지 인간일때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꽃임에도 인간과 비슷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생각도 할 수 있고. 염마가 실제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다시 죽어서 염마를 만나게 된다면 한번 따져보아야 겠다.


그래도 제법 나쁘지 않은 광경이다. 보아하니 문명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은 시골인 듯했다. 어릴 적에나 보았던 새파랗게 우거진 풀과 나무들이 참 보기 좋았다. 무엇보다 주위에 핀 새빨간 꽃들이 매우 몽환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간다. 아, 나도 저 꽃처럼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을까. 이왕 꽃이 된 거, 예쁜 꽃으로 태어나 순수한 소녀의 손에 들려 자그마한 꽃병에 꽂혀서 생을 마감하면 소원이 없겠다. 


그때, 바스락하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오고 있었다. 스스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어서 머릿속에 물음표만 42개째 띄우던 찰나, 그 사람의 모습이 나의 시선이 포착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소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밝은색 계통의 체크무늬 옷과 하얀색 블라우스. 손에 든 하얀 양산과 잘 어울리는 녹색 머리. 깊고 맑은 연두색 눈동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밝은 미소. 


아아, 여신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총각, 아니 이제는 꽃이지. 여하튼 열매를 맺지 않은 꽃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물론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다. 나는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무수한 꽃 중 하나일 뿐이니까. 설령 그녀가 꽃을 원해서 이곳에 왔다고 해도 주변의 붉은 꽃들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내가 선택될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소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생긋 웃었다. 주위에 예쁜 꽃들이 많아서 행복한 모양이다. 나도 그녀의 행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게 기뻤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이렇게나 많은 피안화라니…."


소녀는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주위에 붉은 꽃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저 아름다운 꽃의 이름이 피안화인가. 나도 나름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꽃에 대한 지식은 꽤 해박한 편이지만 피안화라는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마 이 지방에만 피는 특이한 꽃인 모양이다.


"60년에 한 번밖에 이 광경을 즐기지 못하는 게 슬플 따름이야."


60년에 한 번? 60년마다 피는 꽃인가? 그렇다면 정말 희귀한 꽃이다. 그런데 소녀의 말투는 마치 이 60년마다 피는 꽃을 여러 번 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분명히 외형은 이제 10대 후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으음… 에이, 하지도 못하는 추리는 그만두자. 머리만 아프다. 그냥 저 소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꽃의 선녀라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어머? 이 빛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색깔인데."


갑자기 소녀가 무언가 발견했는지 무릎을 펴고 조심스럽게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의 심장이(엄밀히 말하면 심장이라는 기관은 이미 없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심장)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내 앞에 멈춰줘. 내 주위의 꽃을 선택해 줘. 그래서 일 초라도 더 나의 가까이에…!


그런데 놀랍게도, 소녀의 얼굴은 점점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소녀의 얼굴과 나의 얼굴(꽃잎)이 거의 닿을 거리까지 접근했다. 소녀는 말없이 몇 초간 관찰을 하더니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그러더니 손으로 조심스럽게 나를 잡았다. 아! 그 따스한 감촉이란. 이 환희와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다.


소녀가 나의 꽃잎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러자 갑자기 나의 내면에서 에너지가 마구 솟구치기 시작했다. 에너지는 온몸으로 퍼져 나갔고 이내 내 몸은 생기를 가득 머금게 되었다. 마치 소녀가 내게 생명 에너지를 건네준 듯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피안화도 오랜만이네."


다행이다. 나는 소녀의 마음에 들 만큼 아름다운 모양이다. 나중에 염마를 만나면 절대로 화내지 말고 감사부터 해야겠다. 이런 꽃으로 태어나게 해 줘서 고맙다고.


그때, 나와 소녀의 시간을 방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소녀 쪽으로 온 것이다. 


"카자미 유카!"


앳된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이쪽도 어린 소녀다. 하지만, 평화 그 자체인 소녀의 목소리와는 달리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녀의 이름이 카자미 유카인 모양이다. 카자미 유카. 유카. 그녀의 외모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어머, 하쿠레이의 무녀로구나."


"어머, 라니!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이 이변은 네 짓이지?"


"미안하지만 잘못 짚었어. 물론 내가 할 수는 있지만, 이건 내가 일으킨 이변은 아니야."


"거짓말 하지마! 좋아, 그렇다면 승부야! 너에게 이기고 나서, 진실을 듣겠어."


"좋으실 대로. 단, 나에게 이긴다면 말야."


그러더니 유카가 날았다. 문자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설마 진짜 선녀란 말인가? 하늘 높이 날아가서 더는 유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뒤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조금 전에 온 신경질 소녀와 싸우는 모양이었다. 제발 그녀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덧 싸움이 끝났는지 요란한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날고 있던 두 소녀가 땅으로 내려와 숨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유카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이겼네. 하쿠레이의 무녀님?"


"윽……!"


"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한가지 힌트를 줄게. 사신을 찾아."


"사신?"


"환상향을 담당하는 붉은 머리의 땡땡이 사신. 뭐, 찾을 필요 없이 곧 올 것 같지만."


유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갑자기 나에게 왔다. 그리고 나를 가리키며 신경질 소녀에게 말을 했다.


"이 피안화를 보렴."


"오늘 너무 많이 봐서 짜증밖에 안 나는데."


"이 피안화는 다른 피안화와는 조금 다르지 않니?"


"어머, 그렇긴 하네. 확실히 다른 피안화들보다 훨씬 아름다운걸."


"그렇지?"


유카가 천천히 손을 뻗어 나의 꽃잎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온기가 가득 담긴 부드러운 손길. 부처의 자비로운 손길조차 그녀에 미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피안화는 영혼이 머무르는 꽃. 때문에 피안화의 아름다움은 머무르는 영혼에 따라 결정되지. 그 영혼이 생전에 얼마나 아름답게 살았는지에 따라 피안화의 아름다움은 달라져."


유카의 말 대로라면 나의 삶이 아름다웠다는 것인가? 일개 회사원으로 평범한 삶을 보내던 내가? 남들과 다른 점이라면 단지 취미가 봉사활동이라는 것 밖에 없을텐데. 그리고 죽을 때, 남을 살려주고 죽은 것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삶이 아름답다는 건가?


"이 꽃에 머무르는 영혼은… 틀림없이 아름다운 삶을 살았겠지."


아아, 그런가. 나의 삶은 아름다웠구나. 나조차 모르는 사실을, 유카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너는 어때, 네가 죽어서 피안화에 머물게 된다면 이 꽃보다도 더 아름다울 수 있겠니? 이변만 생기면 요괴를 패고 다니기 바쁜 네가?"


"윽."


신경질 소녀는 기세가 한풀 꺾인 채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본인 스스로 찔리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겠지.


"내가 볼 땐 넌 아름다운 피안화가 될 수 없어. 그러니 좀 더 삶을 열심히 살도록 하렴."


"마치 염마님 같은 말을 하는군."


갑자기 또 다른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3의 소녀가 나타난 것이다.


"댁이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아도 저 무녀는 염마님께 똑같은 소릴 수없이 들을 테니 댁까지 그럴 필요는 없어."


"넌 일단 일부터 하는 게 어때?"


유카가 살짝 화를 내며 말했다. 그 기세에 눌린 제 3의 소녀는 약간 어눌한 어조로 답했다.


"때때로 사신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구."


"때때로 가 아닐 텐데."


"저기, 사계절의 플라워 마스터님? 제게 말할 때도 꽃에 대해 이야기 할 때처럼 해주시면 안될까요?"


"꽃이랑 넌 다르잖아."


"…이럴 땐 보통 꽃보다 사신의 인권이 우선이지 않아?"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


결국 제 3의 소녀가 졌다는듯이 태도를 바꾸었다.


"네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제 일을 처리해야 하니 두 분은 신사에서 차라도 한 잔 하며 담소라도 나누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염마님이 오실 겁니다."


염마? 염마도 실제로 있는 건가. 하긴, 선녀도 있는데 염마가 없을 이유는 없잖아? 아무튼 신경질 소녀와 유카는 염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염마가 온다고 하니 곧 떠날 준비를 하는 걸로 미루어보아.


"아참, 땡땡이 사신?"


"오노즈카 코마치. 이름은 좀 기억해 주는 게 어때? 한두 번 보는 사이도 아닌데."


"저 피안화에 머무는 영혼은 대우를 좀 해 줘. 아름답잖아?"


"오? 확실히 그렇군. 최근에 본 피안화 중에 가장 아름다운데. 저 정도라면 내가 굳이 특별대우를 해 주지 않아도 염마님께 좋은 판결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자, 그럼 이분부터 모셔볼까."


순간 내 몸이 붕 떠오르는 감각을 느끼며 제 3의 소녀의 손에 이끌려 자그마한 나룻배에 탑승했다. 그제서야 나는 자신을 오노즈카 코마치라고 소개한 제 3의 소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붉은색 갈래 머리에 블라우스와 긴 스커트를 입고, 굽이 높은 게다를 신어 제법 눈에 띄는 모습이었지만 무엇보다 눈에 들어오는 건 손에 든 커다란 대낫이었다. 유카가 사신이라도 하더니만, 진짜 사신인가?


"이 대낫이 좀 멋지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겐 사신은 낫을 들고 있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결국 들게 되었어.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는 사신들도 있지만 나는 이 낫을 꽤 좋아해."


코마치는 내가 낫에 관심을 둔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과시하려는 듯 대낫을 크게 몇 번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이 위협적이었다. 내가 살짝 움찔거리자 씨익 웃으며 나룻배 한쪽 구석에 낫을 내려놓았다. 대신 나룻배에 놓여 있던 긴 노를 들었다. 


"자, 그럼 출발할까."


그리고 배를 천천히 저어가기 시작했다. 여자치고는 신장이 꽤 큰 편이지만, 그래도 여자가 배를 저어가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능숙하게 저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그런데 형씨. 아까 그 녹발의 요괴 봤지?"


요괴? 요샌 선녀도 요괴로 취급하는 모양이다. 뭐, 인간 외의 존재를 요괴로 규정하면 틀린 말은 아닐지도….


"그 요괴 참 성질이 고약하지 않아? 오죽하면 히에다 가의 환상향 연기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겠어. 인간우호도도 최악이고."


그건 아니다. 유카가 성격이 나쁘다니?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어떻게든 저 소녀에게 부정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행히 내 노력이 빛을 발해 나의 몸은 아주 조금 좌우로 움직였다.


"응? 아니라고? 하긴, 저 요괴는 꽃에게는 한없이 친절하니까. 형씨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을 수 도 있겠군. 뭐, 형씨의 견해가 그러하다면 더는 말하진 않지. 사람은 각자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까 말이야." 


소녀는 하핫, 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노를 저어갔다. 




그 후로 나는 염마를 만나서 재판을 받고 명계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지금까지 별 일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지만, 다른 유령들과는 달리 최대한 빨리 전생하려고 애쓰고 있다. 물론 나는 사람으로 전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꽃으로 전생하여,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만나보고 싶다. 꽃을 사랑하는 요괴, 사계절의 플라워 마스터, 카자미 유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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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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