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공터에서 어린아이 여럿이 뛰놀고 있었다. 항상 전운이 감돌고 있는 안개의 도시지만, 아이들만큼은 여느 도시의 아이들처럼 밝고 명랑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어른들이지만, 이런 아이들의 모습은 진영을 막론하고 누구나 바라는 모습이겠지.

특히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밝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아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뛰어다니며 웃음을 뿌리고 있었다. 언뜻 보면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아이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얘기가 달라졌다. 그 궤적을 따라 밝은 별빛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게 아닌가. 주변에 같이 놀던 아이들은 연신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보였다. 하지만 개중에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아이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기겁을 하며 달아났겠지. 능력자들이 세상에 나온 지 제법 되었건만, 아직도 일반인들에게 능력자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벤치에 앉아있던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다. 조금 더 놀게 해주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

엘리! 시간이 됐단다. 이제 가자.”

우웅, 더 놀면 안 돼?”

붉은색 후드를 쓴 아이는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토했다. 한창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할 나이다. 그렇기에 나도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 약속은 지켜야지. 나는 엘리에게 천천히 다가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일 다시 오면 되잖니. 오늘은 이만 가자꾸나.”

, 아라써!”

내일 다시 온다는 말에 엘리는 표정을 밝게 하고 주변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내 손이 엘리의 머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건 내 손이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는 게 아니다. 엘리의 머리가 내 손을 만지는 거다.

아직 나이가 어린 엘리는 주변에 지나가는 모든 게 신기했다. 길을 걷다가도 길가에 있는 풀을 유심히 살펴보기도 하고 지나가는 차에 호기심을 가지기도 했다. 멀리 날아가는 새를 보고는 열심히 손을 흔든 적이 있는데, 나중에 이유를 물어보니 트리비아인 줄 알았다고 했다. 날개가 달린 모든 생물을 전부 트리비아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용기사 중에 다리로 뛰어서 트리비아만큼 멀리 가는 남자가 있다고 하자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며 대형 폭죽을 터뜨렸다.

오늘은 엎드린 채로 잠을 자는 고양이가 신기한 모양이다. 커다란 고양이를 보더니 그 자리에 멈춰 지그시 고양이를 보고 있었다. 엘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양이는 한쪽 눈을 떠서 엘리를 보았다. 그러더니 대뜸 엘리에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엘리가 살며시 손을 뻗자 그 손에 얼굴을 비볐다. 엘리가 세상을 다 가진듯한 미소를 지었다.

길고양이가 사람을 잘 따르는구나.”

나도 엘리의 옆에 와서 고양이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놈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엘리 뒤로 숨는 게 아닌가. 조금 빈정 상했다. . 조금. 아주 조금이야. 손가락 끝에서 불꽃이 살짝 일렁거렸다.

나이오비 언니……. 나쁜 짓 많이 했쪄?”

갑자기 엘리가 울 거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깜짝 놀란 나는 엘리를 다독여주었다. 다행히 울음을 터뜨리진 않았다. 진정이 된 엘리를 붙잡고 이유를 물어보았다.

이글 아찌가 고양이는 나쁜 짓 한 사람 안다고 했어. 나쁜 짓 많이 하면 고양이가 그 사람 싫어한대.”

두통이 몰려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글 홀든……! 애한테 쓸데없는 얘기를!”

최근에 외출할 일이 많아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이글에게 애를 맡겼더니 되지도 않는 소리나 지껄이고 다니는 모양이다. 보나 마나 자기가 골탕먹이고 싶은 사람이 고양이를 싫어하는 거겠지. 덕분에 나까지 피해를 볼 줄이야.

정신을 차려보니 주먹을 쥔 손이 붉은색으로 덮여 있었다.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요기 라즈에게 배운 명상을 하자. 일단 크게 심호흡을 하고, 생각을 비우고, 마음을 편안하게. 그래. 천천히. 이글 따위 떠올리지 말고.

이글!”

명상을 포기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난다. 오늘 아침에 임무를 나가지만 않았어도 지금 당장 연합 본부로 뛰어가 모조리 태워버렸을 텐데. 언제 온다고 했지? 두고 보자. 이글 홀든!

불꽃을 화끈하게 일으키고 나니까 좀 진정이 되었다. 주변에 그을음이 잔뜩 생겼지만 애써 외면했다. 커다란 고양이는 어느새 도망가고 없었고 엘리는 나무 뒤에 숨어서 나를 보고 있었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 모습을 보자 내 가슴에 커다란 말뚝이 하나 박히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새삼 퇴치당하는 흡혈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미안하구나. 엘리.”

조심스레 다가가 안아주자 작은 몸이 내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갑자기 불을 내뿜는 내가 무서웠겠지. 요기 라즈에게 좀 더 제대로 된 방법을 배워야겠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엘리를 위해서. 에밀리아를 위해서.

그 이름을 되뇌는 순간, 가슴 한 편이 아려왔다. 에밀리아. 내 아이. 에밀리아. 에밀리아. 에밀리아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지금의 엘리만큼 되었을까. 엘리만큼. 나는 엘리를 꽉 끌어안았다. 한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나이오비 언니?”

미안하다. 미안해. 엘리야. 미안해…….”

울음을 그친 엘리가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지만 나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미안하다고 계속 사과만 할 뿐이었다.

 

눈물을 닦은 나와 엘리는 서둘러 모임 장소로 향했다. 이윽고 도시 외곽에 있는 어느 허름한 술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알코올 냄새가 확 풍겼다. 이것들이 애 데리고 오는데 술 좀 자제하라고 했더니……. 하긴, 술을 앞에 두고 그럴 리가 없지.

, 엘리 왔나?”

커다란 맥주잔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키던 도일이 엘리를 보고 손을 흔들자 엘리가 쪼르르 달려가 안겼다. 그러자 도일은 맥주잔을 거칠게 놓고 엘리를 들어 어깨 위에 앉혔다. 덩치는 산만한 남자가 애들은 참 좋아한다니까.

와아, 높아! 도일 아찌 크다!”

아이씨가 좀 크다 아이가. 쩌기 주먹 잘 쓰는 놈만 빼면 내만한 덩치가 없다카이.”

, 그랑플람 재단의 곰 같이 생긴 사내도 있긴 하지.”

같이 마시고 있던 휴톤이 거들었다. 옆에 빈자리에 앉은 나는 주인에게 알코올이 없는 음료 한 잔을 주문했다. 술을 싫어하진 않지만, 엘리 앞에서 마시고 싶진 않았다. 한편, 도일의 어깨에 앉은 엘리는 오늘 있던 일을 말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나이오비 언니가 과자도 사줬어!”

내한테는 술 한 잔 안 사주는 가스나가 아한테는 디게 잘 해주노.”

엘리에게 말하며 도일은 호탕하게 웃었다. 한 번도 사주지 않은 내게 섭섭해서 이런 말을 했다기 보단 그만큼 내가 엘리에게 잘해준다는 의미로 한 말이리라.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조용히 음료를 홀짝였다. 이윽고 도일의 어깨에서 내려온 엘리가 나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나는 말없이 엘리를 내 옆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꼬맹이에겐 이게 어울리지.”

어느새 휴톤이 엘리 앞에 우유병을 내려놓았다. 엘리는 반색을 하며 우유를 들이켰고, 우리는 각자 앞에 놓인 음료를 마셨다. 가만히 앉아 있자 주변에 있던 지하연합의 사람들이 엘리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갔다. 그때마다 엘리는 별빛처럼 반짝이는 미소를 지었고, 나는 더없는 행복을 느꼈다.

슬슬 가야겠군.”

가게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휴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일어나려고 했지만, 문득 술을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앉았다. 슬슬 술집에 사람이 많이 줄어들 시간이니, 조용히 혼자서 마실 수 있겠지.

미안한데 엘리를 데리고 먼저 가 줄래?”

, 그러지.”

내 심정을 읽은 휴톤이 도일과 엘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저 둘이 있으면 엘리도 안심이다. 연합에 가면 엘리와 놀아줄 피터도 있고, 토마스나 루이스도 있으니 지금은 잠시 엘리 생각을 놓아도 되겠지.

이윽고 주문한 칵테일이 도착했고 나는 혼자서 홀짝이기 시작했다. 낮에 울었던 일을 떠올리니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에밀리아. 나는 평생 그 아이를 가슴 속에 품고 지내겠지. 그것이 나 자신을 갉아먹는다 해도,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좀 의외였어.”

누군가 내 쪽을 향해 말을 건넸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시간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아마 다른 사람을 향한 말이 우연히 내 귀에 들어온 것이리라. 헌데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인데…….

당신이 아이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하다니. 잉게 나이오비.”

기억났다. 사람의 신경을 긁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는 고개를 홱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구석 테이블에 혼자 앉아있는 금발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있는 여성은 지나가던 남자들이 한 번쯤은 고개를 돌릴 굉장한 미인이었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를 한 번 쳐다봤을 뿐.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2차 능력자 전쟁의 한 획을 그은 능력자 엘윈의 드니스이니까.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네가 왜 여기에 있지?”

그녀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쏘아붙였다. 내 손끝에 맺힌 불꽃이 살짝 떨렸다. 잠시 내 손을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감정이 없는 표정이었다.

술집에 오는데 다른 용무가 있던가?”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긴 그냥 술집이니까. 그러나 이곳은 지하연합의 사람들이 많이 오는 단골 술집이다. 회사의 능력자가 올 만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나저나 도일하고 휴톤은 드니스가 있는데 왜 말을 안 해준 거야. 둘 다 너무 사람이 좋아서 탈이야. 회사의 능력자들과 한 번 같이 작전을 수행했다고 완전히 화해한 것처럼 하고 있으니. 내게 저 여자가 어떤 짓을 했는지 잊은 건가? 하긴, 다른 사람이 알 턱이 없지. 그 고통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니까.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술집에 왔으면 조용히 술 처먹고 꺼져.”

엘리…… 라고 했던가, 저 아이?”

이번에는 그녀가 내 말을 못 들은 척 받아넘긴 채 자기 할 말을 꺼냈다. 웬만하면 무시하려고 했는데 엘리의 이름을 꺼낸 이상 무시할 수도 없게 되었다.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에게 한 마디라도 싫은 소리를 꺼낸다면, 철저히 응징하리라.

엘리가 왜?”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네.”

굉장히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보나 마나 내 속을 긁는 말을 꺼낼 거라 생각했는데. 하긴 아무리 비뚤어진 사람이라도 별빛처럼 빛나는 엘리를 본다면 절로 미소를 짓게 될 테지. 아무렴. 이 여자도 뜻밖에 좋은 면모가 있구나.

그럼.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모아온다 해도 저 아이에겐 미치지 못할걸?”

비뚤어진 너와는 달리 말이지.”

또다시 툭, 하고 내게 악담을 던졌지만, 이 정도는 용서해줄 수 있다. 지금 우리 엘리가 저 머리에 꽃을 꽂은 여자에게 찬사를 들었는데 내가 욕 좀 먹은 게 대수인가. 얼마든지 맛나게 먹을 수 있다. 오늘은 내게 무슨 소리를 해도 용서해주마. 그렇게 마음먹었다.

너의 그런 눈빛은 카인을 볼 때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방금 한 말은 취소다. 역시 저 여자는 좋아할 수가 없다. 여기서 그 사람의 이름은 또 왜 꺼낸단 말인가.

혼자 술 먹으러 왔으면 조용히 처먹지그래?”

아는 사람이 있는데 혼자서 먹기만 하는 것도 그렇지 않아?”

알기는 개뿔이. 그래, 아는 사이는 맞지. 친밀한 지인이 아니라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철천지원수라 그렇지. 저런 가시 돋친 말을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무표정으로 할 수 있다는 게 더 놀랍다. 식물을 조종하는 능력자라서 그런가? 평소에도 가시를 많이 다루기 때문에 세 치 혀로도 가시를 능숙하게 다루는 건가?

저번 달에 너를 봤어.”

……!”

설마 그걸 본 건가. 그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었던 그 장면을. 특히 저년에게는 정말 보이기 싫었던 그 장면을!

카인에게 선물을 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뒤돌아서는 네 모습을 말야.”

……어떻게?”

나도 카인 주변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불에 크게 덴 이후로는 불을 다루는 능력자들을 감지하는 연습을 많이 했거든. 너나 불의 마녀 정도는 가까이 있으면 눈치챌 수 있어. , 아직 불완전하지만 스노우 퀸도 포함되겠군.”

혼자서 주절주절 설명하였지만 그 목소리는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하얗게 백지가 된 머릿속이 붉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불꽃을 나의 내면을 차지한 것으로 모자라 서서히 밖으로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드니스는 다시 한 번 내 심장을 찔렀다.

아이에게는 그렇게 잘 표현하면서, 카인에게는 왜 하지 못하지? 거절이라는 걸 모르는 아이와는 달리, 카인에겐 거절당할 게 뻔하니까 그런 건가?”

……닥쳐.”

겁쟁이구나. 잉게 나이오비. 넌 그저 걸어 다니는 재앙 덩어리일 뿐이야.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 한 번 할 줄 모르는, 쓸모없는 재앙 덩어리지.”

 


그 입 닥쳐!”


 

순간 나이오비의 주변이 폭발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은 주변에 있던 의자와 탁자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나이오비는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양손에는 불꽃이 가득했다.

너무 도발한 건가. 하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한 마디 쏘아주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이것 또한 심장의 외침이리라. 카인을 대할 때 두근거리는 심장과는 다르지만, 내가 거부할 수 없는 본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나와 그녀는 상극이다. 소속부터가 회사와 연합이고, 능력 또한 판이하다. 나는 싱그러운 자연이고, 그녀는 나를 태우는 불꽃이다. 그리고 한 남자를 두고 다투는 사이이기도 하다. 물론 그 남자는 정작 다른 여자만을 보고 있지만.

그래서 심장의 외침에 따라 그녀를 도발했지만, 좀 심했던 모양이다. 연합의 스카우터 요기 라즈에게 명상을 배웠다고 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직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한단 말이지. 그나저나 좀 위험한 수준이다. 이대로 가다간 포트레너드 사건의 재림이 될지도 모르겠다. 슬슬 말려볼까.

근데……. 어떻게 말리지?

진정해. 잉게 나이오비. 죄 없는 술집을 태울 셈이야?”

닥쳐. 닥치라고! 이 썩을 년이!”

나이오비의 손에서 한 줄기 불꽃이 날아왔다. 나는 급히 내 주변에 꽃을 세워 방어했다. 곧이어 두 개의 화염구가 추가로 날아왔지만, 내가 세운 꽃잎은 굳건하게 버티었다. 그렇지만 점점 불꽃이 거세지고 있었다. 내 꽃잎도 위험하지만, 이 술집도 서서히 불이 번지고 있었다. 곤란하게도 나는 불을 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내 몸 하나 간수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지만, 자칫하다간 이 술집이 날아가게 생겼다. 거기에 창고에는 알코올이 다량 함유된 술이 많다. 어쩌면 큰 폭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포트레너드 사건을 생각해.”

이만하면 손을 멈출 때가 되었을 텐데?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불길은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분명히 내 화법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역시 너무 화를 돋궜나. 아무래도 슬슬 술집을 버리고 내 몸을 빼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구원의 손길이 왔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루이스와 트리비아가 들어온 것이다. 아마 연합 사람들과 친한 주인장이 연락한 모양이다. 빙결 능력자인 루이스가 왔다면 안심해도 되겠지.

나이오비! 그만 해!”

루이스가 주변에 얼음을 만들어 불 위에 덮기 시작했고 트리비아는 나이오비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저렇게 하면 뜨겁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과연, 트리비아의 옷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트리비아는 나이오비를 놓지 않았다. 다행히 효과가 있는지 나이오비의 몸에서 나오는 불길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술집에 옮겨붙은 불은 이미 루이스가 모두 진화한 뒤다.

술집에서 연합의 발화 능력자가 불을 냈다고 해서 왔더니, 다행히 끝난 모양이군.”

어느새 뒤쪽에 나타난 알베르트 로라스가 말했다. 과연 각력 능력자. 이럴 때는 신속하게 지원을 와 준다. 그나저나 로라스가 이곳에 왔다는 건 이미 소문이 많이 퍼졌다는 이야기인가? 돌아가면 이사가 날 호출하겠군.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던 두 여자는 이윽고 술집을 나섰다. 남아 있던 루이스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가?

무슨 일인가, 루이스?”

침묵하고 있는 나와 루이스 대신에 로라스가 거들어주었다. 잠시 로라스를 쳐다보던 루이스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로라스 씨. 다음에는 좀 더 좋은 일로 뵈었으면 좋겠군요.”

나도 마찬가지일세.”

인사를 마친 루이스도 두 여자를 따라나갔다. 잠시 술집을 둘러보던 로라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왜 이런 일을……. 하마터면 포트레너드 사건이 또 일어날 뻔했지 않나.”

도발이 다소 지나쳤던 모양이야. 인정하지.”

도발이라는 단어에 로라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상당히 언짢은 표정이다. 하긴 정의를 중시하는 그는 남을 도발하는 일 따윈 하지 않을 테니까. 저급한 행위로 보이겠지. 그렇다 해도 상대가 같은 회사 소속인 여성이기 때문에 무어라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도 정말 로라스답다.

일단 가지. 이사님이 내일 아침에 보자고 하시는군.”

역시나 이사의 호출인가. 차라리 대표의 호출이면 좋으련만. 전대 대표인 명왕과는 달리 지금의 대표인 브뤼노는 둥글둥글한 성격에, 호색한이기 때문에 예쁜 여자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다. 웬만한 실수를 해도 나나 타라같은 미인이라면 넘어가 주는 편이다. 하지만 윌라드 이사는 사소한 것 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다음 날 아침 만난 윌라드는 나의 예상대로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였다. 책상에 쌓여 있는 서류를 보니 오늘 할 일도 제법 많은 모양인데, 내가 더 일을 만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타이밍이 안 좋다.

그녀를 도발해서 어쩔 작정이었습니까?”

글쎄, 별생각 없었는데.”

솔직하게 대답했지만 그게 이사의 화를 더 돋운 모양이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는 한쪽에 쌓여 있던 서류를 내 앞에 던졌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그럴 리가. 나는 회사 소속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능력자로서 소속된 것일 뿐. 문서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는다. 이런 건 타라나 다이무스가 하는 일이지.

방금 연합에서 보내온 서류입니다. 오늘 있었던 사건의 보상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슬쩍 곁눈질로 보니 적지 않은 금액이 적혀 있었다. 술집에 대한 보상 금액 말고도 정신적 치료비까지 포함을 시킨 모양이다. 설마 이걸 이렇게 써먹을 줄은. 분명히 전에 봤던 연합의 그 참모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겠지.

덕분에 토니 리켓이 좋아서 날뛰고 있겠군요. 제가 그 녀석에게 건수를 잡혀야겠습니까?”

매사에 날카로운 헬리오스의 이사는 연합의 참모에 대해서도 크나큰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하긴, 윌라드가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명왕과도 사사건건 부딪치던 그인데.

내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잠시 손으로 머리를 짚더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했다.

이미 벌어진 일, 잔소리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당신에게는 근신 처분을 내리겠습니다. 당분간 회사 근처를 벗어나지 마십시오. 제가 말하기 전까지 말입니다.”

생각보다 크지 않은 처벌이다. 아마 최근 연합과의 사이가 다시 나빠지고 있어서 능력자들의 컨디션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함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방을 나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내 방에서 푹 쉬어야겠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 방을 향해 가는데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한 건 했다면서, 드니스?”

쾌활하게 말을 건네는 붉은 머리의 여자는 타라였다.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티 없는 성격이라 회사 내에서도 인지도가 높다. 나도 어느 정도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이기도 하고.

그렇게 됐어.”

그나저나 나이오비는 아직 불안정한가 봐?”

그녀의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건 회사나 연합에 있는 능력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내가 잠시 의문을 품자 내 표정을 본 타라가 말을 정정했다.

정신 말고. 불꽃 말이야.”

생각해보니 타라는 나이오비와 같은 발화 능력자였지. 물론 나이오비처럼 통제하지 못하는 재앙이 아니라 완벽하게 다룰 줄 아는 안정된 불꽃이지만.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관점으로 그녀를 보는 것도 당연하다.

여전히 불안정해. 인도 출신의 스카우터에게 정신을 통제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는데 썩 효과는 없는 듯해.”

, 그래?”

그녀가 골몰히 생각하며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불꽃이 흩날렸다. 허나 나이오비의 일렁거리는 불꽃과는 다르다.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듯이 무절제한 그 불꽃과는 달리, 타라가 만들어 낸 불꽃은 확실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역시 회사의 에이스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다. 불이라면 전부 싫어하는 나지만, 그녀의 불꽃이라면 믿을 수 있다.

좋아, 그럼 한 번 가볼까.”

어딜 가는 거지?”

불의 마녀는 씩 웃었다. 장난꾸러기 요정 같은 미소였다.

 


어디긴 어디야. 연합이지.”

 


언제나 무표정한 드니스에게 인사를 건네고 회사를 나섰다. 나이오비 잉게. 언젠간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되었으니 만나봐야지.

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지만 나는 내 할 일을 다 했다. 어차피 난 계약직 비서인걸. 내가 할 일만 다 하면 끝이야. 은근슬쩍 연구실로 도망치려는 드렉슬러를 잡아 서류 앞에 앉혀 놓았으니 알아서 하겠지.

연합의 본부에 도착하니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회사의 에이스라는 거창한 이명을 달고 다녀서 그런지 내 이름은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다. 물론 내 빨간 머리와 어깨가 드러나는 옷도.

어이, 회사의 에이스가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지?”

나를 맞이하러 온 능력자가 누군가 했더니 이글 홀든이었다. 제법 말이 통하는 사람이 나와서 다행이다. 매사에 가벼운 사람이기 때문에 달래기도 쉬울 터. 게다가 다이무스에게 이글을 다루는 법을 전수받았지.

어머, 홀든가 제일의 쾌검사께서 나올 줄은 몰랐는데?”

호오? 보는 눈은 있구먼! 역시 회사의 에이스답군!”

역시나. 칭찬을 해주지 대번에 기분이 좋아져 크게 웃었다. , 여기서 결정타를 날려주도록 할까.

이렇게 보니까 다이무스보다 더 나은 거 같은데? 제레온이 물려준 세계 최고의 검사라는 타이틀이 사람은 잘 못 찾은 거 같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니까. 항상 큰형 얘기만 나오면 큰형을 누가 맡을 거냐 이러면서 한숨을 쉬는데 나 있잖아 나. 왜 그걸 모르지?”

그러면서 그는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관심 있게 들어주는 척하며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자 이내 신이 나서 말이 빨라졌다. 한참을 떠들던 도중 슬슬 때가 됐다고 생각한 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

아참, 방금 생각났는데 나이오비는 어때? 회사를 대표해서 사과도 할 겸 그녀의 상태를 보러 왔는데.”

, 그래? 이런. 내가 너무 길게 붙잡고 있었군. 하하, 미안.”

무안해서 머리를 긁적이던 이글은 이내 나와 함께 연합 내부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서도 수많은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커다란 회의장을 지나갈 때에는 나를 보는 시선이 너무나도 많아 전부 태워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정확히 눈알만 노려서 태워버리는 거지.

나이오비는 지금 많이 진정이 됐어. 그래도 휴식을 취해야 하니까 너무 길게 말하진 말고.”

그녀는 현재 안쪽에 있는 독방에 홀로 있었다. 혹시라도 감정이 격해져서 주변에 있는 사람을 태울까 염려해서라고 설명해 주었다. 환자를 독방에 방치하다니, 뭐 나이오비의 이명을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같은 불 능력자니까 잘 맞을지도 모르겠는데.”

독방의 문을 열어준 이글은 끝나면 불러달라며 바로 옆방에 들어갔다. 육중한 철문을 열자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나이오비가 보였다. 멀리서 본 적은 있지만, 직접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같은 능력을 지닌 능력자라 그런지 친근감이 솟구쳤다.

서로 얼굴 보는 건 처음이지? 발화 능력자 중에서 나를 제외하고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 꼭 만나보고 싶었어. 잉게 나이오비.”

……그래서 뭐지?”

하지만 나이오비는 내게 큰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같은 발화 능력자인데, 좀 더 자상한 시선으로는 볼 수 없는 건가? 물론 널린 게 발화 능력자지만 나와 너는 그중에서도 특별할 텐데. 그 때문에 나는 호감을 느끼고 있는 거고.

그냥.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 만나보고 싶었어.”

맞은편에 있는 철제 의자에 털썩 앉아 천천히 나이오비를 관찰하였다. 아직 마음이 완전히 진정되지는 않았는지 손끝에서 불꽃이 일렁거렸다.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은 그 형태가 뚜렷하지 않다.

나는 불의 마녀, 너는 재앙이라 불리는 이유는 알고 있지?”

나는 오른손을 들어 나이오비를 향해 뻗었다. 한 줄기 불꽃이 팔을 타고 손끝을 휘감았다. 나이오비의 불꽃과는 달리 모양이 제대로 잡혀 있었다. 불똥 하나 헛되이 흘리지 않고 정확히 내 손에 머물러 있는 불꽃을 보자 나이오비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주변에 불꽃이 더 많이 튀었다.

네 능력이 잘났다고 자랑하러 온 거야? 그렇다면 썩 꺼져. 태워버리기 전에.”

불을 다루는 능력자를 태워버린다고 하니 우스운 소리이긴 하지만 상대는 재앙의 나이오비다. 다른 발화 능력자라면 누구와 싸워도 압도할 자신이 있지만, 그녀는 다르다. 미세한 조정은 내가 훨씬 앞서지만 피아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태워버리는 화력은 그녀가 위다.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덤빈다면, 제아무리 나라도 무사하진 못할 터. 나이오비 또한 그 점을 잘 알고 있겠지.

오해하지 마. 자랑하러 온 건 아냐.”

그럼 뭐지?”

네가 원한다면, 내가 불꽃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어.”

나이오비가 나를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의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긴 지금은 잠시 휴전 상태지만 회사와 연합은 결국은 적이니까. 적대하는 단체의 중요 인물이 와서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다고 하면 뭔가 수상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나 하고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지.

회사의 에이스가 내게 왜 그러는 거지? 우린 적이야. 타라.”

반응이 너무 예상대로 나와서 하마터면 실소를 흘릴 뻔했다. , 이제 그녀를 설득할 적절한 이유가 필요할 타이밍이다.

드니스에게 들었어. 최근에 연합에 온 엘리라는 아이를 극진히 보살펴주고 있다며?”

나이오비의 표정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저 반응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엘리를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역시 그런가 보네. 그런 점은 마음에 들어.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고,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능력을 쓴다는 점.”

…….”

하지만 지금의 네 불꽃은 주변 사람을 상처 입힐 뿐이야. 그러니 내가 도와줄게.”

어느새 그녀의 주변에 있던 불꽃이 사라졌다. 나이오비는 내게서 눈을 뗀 채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아마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리라. 나는 조용히 그녀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던 적의는 매우 옅어진 상태였다. 어느 정도는 신뢰를 얻은 듯했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해도 될까.

타라. 진영에 얽매이지 않고 내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건 고마워. 하지만, 이건 내 일이야. 내 불꽃은 온전히 나의 것.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

그래? 아쉽네.”

거의 다 넘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부족했던 모양이다. 아쉽지만 미련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와 간단히 작별인사를 주고받은 뒤 방을 나섰다. 다시 이글을 부르려고 옆방 문을 열었는데 그곳에 이글은 없었다. 대신 안경을 쓴 청년이 앉아 있었다.

반갑습니다. 불의 마녀 타라 시바스 조노비치.”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날 아는 사람인가? 하긴 연합의 사람이라면 연합에 소속된 능력자들의 얼굴 정도는 숙지하고 있을 테지. 길을 걷다가도 종종 인사를 받는데 하물며 연합 내에서는 어떨까.

그런데 이글을 내보내고 대신 나를 맞이할 사람이라면 연합에서도 꽤 높은 사람 같은데, 누굴까. 일단 연합의 능력자들은 다 얼굴을 알고 있으니 아닐 테고. 스노우 퀸 앤지 헌트는 당연히 성별이 다르니 아니고.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한 명뿐이군.

토니 리켓?”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연합의 참모이자 2인자. 그리고 인형실 끊기 작전을 지시한 토니 리켓인가. 과연, 한눈에 봐도 총기가 넘쳐 보인다. 비능력자에 전투력도 거의 전무한 그이지만, 능력자 대부분이 그의 두뇌에 경의를 표하는 수준이니, 말 다했지. 물론 나 또한 그러하고.

모를 리가 있나. 인형실 끊기 작전에서 나 대신 도일을 데려간 사람인데.”

그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변수를 줄여야 했죠.”

내가 웃으며 농담 삼아 꺼낸 이야기에도 곧바로 허리를 숙이고 사과했다. 과연 소문대로네. 전쟁에서 전략과 전술을 짜는 참모이지만 의외로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는 것이. 하지만 막상 작전을 만들 때는 개인적인 감정을 모두 배제하고 냉정하게 판단하여 최상의 결과가 만들어지도록 한다는 점이 무섭다. 능력만 된다면 어린아이조차도 전쟁터에 내보내는 것을 고려하는 사람이니까. 예전에 회사에 있던 배신자 재스퍼도 뛰어난 참모였지만, 토니 리켓에 비하면 그도 범재에 지나지 않겠지.

그래서 이글 대신에 나를 에스코트해 주려고 여기 있는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야?”

당신에게 부탁할게 있습니다.”

부탁? 토니 리켓이 나에게? 회사를 통해서 연락을 넣지 않고 내게 직접 말하는 걸 보니 개인적인 부탁 같은데, 그가 내게 할 만한 부탁이 뭘까?

흐음, 들어보고 판단할게.”

나이오비씨에게 불을 통제하는 방법을 가르쳐줬으면 합니다. 보수는 드리지요.”

순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을 줄이야. 재밌는걸. 그는 어리둥절하게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한동안 박장대소를 그치지 못했다. 한참을 지난 뒤에야 나는 그에게 사과하며 말을 꺼냈다.

, 미안. 미안해. 사실 내가 여기 온 이유가 그거 때문이어서.”

당신이 나이오비씨에게 가르쳐주러 왔다는 말씀인가요?”

. 본인에게 거절당했지만.”

그렇습니까.”

그는 잠시 혼자서 골몰히 생각했다. 나이오비가 거절한 이유를 묻지 않는 걸 보니 대충 짐작이 간다는 건가. 곧 생각을 끝마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말했다.

어쨌든 알겠습니다. 그런 제안을 해 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회사 소속으로서 그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이 남자, 내가 회사 내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는지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알아도 예의상 해준 말인가? 어찌 되었던 제법 예의 바른 남자다. 꽤 마음에 들었다.

난 어차피 계약직 비서니까. 설령 명왕이라 할지라도 날 마음대로 하지 못해.”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자신감이 아니라 사실이니까. 내가 꿀릴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왜 내게 그런 부탁을 하는 거지? 나이오비을 좀 더 유효한 전력으로 쓰기 위해서인가?”

답을 알지만, 가벼이 질문을 던져봤다. 토니 리켓이라면, 아니 그가 아닌 누구라 해도 연합의 2인자라는 직책을 달고 있다면 마냥 Yes라고 대답하진 않을 것이다. 뭐라고 핑계를 대던, 둘러대던,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겠지. 그의 명석한 두뇌에서 나올 답이 궁금한데?

아닙니다.”

일단 여기까지는 예상대로. , 그럼 이제 뭐라고 대답을 할 셈일까.

안타리우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죠.”

?”

너무나도 의외의 답변이 나와 혼란스러운 나머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예상 답안을 열 개쯤 생각하고 있었고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거라 확신했는데 느닷없이 안타리우스라니. 이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안타리우스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대다수의 사람은 안타리우스는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안타리우스가 괴멸되지 않았다는 건가?”

회사와 연합은 인형실 끊기 작전을 시행하여 안타리우스의 수장 노인을 죽였다. 수장을 잃은 안타리우스는 붕괴했고 이제 약간의 잔당만이 남아 반항을 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일부 능력자들은 여전히 안타리우스는 건재하며,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토니 리켓은 그들을 믿는다는 이야기다.

증거는 많지 않지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파괴와 전쟁을 일으키는 그들에게 나이오비씨는 좋은 기폭제겠지요.”

확실히 그랬다. 만약 토니 리켓의 말처럼 정말로 안타리우스가 아직 건재하다면, 충분히 나이오비를 노릴 가능성이 있다. 조금만 건드려도 곧바로 재앙을 만드는 그녀는 안타리우스의 좋은 먹잇감이겠지. 조금이라도 회사에 피해를 준다면, 윌라드는 좋은 건수를 잡았다고 연합을 공격할 테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큰일이겠네.”

. 그래서 당신께 부탁하려고 했습니다만, 본인이 거절한다니 어쩔 수 없군요.”

할 말을 끝냈다는 듯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데려다 주려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껴 그의 호의를 거절하기로 했다.

괜찮아. 이쪽으로 쭉 가면 되지?”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 난 길치가 아니니까.”

나는 그와 악수를 한 뒤 연합 건물을 나섰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쳐다보았지만, 손끝에 불을 피우자 다들 고개를 돌렸다. 입구 근처에서 어느 여성과 노닥거리던 이글만이 큰형에게 안부를 전해주라며 손을 흔들었을 뿐이었다.

안타리우스. 그들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디까지 퍼져 있는 걸까. 그들은 정말 괴멸되지 않았을까? 많은 의문이 남는다. 현재 안타리우스의 존재를 의식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니 내가 토니 리켓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준다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 일터. 누구에게 말을 해줘야 믿을까.

순간 툭, 하고 누군가와 부딪쳤다. 너무 깊게 생각을 하느라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탓이다. 나는 급히 부딪친 사람에게 사과를 건넸다.

, 미안해요.”

무엄한 것. 똑바로 봐라.”

내게 핀잔을 주며 지나간 사람은 굉장히 이상한 사람이었다. 화려한 장식이 달린 검은 후드를 눌러쓰고 있었는데 살짝 스치면서 본 얼굴에는 푸른색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있었다. 남자가 립스틱을 바르는 경우도 흔치 않은데 그 색도 특이해서 더 놀랐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한 사람이네.”


 

감히 이 몸에게 이상한 사람이라니, 당장 구원해주고 싶었지만 여기는 보는 눈이 많은 곳이다. 일을 벌여서 좋을 건 없지.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연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런 일을 이 몸이 직접 하는 게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 , 때론 교주님께서 직접 가야 신도들의 충성도도 올라가지 않겠나. 아이작 놈은 무식하게 죽이는 것만 할 줄 알지 감언이설로 꾀는 방법을 모른다. 그러니 이 몸이 나서야지.

해가 떨어지고 막 밤이 되었을 무렵, 연합 본부 근처의 약속 장소로 가니 한 남자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보아하니 이놈이 연합에 심어두었던 첩자인 듯했다. 그는 나를 보더니 곧바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오오, 교주님! 세상에, 교주님께서 어찌 이 누추한 곳까지 직접 오셨습니까!”

신도를 보살피는 데에는 장소를 가리지 않지. 고개를 들라.”

그는 감격에 젖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많이 봐서 이젠 지겨운 눈빛이다. 저런 놈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눈물을 흘리며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그간 연합에 있으면서도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나이다.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어. 너희 같은 떨거지들은 중요한 일이 생길 때 사용하는 소모품이니까. 하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지. 나는 몸을 낮춰 손으로 그의 고개를 잡아 올렸다. 눈물범벅이 된 남자의 얼굴은 추하기 그지없었다.

전지전능한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

교주님…….”

이대로 두면 날 끌어안고 펑펑 울 거 같아서 재빨리 일어선 뒤 곧바로 일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니 이제부터 네가 나설 차례다. 뭐든지 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교주님!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래. 이제 좀 괜찮군. 소모품이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그래야 내 신도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삼 일 뒤다. 정확히 삼 일 뒤 정오에 재앙의 나이오비를 꾀어내라. 내가 알려주는 장소로 부르면 된다.”

…… 잉게 나이오비는 당분간 근신 상태입니다만…….”

핑계를 써서라도 끌어내. 친한 사람의 이름을 팔든지, 아니면 스노우 퀸이 불렀다고 하든지 해서 말이다. 그 정도 능력도 없는 건가, 너는?”

하도 답답해서 살짝 쏘아붙였다. 내가 지금 이 남자에게 느끼는 심정을 모조리 풀어내자면 이 남자는 아마 100% 자살을 하겠지만 이렇게 조금만 풀어서 들이댄다면 좋은 자극이 된다. 예상대로 남자는 바짝 군기가 든 상태로 크게 외쳤다.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끌어내겠습니다!”

그래. 바로 그런 자세야. 좋아. 완벽하게 해내도록. 난 자넬 믿고 있네.”

내가 칭찬과 함께 어깨를 두드려주자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조직의 리더는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쓸 줄 알아야지. 그래야 이렇게 아랫것들을 부려 먹기 쉽거든. , 회사에 숨어 있는 놈과 근처 카페에 있는 놈들에겐 이미 이야기가 끝났으니, 그럼 결과를 지켜보도록 할까. 재밌는 일이 될 테니.

거기 뭐하는 놈이냐?”

그때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달빛이 흐릿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등에 긴 무기를 메고 있는 실루엣이 보였다. 연합에서 긴 무기를 사용하는 놈이라면, 분명히 홀든 가의 검사였을 텐데. 하찮은 이름이라 잘 기억이 나질 않는군.

이글 홀든입니다. 교주님!”

옆에서 신도가 속삭였다. 그렇군. 이글이었어. 당장 제거를 할까 싶었으나 이곳은 연합 본부와 멀지 않은 장소. 따라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면 지원이 올 가능성이 크다. 쓸데없는 싸움은 피하는 게 좋지. 이 녀석이 도망갈 때까지 시간만 벌도록 할까.

뒤로 돌아서 연합 본부로 들어가라. 달이 밝지 않기 때문에 들키지 않을 거다.”

, 교주님. 하지만…….”

얼른!”

그는 수 초간 고민하다가 결국 이글이 오는 반대방향으로 줄행랑을 쳤다. 멍청한 놈. 끝까지 말을 안 듣는군. 속으로 투덜거리는 찰나 이글이 이쪽으로 뛰어왔다. 달빛에 반사된 검광이 번뜩였다. 나는 손에서 테라듀를 뽑아 검을 막았다. 허공에 불꽃이 튀겼다.

역시 능력자였나. 손에 그건…… 테라듀?!”

호오, 곧바로 알아보는군그래. 눈썰미가 좋은걸.”

이글은 다소 당황한 듯했다. 전에 싸웠던 녀석의 형인 벨져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하긴, 테라듀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벨져와는 달리 이글은 레베카의 테라듀를 본 적이 있으니, 같은 능력을 사용하는 내가 당황스럽긴 하겠군.

레베카 러쉬톤과 같은 능력이지. 물론 내가 몇 배는 더 강하지만!”

오른손에서 테라듀를 길게 뽑아 이글에게 쇄도했으나 그는 긴 검을 휘둘러 테라듀를 막았다. 하지만 예상했던바. 곧바로 왼손에 테라듀를 뭉쳐 휘둘렀다. 이글은 가까스로 몸을 틀어 피했다.

반사신경이 좋군!”

이번에는 등 뒤에서 수십 개의 테라듀를 만들어 녀석을 향해 뻗었다. 시차를 둔 수십 개의 테라듀 줄기를 이글은 침착하게 하나씩 막아냈다. 저렇게 큰 칼을 빠르게 휘두르다니. 쾌검이라는 이명이 아깝지는 않다. 그러나 뒤로 물러나면서 막았기 때문에 이글과 나 사이의 거리는 제법 벌어진 상태였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신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충분히 벌었군. 그렇다면 싸울 이유는 없지. 나는 뒤를 돌아 퇴각하기 시작했다.

기다려!”

이글이 급히 쫓아왔지만 나는 녀석을 무시한 채 마음껏 뛰었다. 테라듀를 벽에 박으면서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자 녀석은 쫓아오지 못했다. 멀어지는 녀석을 향해 마음껏 조소를 날렸다.


 

절망하라. 허락할 테니.”


 

놈의 능력 때문에 결국 놓치고야 말았다. 테라듀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걸 보니 전에 작은형이 말했던 놈이 틀림없다. 이름이 제키엘이라고 했던가. 분명히 전신에 테라듀를 이식한 강화인간이었지.

그나저나 녀석이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 이유 없이 놀러 오진 않았을 터.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 틀림없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야. 방금 제키엘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녀석을 잡았어야 했는데 아쉽다. 제키엘이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내 머리를 굴려봤자 나오는 건 없을 테니 토니에게 보고하는 편이 좋겠다. 다음 날 아침에 곧장 토니에게 가 보고를 하니 그는 심각한 얼굴로 고뇌에 잠겼다. 이럴 때는 혼자 두는 게 좋을 거로 생각해 조용히 그의 방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찰나 토니가 나를 불렀다.

이글씨.”

? ?”

나이오비씨를 주의 깊게 살펴주세요.”

나이오비는 갑자기 왜?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이 나타난 것과 나이오비랑 무슨 상관일까?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이유를 물어본다 해서 토니가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이오비, 나이오비라……. 혹시나 해서 그녀에게 가 보았지만, 조용히 방에서 명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 꾸준히 관찰했지만 역시나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근신처분이 내리기도 했고, 나이오비 본인도 깊은 반성을 하고 있기에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토니도 틀릴 때가 있군. 슬슬 무료해진 나는 연합을 나서서 거리를 향했다. 앨리셔나 보러 갈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회색 머리의 군인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틀림없이 카인 스타이거다. 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어이! 카인!”

나는 크게 소리쳤으나 그는 듣지 못한 듯 제 갈 길을 바삐 갔다. 화가 난 나는 그를 쫓아가려고 했으나 거리에 사람이 많아 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어깨를 부딪치며 다시 그에게 소리쳤다.


 

이봐! 카인 스타이거!”


 

뒤를 돌아보았으나 수많은 사람만 있을 뿐. 내가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른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곳에서 허비할 시간이 없다. 나는 손에 든 쪽지를 꽉 쥐었다. 오늘 아침에 한 아이가 심부름을 받았다며 내게 이 쪽지를 건네주었다. 쪽지에는 간단한 약도와 함께 정오에 이곳에 오면 레나가 있을 거라고 적혀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는 모른다. 아마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레나가 있을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존재한다면 나는 가야 한다.

이사벨…….”

그녀의 이름을 되뇌며 서둘러 목적지로 향했다. 그녀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항상 가슴이 찢어진다. 내가 조금만 더 잘했다면, 내가 계속 그녀의 옆에 있었다면 그녀가 강화인간이 되는 고통은 겪지 않았을 텐데. 향할 곳 없는 분노와 원망이 영혼 깊은 곳에서 끓는다.

이윽고 약속 장소에 도달했다. 텅 빈 공터였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 한적한 곳이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는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함정일 수도 있으니 미리 권총을 꺼내 총알을 장전했다. 그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카인?”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에는 짧은 푸른색 머리를 한 여성……이 있을 줄 알았는데 긴 금발의 여성이 있을 뿐이었다. 숲을 걸어 다니는 도도한 요정 같은 자태를 지닌 드니스였다. 그러면 그렇지. 정말로 레나가 나올 리가.

드니스인가. 당신이 나를 불렀소?”

무슨 말이죠? 당신이 저를 불렀잖아요.”

나는 드니스에게 연락을 한 적이 없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사칭해서 드니스를 불러냈단 말인가? 아무래도 누군가 꾸민 함정이 틀림없다. 나는 권총을 양손에 들고 주변을 살폈다.

그건 내가 아니오. 우린 함정에 빠진 것 같군.”

그렇게 둘러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주변엔 아무도 없으니.”

벌써 드니스가 식물을 이용해 주변 탐색을 마친 모양이다. 그녀는 식물을 몸에 거둬들이더니 한 마디 덧붙였다.

, 겁 많은 고양이 한 마리가 저쪽 바위 뒤에 숨어 있긴 하군요.”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잖소.”

나는 그녀를 믿고 총을 집어넣었다. 드니스는 전적으로 믿을 만한 동료이니까.

그나저나 오랜만이네요.”

그렇군. 요새 통 만나질 못했으니.”

드니스가 내게 말을 건네며 천천히 다가왔다. 요정을 연상케 하는 우아한 걸음걸이는 언제봐도 아름답다. 그녀이기에 가능한 동작이다. 정말이지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요정족의 표본 같은 존재다. 본인은 이런 평가를 썩 좋아하는 것 같진 않지만.

이곳에는 누굴 만나러 온 거죠?”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관통했다. 레나를 만나러 왔다고 하면 그녀는 또다시 상처를 입겠지. 하지만 이 맑은 눈동자 앞에서 어찌 거짓을 고할 수 있겠는가. 나를 믿어주는 동료의 신뢰를 저버릴 수는 없다.

이사벨……. 레나를 만나러 왔지. 누군가 이곳에 오면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 거짓이었나 보오.”

역시 그 말을 들은 드니스의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 하지만 이제 익숙하다는 듯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상하군요. 그보다 카인. 아직도 레나를 잊지 못하는 건가요?”

굉장히 직설적이군. 그녀의 성격이 원래 그러니 어쩔 수 없지만. 그나저나 지겹지도 않은 건가? 지금까지 드니스가 내게 이 질문을 몇 번이나 했는데. 물론 대답은 언제나 같다.

미안하네.”

나한테 미안해할 건 없어요. 나는 심장의 외침에 따라 행동하고, 당신은 레나를 잊지 못하는 것일 뿐. 서로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거니까 사과는 필요 없어요.”

언제나 같은 대답을 들어도 한결같이 내게 애정을 보내주는 드니스에게 언제나 미안하지만, 또 고맙기도 하다. 만약 내가 이사벨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드니스와……. 아니, 그만두자. 쓸데없는 생각은 내 영혼을 더 병들게 할 뿐이다.

난 당신에게 내 마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족해요. 심장의 외침을 애써 외면하며 표현조차 하지 않는 머저리보단 훨씬 나으니까요. 항상 뒤에 숨어서 지켜보기만 하는 한심한 여자는, 그 무엇도 얻을 수 없죠.”

나이오비를 말하는 건가. 그녀에게도 항상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나처럼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가련한 여인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내 가슴에 그녀가 들어올 자리는 없다.

그러니까 혹시, 당신의 마음속에서 레나가 조금이라도 지워진다면…….”

거기까지 말한 드니스가 말을 끊었다. 급히 고개를 홱 돌리기에 덩달아 그 방향으로 보았더니 저 멀리서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런데 그 실루엣이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이었다. 흡사…….

레나?”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카인! 기다려요!” 뒤에서 드니스의 외침이 들렸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쪽에서 사람이 다가오자 실루엣은 뒤로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강각이라는 이명답게 나와 그녀 사이의 거리는 계속 벌어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계속 달렸다.

한계까지 가속된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무리하는 심장은 멈추라고 경고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그녀를 잡을 수 있는데. 설령 내 몸이 부서진다 해도, 지금은 절대로 멈출 수 없었다.

이사벨. 내 하나뿐인 사랑. 나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여인. 그리고 나 때문에 불행을 알게 된 비운의 여자. 그녀를 위해서라면 내 몸 하나 부서지는 게 무슨 대수랴. 내 영혼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내 모든 것은 온전히 그녀를 위해 존재한다. 오직 그녀를 만나서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그러나 하늘은 나의 편이 아니었다. 주변에 서서히 안개가 끼고 있었다. 대낮에 안개라니, 정말 보기 힘든 광경이 하필 지금 일어나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레나의 모습은 점차 흐릿해지고 있었고 나는 더욱 몸을 혹사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리에 힘이 절로 빠졌다. 그 자리에 넘어지려는 찰나, 누군가 내 몸을 부축해주었다. 드니스가 나를 따라와 준 모양이다.

미안하군, 드니…….”

나를 받쳐준 손이 그녀의 고운 손이 아니라 투박한 금속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강렬한 통증이 내 복부를 꿰뚫었다. 전장에서 단련된 본능이 몸을 틀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심장을 관통당해 즉사했으리라. 재빨리 바닥을 구른 뒤 권총을 꺼내 겨눴으나 적은 가볍게 권총을 쳐낸 뒤 수십 개의 날카로운 금속으로 나를 찔렸다. 입에 핏물이 고였다.

인도하소서!”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손을 들어내 심장을 찌르려고 했으나 옆에서 날아온 꽃잎이 팔의 궤도를 빗나가게 했다. 연이어 커다란 꽃잎들이 날아오자 온몸에 금속을 두르더니 재빨리 뒤로 구르며 사라졌다. 쓰러진 내 눈에 당황한 드니스의 얼굴이 들어왔다.

카인! 카인! 괜찮아요?”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나오는 건 선혈뿐이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입에서 피만 솟구쳤다.

말하지 마세요!”

드니스는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찔린 부위를 묶었다. 하지만 피가 흘러나오는 부위가 한둘이 아니라 전부 지혈을 하지는 못했다. 서서히 고통이 줄어들며 시야가 점차 흐릿해지고 있었다.

드니스…….”

겨우 입안에 있던 피를 다 뱉고 말을 할 수 있었다. 드니스는 그러지 말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이 들어 눈을 감았다. 카페 점원 옷을 입고 긴 머리를 찰랑거리던 이사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나이오비도.

 


레나와, 나이오비를 부탁하네.”


 

그 목소리와 함께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드니스에게 다가갔다. 내 발소리를 들은 드니스가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줄기 흐르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것.

왜 이렇게 된 거지, 드니스?”

레나를 쫓아가던 카인을 누군가 습격했어. 내가 그를 따라잡았을 때에는 이미 부상이 심각한 정도였고. 그러니 빨리 의사를, 아니 누구라도 좋아. 빨리 사람을 불러줘. 지금 한시가 급해, 나이오비!”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 감히, 감히 카인도 지키지 못한 네가 어떻게.

나는 그런 걸 물은 게 아니야.”

무슨 말이야?”

그렇게 앞에 나서서 카인에게 마음을 보여주던 네가, 뒤에 있는 나를 비웃는 네가. 그렇게 큰소리를 치던 네가 왜 카인을 지키지 못했느냐는 말이야.”

나도 노력했어! 하지만!”

변명하지 마!”

순식간에 주변에 불이 붙었다. 냉랭한 안개가 내 심장에 스며들었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해졌다. 냉정함이 만들어 낸 차가운 분노는 모조리 드니스를 향했다. 언제나 나를 무시하고, 심장의 외침이라며 카인에게 사랑을 표하고, 그러면서도 항상 당당했던 그녀. 그러나 결국 카인을 지켜내지 못한 망할 년. 썩을 년. 가증스러운 년!

잠깐, 이 안개는 설마!”

드니스가 카인을 바닥에 놓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래, 네가 본색을 드러냈구나. 덕분에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내 분노를 온전히 내게 전해줄 수 있게 되었어. 고맙구나. 드니스.

차가운 분노는 영겁을 태우는 겁화가 되어 드니스와 주변을 불태웠다. 꽃으로 몸을 감싸 보호하긴 했지만 얼마 가지 못할 터. 전력을 다한 내 불꽃은 한낱 식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특히 지금의 나는 온몸에서 힘이 넘치는 상태다. 감히 사람의 발에 밟혀 사라질 식물 주제에 내게 대들다니, 한참 멀었다.

결국, 꽃잎이 떨어짐과 동시에 드니스는 비명을 질렀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가죽과 살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내 귀에 생생하게 울렸다. 직접 다듬질을 할 쇠판과 쇠방망이가 없는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어떠한가. 고통 받는 죄인과 희열을 느끼는 심판관이 있는데 이 정도면 훌륭한 초열지옥이 아닌가. 나락에 떨어진 죄인에게 실로 어울리는 장소다.

숲이 불타고 대지가 울부짖는다. 녹음을 자랑하던 초목도, 산천을 뛰놀던 토끼도,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도 이곳에서는 모두 한 줌의 재가 된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마음도, 혼자서 앓고 있던 짝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거기에 우열 따윈 없다.

태워라. 불태워라. 불살라라. 누구에게나 공평한 불이여. 세상을 태워버려라. 사랑했던 사람도, 미워했던 사람도. 나를 적대했던 사람도, 나와 함께 했던 사람도. 나를 아껴주는 사람도, 내가 사랑했던 저 아이도.

아이?

나이오비 언니!”

엘리?!”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그 목소리에 겨우 상념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지금 내 상념이 중요한 게 아니다. 엘리가 이렇게나 위험한 곳에 있다는 게 더 중요하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리는 계속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디서 꺼내왔는지 커다란 폭죽을 타고 있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엘리는 그대로 내 품에 안겼다.

안 돼, 엘리!”

나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불꽃은 엘리의 옷에도 붙었고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울 텐데도 불구하고 엘리는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내 가슴에 안겨 울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언니는 엘리가 보아 온 언니 중에서 가장 슬퍼해. 언니가 슬프면 엘리도 슬퍼. 그러니까 나이오비 언니. 슬퍼하지 않으면 안 돼? ?”

커다란 눈망울에서 연신 눈물을 흘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엘리의 옷자락이 불에 그슬리자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곧바로 손에서 불을 멈추고 엘리를 꽉 끌어안고 엘리의 옷에 붙어 있던 불꽃들은 모조리 없애버렸다.

미안해.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엘리야. 미안해.”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원망스러웠다. 에밀리아를 잃어버리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단 말인가. 똑같은 방법으로 엘리까지 잃어버릴 셈이었나. 감히 누가 죄인이고 누가 심판관인가. 초열지옥에 떨어질 죄인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중간에 멈춰서 다행이네.”

고개를 들자 온몸에 탄 자국이 선명한 드니스가 있었다. 그녀에게도 정말 몹쓸 짓을 했구나. 하지만, 미안한 마음보다는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포트레너드 사건처럼 크게 되진 않을 것 같아. 네 친구들도 금방 와 줬고.”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연합의 능력자들이 도착해 불을 끄고 있었다. 루이스와 토마스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고, 휴톤과 도일은 주변에 불이 붙을만한 물건을 제거하여 불이 번지는 걸 막았다. 저 멀리 트리비아가 회사의 물 능력자 둘을 안고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드니스의 말처럼 크게 번질 염려는 없어 보였다.

응급조치는 끝냈다. 환자의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 같군.”

어느새 다가온 닥터 까미유가 내게 카인의 상태를 말해주었다. ,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또다시 재앙이 될 뻔한 나는 겨우 구원을 받았다. 나는 엘리를 꼭 품에 안으며 서서히 쓰러졌다. 곧 의식이 끊겼다.


 

결과적으로 네 공이 컸네. 이글. 고마워.”

, 나도 토니가 가르쳐주지 않았으면 몰랐을 테니까.”

며칠 뒤, 퇴원한 나는 이글에게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서로의 필적을 위조해 나와 드니스, 카인을 불러내었고 그 자리에 능력자를 증폭시키는 안개를 깔아 다시 한 번 재앙을 일으킬 셈이었다는 사실을. 드니스는 나를 보면 도발을 할 것이고, 카인은 레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으면 거기에 정신이 팔려 주변을 둘러보지 못할 것이며, 그 사이에 카인을 죽이면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내가 폭주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계획은 잘 맞아떨어졌으나, 그전에 토니 리켓이 이글에게 나를 잘 지켜보라는 말을 했었고, 카인을 보고 쫓아가던 이글이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쪽으로 가는 나를 발견한 뒤 이를 수상하게 여겨 연합에 연락해 능력자들을 불러온 것이었다. 그리고 멀리서 불이 보이자마자 회사에 요청해 물 능력자들을 부르고 혹시 모를 부상자를 대비해 까미유에게도 연락을 했다고.

또다시 재앙을 만들 뻔한 내가 깨어났을 때, 동료들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질책이 아니라 위로였다. 나는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제 두 번 다시는 재앙을 가져오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 카인에게는 가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은 그를 볼 면목이 없어.”

이글의 말처럼 지금 당장에라도 그를 보고 싶다. 그의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 다시 한 번 파헤쳐진 그의 상처를 아물게 해 주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그를 볼 수 없다. 그와의 만남은 좀 더 뒤로 미뤄야 한다.

언젠가 내가 타라처럼 내 불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그를 찾아갈 거야.”

그리고 그의 앞에서 당당히 내 불꽃을 보여주리라. 다시는 그가 나를 재앙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 좋은데?”

이글은 잘해보라며 어깨를 두드리고 갔다. 연합에서 제일 망나니 같다는 사람이 저 정도라니, 역시 여기는 너무 착해 빠진 사람들뿐이다. 물론 전에는 오토와 부처같은 쓰레기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 연합에 있는 능력자는 다들 좋은 사람이다.

슬슬 약속시각이 되었으니 근처에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며칠 전에 나와 드니스가 다툼을 벌였던 곳이다. 술집에 들어가자 주인장이 내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으나 나는 화를 내지 않고 대신 고개를 숙였다. 내 실수 탓에 벌을 받는 것이니,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겠지.

구석으로 가자 정갈한 흰색 도복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지 차를 홀짝이던 그는 나를 보자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기의 흐름이 좋지 않군.”

다른 사람이라면 웬 아시아 사람이 이상한 종교 권유를 하는가 했겠지만, 그는 기를 다룰 줄 아는 능력자, 그랑플람 재단의 아시아 지부 스카우터 티엔 정이다. 그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겠지.

역시 그런가. 그러니 당신이 날 가르쳐줬으면 좋겠어.”

토니 리켓이 내게 타라와 티엔 정에게 가르침을 받으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타라에게는 개인적으로 말을 해 두었고 문제는 티엔 정이었는데, 토니 리켓이 그랑플람 제단에 연락을 취해두었다. 다행히 그쪽에서도 연합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는지 금방 수락했다. 그래서 오늘부터 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그에게 배우기로 한 것이다.

상관없다만, 내 가르침은 엄격하다. 따라올 수 있겠나?”

물론이야. 나는 반드시 내 능력을 안정시켜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머릿속에 엘리가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에밀리아의 미소가 겹쳐 보였다. 두 번 다시 잃지 않으리라. 그렇게 맹세를 하고 다짐을 했지만 정작 노력은 하지 않았다. 노력 없이 무어가 되겠는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뼈를 깎는 고통을 겪어서라도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는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7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을 두었지만 지나치게 자식 자랑을 하다가 신의 분노를 사게 되어 자식을 모조리 잃게 된다. 14명의 자식을 잃은 그녀는 밤낮을 울며 탄식하다가 결국은 돌이 되었다고 한다.

나도 그녀처럼 이미 한 명의 자식을 잃었다. 그녀와 같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두 번은 없다. 이제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눈물을 흘릴 일이 없도록.

별처럼 빛나는 내 아이의 환한 미소를, 언제까지고 지켜낼 것이다.

 

 



2015. 03. 15.

사이퍼즈 팬픽 공모전에 냈다가 떨어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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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

십자고상

팬픽/사이퍼즈 2015. 11. 15. 23:43

예배의 끝을 고하는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앉아있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성당을 나서기 시작했다. 출입구를 향해 가던 그들은 맨 뒷자리에 홀로 앉아있는 청년을 발견했다. 깔끔하게 빗어 올린 갈색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 오뚝한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 검은 양복을 갖춰 입은 모습은 주변에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성당에 혼자 오는 사람은 드물기에 누군가 청년에게 이유를 물어볼 법도 하지만, 그 누구도 청년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 나가고, 강단에 서 있던 신부까지 사라졌지만, 청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앉아 정면에 있는 십자고상을 바라보았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형상화한 십자고상. 성물이라 할 수 있는 이 물건을 바라보는 청년의 눈에는 다른 신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경외 같은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뒤에 있는 문이 열리고 또 다른 청년이 들어왔다. 헝클어진 흰색 머리에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청년이었다. 안경을 끼고 흰 가운을 입은 그는 앉아 있는 청년과는 달리 화사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맨 뒷자리에 앉은 청년을 발견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히카르도! 여기 있었군.”

히카르도라 불린 청년이 고개를 돌려 방금 들어온 청년을 보았다. 무뚝뚝한 얼굴에 자그마한 미소가 지어졌다.

까미유인가. 오랜만이다.”

까미유는 손을 내저으며 히카르도의 옆에 다가와 털썩 앉았다. 그를 보며 히카르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부는 잘되어가나?”

할 만해. 어렵긴 하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야. 이왕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니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 너라면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누가 뭐래도 카모라 마피아 제일의 두뇌를 자랑하는 까미유니까 말야.”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수년간 같이 지낸 두 사람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문득 까미유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내가 공부를 하는 동안 여기에 자주 온다면서? 피에르가 그러더라. 갑자기 신학이라도 빠졌나, 하고.”

내가 공부하곤 전혀 연이 없다는 걸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나.”

물론이지. 그래서 더 궁금해진 거야. 학문에도, 신앙에도 관심 없던 네가 갑자기 성당을 오게 된 이유가.”

히카르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십자고상이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의 눈길을 따라가던 까미유도 곧 십자고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성당에서나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물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까미유의 호기심이 동했다.

십자고상? 저걸 보러 오는 건가?”

그래. 저 물건은 예수라는 성자를 표현한 거지? 그에게 흥미가 생겼어.”

매일 피를 보는 게 일인 마피아가 성자를? 행동대장인 조지프가 알면 박장대소를 할 일이다. 피에르는 진지하게 말하겠지. 신이 있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까미유 역시 신을 믿지 않았다. 인간을 구원하는 건 같은 인간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의술을 배우기 시작한 거고.

뭔가 잘못 짚고 있는 듯한데, 내가 관심 있는 건 예수의 고난에 관한 거다.”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까미유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를 챈 모양이다. 히카르도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예수는 죽은 지 삼일 뒤에 부활했다지?”

성경에는 그렇게 나와 있더군. 넌 그걸 진지하게 믿는 건가?”

믿고 안 믿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나는 부활을 했다는 그 자체가 재밌을 따름이야.”

그렇군. 그런 거였나. 죽었으나 살아났다는 데에 흥미를 느끼고 매번 성당을 오다니. 이유가 정말 히카르도 다웠다. 이것도 다른 의미에서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신앙이라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히카르도. 예수가 되어 보겠나?”

그렇게 말하며 까미유는 품속에서 초록색 액체가 들어 있는 작은 시험관을 꺼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어느새 검은 숨을 내뿜는 긴 머리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와 시험관을 본 히카르도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으나, 마음을 굳게 먹고 친구의 손을 잡았다.

까미유는 곧바로 주사기를 꺼냈고, 액체를 넣은 뒤 히카르도의 팔에 찔렀고, 액체는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향했고, 히카르도는 비명을 질렀고, 고통과 벌레와 고통, 끝없는 고통이…….

 

 

 

그만……. 그만해!”

이불을 박차며 벌떡 일어났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거친 숨을 고르며 히카르도는 옆에 있는 탁자를 더듬거렸다. 먹다 남은 물병이 잡히자 뚜껑을 박살내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물을 마시자 다소 정신이 들었다. 벌레들이 그의 몸을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꿈이었군.”

오랜만에 친구의 얼굴을 보아서 길몽이라 해야 할지, 그때의 고통을 상기하게 되어서 악몽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꿈이었다. 히카르도는 애써 길몽이라고 위로하며 몸을 일으켰다. 문득 고개를 돌려 한쪽 벽을 바라보았다. 부식되고 있는 낡은 십자고상이 걸려 있었다. 어제 탄야의 행적을 좇다가 발견한 폐쇄된 성당에서 가져왔는데, 어느새 벌레들이 갉아먹은 모양이다.

어제 저걸 봐서 그때의 꿈을 꾼 건가.”

그는 벽으로 다가가 가까이서 십자고상을 바라보았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 십자가에 매달려 괴로워하는 예수의 모습이 그의 눈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고통. 예수는 인간의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갔다고 했다. 이런 몸이 되기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의 고통을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예수처럼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몸이 되었다. 그렇다면, 비록 예수처럼 인류 전체의 고통을 짊어지진 못해도 한 사람의 고통은 짊어질 수 있지 않을까.

네 고통은 나의 것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레들이 그의 온몸에서 흘러나왔다. 살에서, 뼈에서, 혈관에서 나오는 벌레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물론, 고통을 통해서다. 매일같이 느끼는 고통이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히카르도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친구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고통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금은 까미유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까미유를 잘못되게 만든 모든 것에게. 그리고 그의 고통만을 짊어지고, 히카르도는 홀로 사라질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십자고상을 한 번 쳐다본 뒤, 걸음을 옮겼다.

고통을 즐길 시간이다.”

 

 

 



To. 적신님

2015. 11. 16.

적신님 생일 축하드려요!

히카가 주인공인 짧은 엽편을 쓰려고 했는데 음... 아무리 봐도 쌍충이네요.

딱히 커플링을 의식하지 않고 쓰니까 이런 결과가 흑흑

어쨌든 본의아니게 쌍충 커플링 엽편이 되었지만 아무쪼록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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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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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돋보이는 어느 가을 오후,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광장에는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짧은 갈색 머리를 흰 띠로 동여매고 꽃으로 장식한 모습은 마치 꽃의 화신과도 같았다. 그러면서도 배꼽과 허벅지를 훤히 드러낸 의복을 입어 자신의 활발한 성격을 말하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소녀는 시선을 돌려 광장 구석에 있는 화단을 바라보았다. 갖은 꽃들이 자신의 아름다운 색을 뽐내며 사람들의 눈을 끌고 있었다. 연분홍빛 코스모스, 샛노란 국화, 피처럼 붉은 석산 등.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꽃을 하나씩 둘러보던 소녀의 눈동자가 문득 한 곳에서 멈추었다. 그곳에는 수수한 보랏빛을 자랑하는 라벤더가 있었다.

말없이 라벤더를 지그시 바라보던 소녀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라벤더가 적잖이 마음에 들었다. 아마 보랏빛을 띤 라벤더가 그녀의 머리색과 닮았기 때문이겠지. 문득 소녀는 그녀를 떠올렸다. 이곳에서 기다리는 그 사람. 언제나 짧은 보랏빛 머리카락을 흔들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미안! 오래 기다렸어?”


뒤쪽에서 목소리와 동시에 거칠고 작은 손이 소녀의 어깨에 살포시 닿았다. 소녀는 금방이라도 환한 미소와 함께 그녀를 맞이하고 싶었으나, 여기서는 좀 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미소를 억누른 채 일부러 짐짓 화난 표정을 짓는다. 어쨌든 그녀가 잘못했으니까. 한마디 해야지.


늦어!”


고개를 돌려보자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역시나 짧은 보라색 머리였다. 잘 정돈된 소녀와는 달리 다소 헝클어지고 땀에 젖은 머리는 그녀가 급하게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팔과 손목에 걸린 팔찌와 붉은 스커트에 달린 장식들은 연신 짤랑거리며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활동적이지만 정돈된 모습인 소녀와는 달리, 보라색 머리의 그녀는 역동적임 그 자체였다. 그녀의 움직임은 하나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아하하. 미안, 미안해. 미아. 공연이 늦게 끝나서 그만. 팬들이 자리를 안 비켜주더라니까.”


미아라 불린 소녀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크게 볼을 부풀렸다. 하여간 이 여자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다.


보나 마나 또 쏟아지는 앵콜 요청을 이기지 못하고 다 들어줬구나. 내 말 맞지, 리첼?”


리첼은 미아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정말 거짓말도 못 해요. 너무나도 귀여운 그 모습에 미아의 기분이 조금씩 풀어졌다. 결국 참지 못하고 미소가 터져 나오자 리첼의 얼굴도 덩달아 밝아졌다.


하여간 길거리에서 통기타 칠 때부터 그렇더니, 아직도 못 고쳤어? 우리 락스타 리첼님?”


문득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리첼이 아직 무명의 가수이던 시절, 이 광장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때가. 동료인 미쉘과 만나기 위해 광장을 지나가던 미아는 그 소리에 매료되어 공연 내내 멍하니 리첼을 바라보았다. 그게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사람들이 내 노래를 좋아해 준다는 거잖아. 어쩔 수 없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 연신 미아의 눈치를 살피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니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데이트 할 시간이 아까우니까.

미아의 눈치를 보던 리첼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화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자신을 용서하는 척하면서 분위기를 이끌어 나갈까 고민하는 저 모습이 귀여워서 절로 미소가 나왔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한결같이 순수할까. 리첼에게 있어 미아는 순수 그 자체였다.


하여간 거리에서 노래할 때가 더 좋았다니까. 그땐 나만의 뮤지션이었는데.”


미아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연인의 성공은 정말 기쁜 일이지만, 성공한 만큼 함께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때론 기뻤지만, 때론 슬프기도 했다.

연인의 불평에 리첼은 말없이 미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꽃을 한 송이 꺼내 미아의 손에 쥐여주었다. 화단에 피어있던 라벤더와 색깔이 비슷한 보라색 꽃이었다. 멍하니 꽃을 바라보던 미아가 환하게 웃었다.


도라지꽃이네.”

. 나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꼭 가지고 다녀.”


미아는 꽃을 꽉 끌어안았다. 꽃과 식물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꼭 알맞은 선물이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라벤더는 머릿속에서 지운 채, 그녀는 도라지꽃만을 기억했다.

 




2015. 11. 03. 

서유님 생일 축하드려요!

작중 등장한 보라색 꽃들의 꽃말을 찾아보시면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짧은 분량을 부디 용서해주시길... 그래도 올해는 시간은 맞췄잖아요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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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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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코.”


나를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왔구나. 그대로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야쿠모 유카리의 따뜻한 미소가 있었다. 나도 이에 화답하듯 부드러운 미소를 돌려주었다. 곧 요우키가 차를 내어 왔고, 우리들은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차가 떨어졌다. 요우키에게 새 차를 내오라고 하는 바람에 이야기가 잠시 끊긴 틈을 타 유카리에게 물었다.


, 유카리. 사랑이란 뭘까?”


유카리가 제법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서일까. 아니면 허를 찔렸기 때문일까. 하지만 곧 화사한 표정으로 바꾸고는 답했다.


내가 유유코에게 해 주는 것. 그게 사랑이야.”


거짓말쟁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삼키느라 표정이 뒤틀렸다. 허나 유카리는 감동을 받아 그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졌다. 볼에 닿은 손은 분명 따뜻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차가움 또한, 같이 느껴졌다.


유유코.”


다시 한 번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다. 그녀가 부르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그윽한 금빛 눈동자는 나를 담고 있었지만, 그 끝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아닌, 인간 사이교우지 유유코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차가운 망령이 아닌, 따뜻한 육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얼굴이 내게 다가왔다. 알싸한 향이 내 코를 자극했다. 두 손에 가득 품고 싶은 좋은 향이건만, 나를 위한 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역겹기 그지없었다. 마침내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그녀의 입술은 내 입술을 벌렸고 그 사이로 혀가 기어 들어왔다. 이 요괴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태연하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걸까. 입 속에 뱀이 기어다니는 듯한 혐오감이 자극하는 바람에 나는 그 혀를 물어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자 온 힘을 다했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이 떨어졌다. 살짝 붉어진 입술 사이에서 거짓이 새어 나왔다.


사랑해.”


아아, 유카리. 너는 어찌도 그리 태연하니. 내게 거짓을 고하면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 구나.

아아, 잔인한 요괴 같으니. 내게 감당하기 힘든 속박을 주는구나. 단어 하나로 나의 영혼을 사로잡고, 말 한 마디로 나의 영혼을 죽이는 구나.

허나 네가 내게 거짓을 읊는다 해도, 나는 내게 진실만을 말할 거야. 네가 나에게 진실된 언어를 들려줄 때까지. 언제까지고, 계속.


……나도 사랑해. 유카리.”







짧네요. 뭐 원래 엽편 쓰려고 한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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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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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한 그 날은,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평범한 날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죽림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고, 언제나처럼 홀연히 나타난 카구야가 내게 시비를 걸었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적당히 응수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카구야가 나를 공격했고, 언제나처럼 반격을 날렸다. 결국 언제나처럼 죽고 죽이는 싸움을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내 일상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카구야는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평소에는 내가 좀 더 공격적이고, 카구야는 수비적인 태도를 취할 때가 많았다. 다른 패턴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능숙하게 대응하였다.

가장 먼저 나의 왼팔이 날아갔다. 이어진 공격에 왼쪽 눈과 귀까지 손상되었으나, 카구야의 우반신이 너무 깊게 파고들었다. 그 틈을 타 오른손으로 복부를 찔러 안쪽에서 불꽃을 일으켜 내장부터 태워버렸다. 카구야의 오른발이 날아왔으나 내 무릎이 더 빨랐다. 정강이뼈를 부러뜨리자 카구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씨익 웃었다.


“오늘은 내가 이겼군. 배때기에 구멍이 뚫려 있으니 시원하지?”

“응. 통풍이 참 잘 되는 걸.”


카구야도 씨익 웃으며 벌렁 드러누웠다. 가끔 이 녀석의 행동거지를 보면 과거에 공주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뭐, 그런 점에서는 나도 할 말이 없지만. 죽은 아버지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지실 테지.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은 어디 갔느냐, 하고.

슬슬 몸이 재생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왼쪽 눈의 시력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재생이 빠르다고 부러워 할 사람도 있던데 그놈에게 내 간을 입에 쑤셔 박고 싶다. 몸이 망가지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모를 테니까.

문득 미스티아의 장어구이가 먹고 싶어졌다. 그래, 같이 갈 사람도 없는데 카구야나 데리고 갈까. 이 녀석도 슬슬 재생이 끝났을 터.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도 복부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카구야가 보였다. 오늘따라 좀 늦는군.

그런데 카구야의 표정이 이상했다. 웃고 있었으나 평소와는 달랐다. 나와 싸운 뒤의 상쾌한 미소가 아니다. 희열로 가득 찬 저 표정은 묘하게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저 표정,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언제더라?


“모코우.”


나른한 목소리가 나를 자극했다. 이 목소리도 평소와는 다르나, 언젠가 들어본 적 있었다. 카구야가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목소리로 나를 부른 적이 있다고? 대체 언제?


‘네가 후지와라노 모코우, 니?’

“아.”


기억났다. 그래. 분명 저 표정과 저 목소리. 나와 카구야가 처음 만났던 날. 처음 싸운 날. 처음 죽이고 죽였던 그 날. 그때 카구야의 표정. 그때 카구야의 목소리. 틀림없다. 지금 그녀는 그때의 카구야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때로 돌아갔지?


“이런 기분 오랜만이야.”

‘이렇게 격렬한 싸움도 오랜만이네.’


자꾸 그때의 카구야와 겹쳐 보였다. 나와 죽고 죽인 후, 새로운 삶의 쾌감을 찾아 희열을 느끼던 카구야처럼. 그렇다면 지금의 카구야도 무언가 새로운 즐거움을 찾았단 말인가? 대체 무엇을…….

그제야 나는 아직도 카구야의 복부에서 피가 흘러넘친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나는 이미 모든 상처가 아물었거늘 재생은 커녕 지혈조차 되지 않는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그대로 카구야에게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갑다. 얼굴을 보았다. 창백하다.


“카구야!”

“소리 지르지 마. 머리가 울려.”


틀림없다. 이해가 전혀 되지 않지만 카구야는 죽어가고 있었다. 죽지 않는 봉래인이, 머리카락 한 올만 남아도 재생할 수 있는 봉래인이!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이대로 놔두면 카구야는 죽는다.

손을 뻗어 복부를 눌렀다. 손끝에서 일으킨 불로 지져 상처를 지혈했다. 부러진 정강이뼈를 맞추고 다리에 난 상처들을 모조리 태웠다. 약. 약이 필요하다. 당연하게도 나와 카구야는 약 따위는 필요 없는 몸이었기에 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게 너무나도 후회되었다.


“모코우.”


그때 그녀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으나 그녀는 너무나도 기뻐 보였다. 그때처럼.


“이미 늦었어.”

“……왜.”

“나는 죽어.”

“왜!”


나는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희열을 담고 있는 얼굴은 신이 직접 만든 완벽한 조각 같았다. 비단 같은 피부. 앵두를 담은 입술. 맑은 폭포수를 연상시키는 긴 머리. 수많은 남자를 유혹했던 그 자태는 이제 죽음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제 너와 죽고 죽이는 것도 질렸어. 재미를 잃었어. 무언가 새로운 놀이를 찾으려 했지만, 문득 이제 더는 새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그래. 죽음이야. 우리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 최후의 즐거움으로 삼으려고 마지막까지 남겨뒀었는데, 생각해보니 지금이 그 마지막인 것 같아서.”

“…….”

“모코우. 그동안은 즐거웠어. 너와 싸울 때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느꼈어. 그래서 죽는다면 네 손에 죽고 싶었어. 나를 몇 백 년 동안 살게 해 준 너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그딴 걸로 감사하지 마!”


내 감정이 격해지며 몸 전체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내가 잡고 있던 카구야 또한 불에 그슬렸으나 카구야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이미 화상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죽음이 진행되었나?


“아아. 정말 기분 좋구나. 이게 죽음이구나. 후후. 단 한 번밖에 하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울 정도야.”

“개자식이……!”

“표정이 왜 그러니, 모코우? 너는 언제나 날 죽이고 싶어 했잖아. 네 아버지의 원수이기도 하고. 그 소원을 이루었으니,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닥쳐!”


그래. 카구야의 말 대로다. 그녀는 내 아버지의 원수였고, 내가 이런 저주받은 몸을 가지게 된 원흉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와 만난 뒤, 나는 그녀를 몇 번이고 죽였다. 찢어 죽이고, 태워 죽이고, 밟아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그리고 이후 몇 백 년 동안이나 죽였다. 이제는 이유가 있어서 죽이는 게 아니었다. 죽이기 위해 만났다. 그녀를 죽이기 위해 살아왔다. 그런 그녀를 이제 죽일 수 없게 된다고? 그럼 나는? 내 삶은?


“아…… 점점 눈이 감기네……. 나른하고…… 기분 좋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카구야의 눈이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의식이 소멸하여 혼이 육체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안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필사적으로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쿡…….”


그런 나를 보며 카구야는 웃었다. 비웃음일까. 아니면 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대한 순수한 웃음일까. 모르겠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제 나는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손에 힘이 빠졌다. 내 손아귀에서 풀린 카구야의 몸이 서서히 떨어졌다.


“모코우.”


마지막으로 그녀가 손을 뻗으며 나를 불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 나도, 그녀도 손에 힘이 없었기에 스르르 풀리며 맞잡은 손이 떨어졌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기 직전, 그녀는 내게 종말을 고했다.


“안녕.”


툭, 하고 맥없이 그녀의 몸이 땅에 닿았다. 흑단처럼 새까만 눈동자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나의 몸도 그녀처럼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한참 동안 멍청하게 있던 나는 비명을 질렀다. 지옥에 닿을 만큼 크게.


 




“그래. 내가 만들었어. 봉래약을 만든 것도 나니까. 그 반대 역시 만들 수 있었지. 하지만 이제 더는 만들 수 없어. 그 약은 나 혼자 만든 게 아니거든. 봉래약도 그렇지만, 이 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주의 힘이 필요해. 공주의 능력이 있어야 제조할 수 있지. 왜 공주에게 약을 만들어 줬냐고? 공주가 원했으니까. 그것뿐이야. 자, 질문이 끝났으면 좀 비켜줄래? 난 너랑은 달리 바쁜 사람이거든.”

 


“미안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 이미 그녀는 사신의 인도 아래 삼도천을 건너 재판을 받았을 거야. 결과는 보나 마나 지옥이겠지. 지은 죄가 크니. 그녀가 어떻게 죽은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봉래인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너도나도 너를 죽이러 올 테니까.”


 

“뭐야? 봉래인이잖아? 나랑은 상극인 녀석이 웬일이래. 그래도 지금은 근무 중이 아니니까 넘어가자고. 누구? 아하. 달의 공주님 말인가. 그래. 처음엔 깜짝 놀랐지. 절대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영혼이 내 눈 앞에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이었지. 그래서 나는 내가 맡은 임무대로 그녀를 태우고 갔어. 무슨 얘기를 했냐고? 뭐 이것저것. 보통 죽은 영혼은 자신이 죽어서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공포에 젖어 풀이 죽어 있는데 그 공주님은 오히려 매우 유쾌했었어. 죽음을 아주 기뻐하고 있었지. 그래서 기분 좋게 나와 얘기를 나누었어. 나도 모처럼 유쾌한 대화를 나누어 즐거웠고. 그다음의 일은 내게 물을 게 아니라 염마님께 직접 물어야 할 거야.”


 

“평생 이곳에 올 일이 없는 당신이 여기는 무슨 일이죠? 호라이산 카구야? 당신은 그녀가 어디로 갔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래요. 지옥입니다. 당신도 그러하지만, 그녀는 특히 지은 죄가 커요. 수많은 남자를 유혹한 죄. 봉래약을 뿌려 이 세상에 혼란을 일으킨 죄. 에이린으로 하여금 달의 사자들을 죽이게 한 죄. 주어진 능력을 남용하여 시간을 가둔 죄. 밤을 멈춘 죄 등등. 열거하자면 하루 하고도 한나절이 걸릴 겁니다. 수백 년을 살아오며 지은 죄인 만큼 남들보다 더 많은 세월을 지옥에서 보내게 될 겁니다. 이제 됐나요? 그럼 돌아가세요. 후지와라노 모코우.”


 

“어머, 네가 어쩐 일이야. 란이 무슨 헛소리를 하나 했는데 정말이었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뭐? 카구야의 영혼을 지옥에서 빼달라고? 재밌는 농담이구나. 그래. 내 능력이라면 할 수는 있어. 가능하긴 해. 그런데 내가 왜 그걸 해야 하지? 나는 요괴의 현자야. 이 환상향의 균형을 지키는 요괴지. 그런 내게 명계의 규율을 어기라고? 내 친우가 죽어도, 내가 아끼던 무녀가 죽어도 나는 하지 않았어. 내 사리사욕보다는 환상향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니까! 하물며 나와는 별 인연이 없는 카구야를? 웃기지 마. 그런 헛소리는 집에 가서 혼자 하는 게 좋겠다. 그럼.”

 


“확실히 봉래인이 죽지 않은 건 이변이라고도 할 수 있어. 본래 죽지 않아야 할 요괴가 죽은 거니까. 하지만 본인이 원한 죽음이잖아? 죽지 않고 계속 살 수 있었는데, 자신이 원해서 죽은 거니까. 이변을 저지른 요괴는 이제 없으니, 이변은 끝난 거야.”


 

“그야, 슬프죠. 매일 저를 부려먹고 괴롭히긴 했지만, 그래도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하지만 공주님이 원하신 거잖아요? 공주님이 한 번 결심한 일은 영원정에 있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요. 설령 스승님이라 할지라도. 하물며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네 심정은 이해한다만,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어. 누구라도 말릴 수 없었을 테지. 억울하게 죽었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네만, 그녀 스스로 원한 죽음이야. 슬픈 일이지만 그녀를 애도하고 보내주는 수밖에.”


 



“왜!”


손끝에서 강렬한 불꽃이 솟구쳐 요괴의 전신을 태웠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요괴는 곧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나는 재를 발로 밟았다. 재가 하늘로 솟구쳐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거냐고!”


전신에서 일어난 불은 주변에 있던 수많은 시체를 단숨에 태워버렸다. 이미 대지는 나의 분노로 새카매진 지 오래였다.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량한 대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카구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있던 자리를 손으로 쓸어본다. 거친 흙만이 느껴졌다. 이게 아니야.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살결이 있어야 해. 왜 없는 거지? 왜? 어째서? 영원히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왜?

카구야가 죽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처음 며칠간은 환상향 전체가 떠들썩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봉래인이 죽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허나 그것뿐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곧 시들해졌고, 대부분의 요괴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내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일부 요괴들만이 아직도 나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카구야가 죽었다고 해서 나도 죽을 줄 알고.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다. 그래. 봉래인을 죽이는 약을 만든 야고코로 에이린이나 명계를 유지해야하는 사이교우지 유유코, 영혼을 강 건너로 인도해 주는 게 전부인 오노즈카 코마치, 흑백만을 가리는 꽉 막힌 재판관 시키에이키 야마자나두, 머릿속에 환상향밖에 없는 야쿠모 유카리. 그들은 어차피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평등한 레이무도, 카구야를 따르던 레이센도, 심지어는 나의 좋은 이해자라고 생각했던 케이네 조차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카구야를 만나고, 케이네를 알게 되고, 영야이변으로 인해 많은 인요들을 알게 되어 이제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생각했지만, 모두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결국, 예전과 똑같았다. 카구야와 만나기 전의 나. 철저히 혼자였던 나와.


내 유일한 이해자는 이제 없다.

앞으로도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를 알아줄 사람이 없는…… 이 빌어먹을 세계 따윈…….”


필요 없어.


 


몸에서 불꽃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새빨간 불꽃은 서서히 새의 형태로 바뀌었다. 나의 상징과도 같은 불사조는 내 심정을 대변하듯 끝없이 하늘로 올라갔다. 이윽고 요괴의 산 정상이 보일 정도로 올라가자 불사조는 수십 개의 불꽃으로 갈라져 환상향의 전역으로 날아갔다. 나뉜 불꽃 또한 날아가면서 모두 새의 형상으로 변했다.

짐승의 길에도, 무연총에도, 요괴의 산에도, 현무의 계곡에도, 마법의 숲에도. 불사조는 날아갔다. 이제 불사조는 고도를 낮추어 불꽃의 날개에 닿는 모든 것을 불태우겠지. 스스로 태워 환상향 전역을 불로 뒤덮을 것이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딱히 없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태울 뿐이다.


 


“여기 있었구나, 모코우!”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소리는 오랜만에 들은 지라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곧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해냈다. 그래,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지. 고개를 돌려보자 역시나. 하쿠레이 레이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뭐긴, 환상향을 불태우고 있지.”

“이변치고는 너무 심하지 않아?”

“이변? 하!”


레이무의 말에 자연스레 코웃음이 나왔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감이 날카로운 무녀님이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되시나? 아직도 이게 이변 같은 장난으로 보이는 건가? 대답 대신에 불꽃을 날렸다. 재빨리 피한 레이무가 다시 물었다.


“지금 룰을 어기는 거야? 스펠카드 룰을?”

“그런 어린애들 장난을 왜 내가 지켜야 하지?”


서서히 굳어지는 표정을 보니 이제 어느 정도 내 말을 이해한 듯했다. 손에 스펠카드 대신 고헤이와 부적을 꺼내 꽉 쥐었다. 그래, 그래야지. 스펠카드 룰 같은 장난이 아닌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해야지. 그래야 내 분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레이무에게 접근했다. 팔을 흔들어 수십 마리의 불새를 날렸다. 레이무는 당황하지 않고 불새 사이를 능숙하게 피하며 부적을 날렸다. 갖가지 주문이 적힌 부적은 스스로 궤도를 바꾸어 팔방에서 날아들었다. 허나 이쯤은 우습지. 가볍게 불태우고 나니 이번에는 커다란 음양옥이다. 동시에 옆에서는 침이 쇄도해왔다. 과연 레이무. 하쿠레이의 무녀. 요괴퇴치의 천재! 레이무에 비하면 나는 둔재라는 이름조차 아까운 우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인이 몇백 년을 수련하면 천재조차 뛰어넘을 수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우인이 불로불사의 몸이라면 어떨까!

나는 모든 공격을 몸으로 받으면서 전진했다. 음양옥에 맞아 팔이 부러지고, 침이 박혀 전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웬만큼 정신력이 강한 요괴라 해도 이 정도 라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겠지만, 나는 이보다 더한 고통을 매일같이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보다 더한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다.


“큭……!”


레이무가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피탄 당하면 끝인 탄막놀이와는 다르니까. 아니, 내가 봉래인이기 때문에 당황한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탄막놀이와 진짜 싸움은 상당히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보통 요괴라면 이렇게 많은 탄을 맞은 시점에서 이미 끝났다.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봉래인이니까. 언제나 카구야와 죽고 죽이는 게 일상인 나이기 때문에. 항상 평정을 유지하는 레이무가 당황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천하의 레이무다. 저 비상한 두뇌로 언제 묘안을 생각해 낼지 모르니까 빨리 끝을 보는 게 좋다. 나는 온몸에서 영력을 끌어 올려 수백 마리의 불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움직여 레이무의 전 방위를 점했다. 피할 수 없는 탄막을 쏘는 건 스펠카드 룰 위반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단 한 사람에게만 사용했었지.


“끝이다.”

“그래, 끝이야.”


갑자기 끼어든 낯익은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기분 나쁜 보라색 경계를 본 순간, 나는 몸을 틀었으나 이미 늦었다. 순식간에 수십 겹의 결계가 나를 옭아매었다. 몸을 감싸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제기랄!”


온 힘을 다해 결계를 때렸다. 두세 겹 정도가 파괴되었으나, 아직 수많은 결계가 남아 있었다. 게다가 깨진 결계가 자체적으로 수복하는 게 아닌가. 범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결계라니. 과연 빌어먹을 요괴의 현자답군.


“야쿠모 유카리!”


결계를 두들기며 소리쳤다. 어느새 틈새에서 모습을 드러낸 야쿠모 유카리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듯한 차가운 보라색 안광이 나를 비추었다. 그 거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으아아아아아!”


괴성과 함께 내 모든 영력을 끌어모았다. 영력은 거대한 불사조의 형상으로 바뀌었고, 내 분노를 담은 불사조는 자신을 태워 결계에 들이받았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결계들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유카리가 급히 결계를 치기 시작했다. 온통 불에 그슬린 레이무도 옆에 와서 그녀를 도와주었다.

이대로 질 수는 없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 반대로 여기서 이긴다면, 앞으로 나를 방해하는 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요괴의 현자와 하쿠레이의 무녀가 패배하였는데 그 누가 나서겠는가!

이 상황에서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 분노가 내 몸을 증식 한 이후로 단 일 초도 잊은 적 없는 그 얼굴. 카구야. 호라이산 카구야. 내 증오와 분노와 원망과 회한과 슬픔과 애정을 모두 가져간 그녀를 떠올리며, 나는 전신을 불태웠다. 허나 내 감정과는 달리 불사조는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고, 새로운 결계들이 내 몸을 조여들었다. 감각이 하나둘씩 사라졌고 이윽고 의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카, 구……야……!”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요괴의 현자와 하쿠레이의 무녀. 그들이 힘을 합치면 얼마나 강한지는 영야이변 직후에 패배와 함께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도, 그들은 나를 패배자로 만들었다.

아무것도 없다.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고 무언가가 들리지 않았고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 자신의 존재까지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봉래인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허나 서서히 생각조차 마모되고 있었다. 감각이 없는데 생각만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서서히 시시한 잡념들은 사라졌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좀 더 강렬한 생각이 필요했다.

그래서 계속 카구야를 떠올렸다. 그녀와 관련된 생각을 하면 그나마 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 그녀와의 싸움. 그녀에게 처음으로 죽었을 때. 그녀의 심장을 처음 터뜨린 날. 그녀와 처음으로 술을 나누었을 때. 그녀가 사는 영원정에 처음 갔을 때.

돌이켜보면 내가 봉래인이 된 뒤 잃어버린 희노애락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은 그녀였다. 더는 없을 거라 생각했던 감정을 다시 찾아준 사람은 그녀였다. 내 모든 감정을 가져간 사람. 내 인생의 시작. 그리고 이제는 내 인생의 끝.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이미 내 인생은 끝났는데, 나는 무얼 하는 거지? 끝난 생을 붙잡고 있는 내가 너무나도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래. 이곳이라면. 아무리 내가 죽지 않는 봉래인이라 해도 이곳이라면. 편안히 잠들 수 있으리라.


“카. 구. 야.”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름을 되뇐 나는 마침내 카구야에 관한 생각조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팬픽 대회 출품해서 2등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주제는 어... 아마 '라이벌' 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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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

마도카.”

자신의 이름이 불린 그녀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입은 미타키하라 중학교 교복. 허벅지까지 오는 하얀 오버 니 삭스. 깨끗한 갈색 구두. 그리고 붉은 리본으로 멘 분홍색 머리를 가진 소녀였다. 또래의 여자아이보다 체구가 작아 귀여운 인상을 지니고 있는 소녀는 외모에 걸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호무라……?”

이름을 부르는 것치곤 상당히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친하지 않은데 이름을 부르는 사이인 걸까. 하지만 그건 마도카에게만 해당하는 듯했다. 다른 한 사람, 마도카의 이름은 부른 소녀는 거리낌 없이 마도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검은색 머리. 앞머리는 머리띠로 고정을 해 단정하다. 머리와 색을 맞춘 듯 다리에 신은 스타킹은 검은색이었다. 마도카와 같은 미타키하라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귀엽고 순수한 느낌이 드는 마도카와는 달리 아케미 호무라는 어딘지 모르게 어두웠고, 요염했다.

오늘 집에 같이 가지 않을래?”

, 그럴까?”

아직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친한 사람이 없던 마도카는 말을 더듬으며 수락했다. 누가 보면 어쩔 수 없이 수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심 기뻤다. 다만 아직 호무라와 어색한 것뿐. 전학을 온 첫날에 다소 이상한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말을 걸어주며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호무라에게 점점 호감이 생기는 중이었다. 항상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자신을 대할 때는 조금 풀어진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어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호무라를 대할 때면 항상 가슴 한구석이 아련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를 대하는, 아니 연인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다른 옛 친구를 볼 때는 이런 감각이 들지 않았다. 오직 호무라만, 호무라만이 그런 느낌이 들게 했다.

, 그럼 마도카. 슬슬 나가…….”

잠깐, 마도카! 오늘은 나랑 집에 같이 가기로 했잖아!”

교실을 나서려던 그들의 뒤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뚝뚝한 호무라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그러나 옆에 있는 마도카를 의식하고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마도카가 몸을 돌리느라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목소리의 진원지에는 하늘색 머리를 단정히 정돈한 소녀가 있었다. 두 사람과 같은 교복을 입고 회색 니삭스를 입은 소녀는 딱 봐도 활발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앞의 두 사람과는 대조적인 이미지였다.

, 아침에 그랬지?”

그래!”

하늘색 머리의 소녀, 미키 사야카가 웃으며 대답했다. 사야카와 마도카는 소꿉친구로, 마도카가 미국에 가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당연히 마도카에게 있어서 호무라보다는 편한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때 사야카가 고개를 돌려 호무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살짝 혀를 내미는 게 아닌가. 명백한 도발이었다. 호무라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내심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아직 방법은 있다.

너와는 가는 방향이 다를 텐데, 미키 사야카?”

만약 가는 방향이 거의 같았다면, 소꿉친구인 두 사람은 아침마다 같이 오겠지. 허나 호무라가 관측한 바로는 두 사람은 학교 근처에서 접촉하는 경우가 많았다. , 생각보다 길이 많이 겹치지 않는다는 의미다.

중간까지는 같다고! 그러는 너는, 방향이 다르지 않아?”

허점을 찔린 사야카가 소리를 치며 반문했다. 당연히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물론 그에 대한 대비도 철저하다.

거의 같아. 우리 집은 마도카네 집을 지나서 조금 더 가야 있어.”

그런 억지가……!”

내가 사는 곳에 온 적이 없는 네가 어떻게 억지라고 단정할 수 있지?”

역시나, 사야카의 말문이 막혔다. 사야카의 집이 어딘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호무라와는 달리 사야카는 단 한 번도 호무라의 집에 와본 적이 없다. 애초에 정보력에서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났다. 처음부터 사야카에겐 승산이 없었다.

저기……. 그냥 사이좋게 셋이서 가면 안 될까?”

그때 마도카가 조심스레 의견을 꺼냈다. 정말 너무나도 마도카다운 의견이었다. 누구에게나 자애롭고, 누구라도 보듬어주는. 사야카는 친구의 뜻을 존중했고 호무라에겐 거절이라는 선택지조차 없었다.

알았어.”

고마워, 호무라!”

환하게 웃는 마도카를 보며 호무라도 미소 지었다. 그런 호무라를 사야카는 질렸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둘의 상태는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호무라는 매우 진지하게 시간을 5분만 되돌려서 자기 자신을 때리면 어떨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히토미가 말야, 쿄스케가 얼마나 눈치가 없는지 내게 한 시간 동안 연설을 하더라니까?”

아하하. 그래서 어떻게 됐어?”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가서 쿄스케를 실컷 때려줬지!”

사야카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설명을 해 주었다. 마도카는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아직 친하진 않지만, 반 친구들의 이야기가 즐거운 모양이다.

호무라는 뒤에서 표정이 썩은 채로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미키 사야카는 사쿠라 쿄코와 더불어 마법소녀들 중에서 가장 말이 많던 녀석이었다. 토모에 마미와 마도카는 그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자주 했고, 호무라 자신은 그냥 말수가 적었다. 그러니 과거에 시간을 계속 돌릴 무렵에도 마도카를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설득하지 못했지.

그때 사야카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일그러진 호무라의 표정을 보고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게 사야카의 노림수였다. 말주변도 없고 마도카와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 적은 호무라가 사야카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절로 저열한 쾌감이 느껴졌다.

세 사람은 천천히 걷고 있었기에 이대로라면 대략 10분 정도는 더 지속할 터였다. 사야카는 아직 10분이나 남았음에 기뻐했고, 호무라는 10분조차 참지 못할 것 같아 사야카의 입을 막을 방법을 곰곰이 생각했다.

불현듯 재밌는 방법이 호무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도 악의가 철철 넘치는 방법이. 예전의 호무라였다면 절대로 생각 못 할 정도로 사악한 방법이지만, 그녀는 악마다.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살며시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너무 큰 소리가 나지 않게 적절히 조절하여 두 손을 부딪쳤다. . 하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사야카의 말이 끊겼다. 후두부를 강타한 듯한 충격이 그녀를 덮쳤다. 생기가 넘치던 두 눈동자가 흔들리고 밝게 웃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변화에 깜짝 놀란 마도카가 급히 소리쳤다.

사야카! 왜 그래? 괜찮아?”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고 흘러들어오는 강렬한 기억. 마법소녀. 마녀. 큐베. 엔트로피. 토모에 마미. 치즈. 샤를로테. 모모에 나기사. 케이크. 사쿠라 쿄코. 사과. 소울 잼. 영혼. 마녀화. 소원. 동반자살. 카나메 마도카. 멜론. 크림힐트 그레트헨. 엔트로피의 중심점. . 원환의 이치.

아케미 호무라. 호박. 호무릴리. 악마.

머리를 붙잡고 있던 사야카는 금방 고개를 들었다. 다시 웃는 얼굴이었다.

, 괜찮아. 잠깐 현기증이 와서. 별거 아니야.”

정말 괜찮은 거지?”

! 물론이야.”

활기차게 대답하던 사야카가 호무라를 향해 눈을 돌렸다. 순간 웃음이 싹 사라지고 남은 날카로운 눈매가 호무라를 관통했다. 적의와 함께 느껴지는 순수한 분노. 그 눈빛을 받고 있자니 숨이 턱턱 막혀온다. 심리적인 압박이 아니다. 공기 그 자체가 호무라를 압박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어 공기의 흐름을 바꾸었다. 입가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만약 옆에 마도카가 없었다면 주저 없이 물어봤겠지. 기분이 어때?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평범한 소녀에서 세계의 진실을 깨달은 마법소녀가 된 소감이.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칼을 꺼내 나를 찌를 거야? 아니면, 그 마녀의 창으로 나를 꿰뚫을 건가? , 뭐든 좋아. 나를 즐겁게 해 보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마도카가 정말로 없었다면 호무라가 사야카의 기억과 힘을 돌려줄 이유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두 사람이 같이 하교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본말전도다. 호무라는 내심 아쉽게 여겼지만 좋은 표정을 구경한 데에 만족하고 다시 사야카의 기억을 없앨 준비를 했다.

, 나 오늘 일이 있어서 여기서 헤어져야 할 거 같아.”

갑작스레 사야카가 이야기를 꺼냈다. 돌아온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서인지, 되찾은 힘을 가다듬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어쨌든 시간을 벌기 위함이겠지. 호무라는 이쯤에서 끝내기 위해 손을 들었다.

다시 손뼉을 치려고 손을 모으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여기서 사야카의 기억을 지우지 않는다면, 그녀는 어떻게든 호무라를 막으려고 하겠지. 말로? 아니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틀림없이 무력이다. 자신의 양손에 칼을, 마녀의 양손에는 창을 꼬나 쥐고 자신에게로 돌진할 것이다. 설령 승산이 전혀 없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최후에는 절망하겠지.

상상만 해도…….

그래? 아쉽게 되었네.”

손을 내리며 마도카 대신 답변을 해 주었다. 사야카의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호무라는 마도카가 보지 않는 사이 입 모양으로 사야카에게 말했다. ‘그 아이 앞이야.’ 그녀는 눈에서 불꽃이 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부릅떴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계획 없이 호무라에게 덤비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내일 보자!”

! 잘 가!”

사야카는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호무라는 그녀의 뒷모습에 미소를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곧 자신을 즐겁게 해줄 광대를 찬미하는 조소를.

 

 

 

집에 도착한 사야카는 대충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급히 들어왔다. 숨을 고르며 손에 든 가방을 내려놓는데 손에 못 보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아니, 못 보던 반지가 아니다.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잠시 잊어버리고 있던 물건. 아니다. 물건도 아니다. 이걸 어찌 한낱 물건이라고 격하시킬 수 있겠는가.

내 영혼인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호무라의 기억 조작이 있었다고 해도 자신의 영혼을 잊고 있었다니. 텅 빈 몸 대신 자신을 지탱해주는 이 소울 젬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는지.

두 손을 모아 반지를 가볍게 쥐었다. 그러자 반지가 둥근 타원형 구체로 변했다. 금색 금속이 둘러싸고 있는 타원형 구체. 이것이 바로 마법소녀의 영혼이다. 사야카를 비롯한 수많은 마법소녀들의 본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천히 마력을 응용하였다. 그러자 손에 든 소울 젬이 공명하며 폭발적인 마력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머리 색깔과 같은 푸른색 마력은 온몸을 감싸 안았고 다시 빛이 사라졌을 때에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그녀가 있었다. 평범한 교복을 입은 여중생이 아닌, 망토와 칼로 무장한 마법소녀 미키 사야카가.

손에 든 칼을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나쁘지 않다. 손끝에 칼을 다루는 감각이 남아 있다. 며칠만 수련한다면, 예전처럼 다룰 수 있겠지. 마법적인 능력은? 망토를 움직이거나 허공을 걷는 등 기초적인 움직임을 해 보았다. 이것 역시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다음은? 칼을 오른손에 쥐고 왼팔을 향해 내리쳤다. 반쯤 잘린 왼팔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고통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수 초 뒤, 서서히 피가 멎었고 상처조차 없어졌다. 바닥에 웅덩이를 만든 피만이 사야카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치유능력도 괜찮네.”

, 이제 마지막 하나만이 남았다. 가장 중요한 그녀를 움직이는 일이다. 정신을 집중하여 방금 만들어진 피 웅덩이 쪽으로 마력을 흘렸다. 그러자 웅덩이가 일렁거리더니 인어 같은 존재가 일렁거렸다. 두 손에 커다란 칼을 든 연모의 인어. 사야카의 또 다른 모습.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

그 순간, 세계가 잿빛으로 변했다. 색채가 옅은, 무기질적인 세계. 생동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이 세계에서 방문을 열고 나타난 존재가 있었다. 시간을 걸고 소원을 빌었기에 멈춰버린 시간 속을 유일하게 유영할 수 있는 존재. 아케미 호무라가.

그녀는 모처럼 꺼낸 버클러를 쓰다듬었다. 악마가 된 이후로는 딱히 쓸 일이 없었기에 잊고 있었으나, 지금처럼 몰래 염탐을 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도구가 없다. 상대는 자신이 왔다 갔다는 사실조차 모를 테니까.

그녀는 걸음을 멈춘 채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사야카의 손 끝에 걸려 있는 칼과 그녀의 복장, 그리고 피 웅덩이에 어렴풋이 보이는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까지.

내가 시간을 돌릴 때에는 언제나 자신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애송이었는데, 원환의 이치에서 많이 성장한 모양이네.”

일전에 호무릴리가 되어 다른 마법소녀들과 싸울 때도 느꼈지만 미키 사야카는 강해졌다. 자신의 능력과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그것을 활용할 줄 안다. 결계 안에서 잠시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이제 호무라는 사야카를 이길 수 없다. 열 번 싸우는 두어 번 정도 이길 수 있을까. 그 정도로 승률이 낮다.

물론 어디까지나 마법소녀였을 때의 이야기지만. 지금의 호무라는 천 번 싸워서 천 번 모두 이길 자신이 있다.

확인을 끝낸 호무라가 방문을 열다가 문득 실소를 흘렸다. 생각해보면 항상 필요로 사용하던 시간정지인데, 이렇게 시답잖은 이유로 사용하고 있으니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하긴 세계조차 자신의 욕망으로 물들였는데, 이제 와서 고작 능력 하나를 욕망으로 못 쓰겠는가. 쿡쿡거리며 방문을 나갔고, 곧이어 세계는 다시 제 모습을 되찾았다.

물론 사야카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단지 확인을 끝냈기에 더 이상 마력을 낭비하지 않고 모조리 회수하는 작업만 했을 뿐이다. 푸른빛이 사라진 사야카의 방에서는 어떠한 마법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질척거리는 피를 제외하면 말이다.

좋아. 대부분 능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어.”

원환의 이치에 있을 적에 사용하던 능력을 전부 쓸 수 있다는 점은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무뎌진 손만 풀면 그때와 동등한 전투력을 가질 수 있다. 결계 속의 호무릴리를 소탕하던 그때의 힘을.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다.

다만 그와 반대로 마음 한구석에 있던 불안감도 더욱 커졌다. 자신을 기만하려고 하면 기억만 줘도 충분했을 텐데 왜 힘까지 돌려준 것일까? 그것도 사야카 최대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까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사야카는 두 가지 가설로 압축하였다. 첫째. 호무라가 실수를 했다. 철두철미한 호무라지만 그럴 수도 있다. 그녀는 점점 지쳐가고 있다. 처음 악마가 되었을 때랑 비교해보면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다크서클도 짙어졌다. 이 세계를 억지로 유지하는 데에 큰 힘을 사용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마도카도 막아야 하고. 그러다가 자신을 놀려줄 생각으로 내 기억을 돌려주려 했으나 실수로 힘까지 돌려준 것이다. 이 추측이 옳다면 사야카는 호무라를 좀 더 쉽게 제압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생각해도 두 번째 이유가 훨씬 더 가능성이 높았다. 두 번째는……. 사야카가 전력을 다해도 호무라를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에 돌려주었다. 이게 맞다면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만큼 악마가 강하다는 뜻이니까. 첫 번째라고 믿고 싶지만 본능은 두 번째가 맞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야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호무라를 상대해야 한다. 지금 이 세계에서 악마를 막을 수 있는 마법소녀는 사야카 하나뿐이다. 마도카도, 쿄코도, 마미도, 나기사도 지금은 그저 평범한 여자아이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철저하게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사야카가 보기에 지금 호무라는 방심하고 있다. 절대로 질 거라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틀림없이 어딘가에 틈이 생길 거라 보았다. 그 자그마한 틈새에 자신의 칼을 꽂는다. 그리고 이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릴 것이다.

사야카는 자신의 손 위에서 빛나는 소울 젬을 보며 결의를 굳혔다.

 

 

 

며칠 뒤, 하굣길에서 마도카와 헤어진 사야카는 곧바로 호무라가 간 방향으로 뒤쫓아 갔다. 그 날 이후 학교의 기록을 뒤져 그녀의 집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길을 통해 집으로 가는지도 알아내었다. 마법소녀의 신체능력이라면 호무라가 집에 당도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다.

사야카의 예상대로 호무라가 당도하기 전에 먼저 준비한 장소에 도착했다. 대략 2~3분 뒤에 호무라는 이곳에 당도한다. 잠시 벽에 기대어 호흡을 골랐다.

사야카가 세운 계획은 다음과 같다. 우선 가장 먼저 호무라가 지나가는 골목 옆에 숨어 있다가 기습을 감행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거나 지나치게 방심을 했다면 여기서 죽겠지. 그렇게 된다면 사야카의 입장에서는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 실패할 생각을 하고 다음 단계로 돌입한다.

실패할 경우 절망하는 척 연기를 하며 호무라 이목을 집중시킨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더 칼을 들이민다. 그래. 웬만하면 다시 공격을 하는 게 좋다. 그래야 호무라가 더 집중을 할 테니까.

그리고 사야카에게 모든 신경을 쓰고 있는 호무라의 뒤에서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로 기습을 가한다. 일부러 이 거리를 택한 이유가 옥타비아를 쓰기 위해서다. 골목 바로 옆 건물이 공중목욕탕이다. ,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를 소환하는 데 필요한 촉매인 물이 항상 존재한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인어의 마녀를 소환할 수 있을뿐더러 호무라에게 갑작스럽게 기습을 가하기에도 용이하다. 녀석이 미래예지라도 하지 않는 이상, 틀림없이 당할 것이다. 그렇게 믿고 칼을 찔러야 한다.

…….”

긴장감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원환의 이치에서 수많은 싸움을 했지만, 이번만큼 긴장된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마수, 마녀 따위가 아니라 세계의 섭리에 간섭하는 악마다. 신과 같은 마도카의 힘을 가로챘으니 신과 동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하지만 마도카를 위해서라면, 신조차 벤다. 그것이 사야카의 결의였다.

이윽고 호무라의 발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상념에서 깨어난 사야카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칼을 들었다. , 여기서부터 카운트 다운이다. 다섯, , , , 하나!

꺾인 골목에서 호무라의 얼굴이 보였다. 갑작스레 놀란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할 때 이미 칼끝은 얼굴에 닿기까지 불과 10cm 정도를 남겨두었다. 사야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찔러 넣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반응한 호무라는 몸을 비틀었다. 어느새 손목에는 버클러가 달려 있었다. 변신도 하지 않았는데, 굉장한 반응 속도였다. 미리 대비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항상 준비하고 있던 게 틀림없다. 어느 쪽이든 사야카에게 중요한 건 최초의 기습이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호무라가 꺼내 든 저 버클러는 분명 시간을 조종하는 물건. 그렇다면, 사야카에게 남은 방법은 무조건 붙어서 연속적인 공격을 하는 것뿐이다. 시간을 정지하려 할 때, 언제든지 저지할 수 있도록.

사야카에게 있어 정말로 다행인 건 녀석이 마법소녀였을 때와 같은 무장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악마가 되었다고 해서 완전 다른 무언가로 반격할 줄 알았는데 결국 버클러와 총화기. 그렇다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양 손에 든 두 자루의 검을 쉴 새 없이 놀렸다. 호무라는 크게 뒤로 후퇴하며 버클러에서 권총을 꺼냈다. 칼은 총을 이길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중거리 이상에서다. 근접전이라면 칼이 훨씬 유리하다. 상대가 전력을 다하는 토모에 마미라 해도, 근접전에서 순수하게 머스켓만 사용한다면 사야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총과 칼이란 그런 관계니까.

하지만 상대는 몇 십 번이고 시간을 돌려가며 수많은 전장을 누빈 아케미 호무라. 당황하지 않고 칼을 능숙하게 받아내며 때때로 총을 쏘았다. 시간 정지는 사야카에게 저지당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 결국, 사용하는 손은 하나뿐. 그렇다면, 양손을 다 쓰는 사야카가 상대적으로 훨씬 유리했다.

하압!”

기합을 넣고 칼을 크게 휘둘러 권총을 쳐냈다. 저 멀리 날아가는 권총을 뒤로한 채 왼손에 든 검이 목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틀림없이 버클러에서 새로운 총을 꺼내는 것보다 빠르다! 사야카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엇나갔다. 호무라는 버클러에 손을 뻗는 대신 왼손을 들어 사야카의 어깨를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 권총이 튕겨져 나가면서 뒤로 밀린 오른손을 뒤로 당겼다. 동시에 약간 구부러져 있던 오른손을 펼쳤다.

크윽!”

사야카가 그대로 강력한 힘에 밀려 벽에 꽂혔다. 구멍 난 어깨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와 발밑을 적셨다. 마법소녀가 고통을 느낄 정도라니, 얼마나 터무니없는 충격이었는가. 그 실체를 보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호무라의 손에는 보라색 활이 쥐어져 있었다. 사야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젠장, 그래. 녀석에겐 저것도 있었지. 본디 마도카와의 만남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소원을 빌어 마법소녀가 된 호무라의 무장은 시간을 다루는 버클러 하나밖에 없었지만, 마도카가 원환의 이치가 된 뒤로는 그녀가 사용하던 것과 흡사한 활을 다루게 되었다. 활도 가지고 있을 거라 예상했어야 했는데, 방심했다.

하지만 아직 사야카에겐 비장의 한 수가 남았다. 그걸 위해서는 호무라를 방심시킬 필요가 있다. 사야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기억과 힘을 되돌린 건 무슨 속셈이지, 아케미 호무라?”

호무라는 화살 끝을 사야카의 심장을 향해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글쎄, 무엇 때문일까.”

어느새 특유의 무표정을 되찾은 호무라가 무심하게 사야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야카는 그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명백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증거다. 사야카는 잇몸을 꽉 깨물었다.

그나저나 나를 잊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더니, 내가 기억을 돌려주기 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네?”

…….”

네 의지는 그 정도라는 거겠지. 미키 사야카.”

아니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었지만, 벽과 어깨를 관통한 화살은 빠지지 않았다. 더 많은 피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동시에 격통도 더욱 거세졌다. 단순하게 상처가 벌어졌기 때문에 더해진 고통이 아니다. 틀림없이 호무라가 고통을 조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화살에 맞았을 때도 고통을 느꼈던 거군. 사야카가 홀로 중얼거렸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증명해보렴. 네 의지를. 나를 없애고 마도카를 구하고 싶잖아? 그 의지가 내 정신보다 강하다면, 나를 쓰러뜨릴 수 있겠지.”

그렇다면 보여줄게.”

사야카는 서서히 정신을 집중했다. 호무라의 등 뒤, 벽 너머에 있는 물이 느껴졌다.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를 소환하기 위한 매개체, ! 단숨에 마력을 끌어모아 인어의 마녀를 소환한 뒤 곧바로 칼을 찔렀다.

내 의지를!”

요란한 굉음과 함께 벽이 부서지며 그 속에서 커다란 창날이 번뜩였다. 날카롭게 벼려진 마름모 모양의 창날은 호무라의 등을 향해 쇄도했고, 그대로 호무라의 등을, 스쳐 지나가서, 사야카의 배를 관통했다. 방금 느꼈던 통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지만, 그보다는 정신의 혼란이 사야카를 괴롭혔다. ? 어째서? 나의 마녀,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가?

좋은 표정이야.”

그런 사야카에게 호무라가 다가왔다. 이제는 누가 봐도 명백한 비웃음을 띄고 있는 표정을 짓고는, 다가와서 사야카의 얼굴을 가까이하였다. 서로의 눈동자가 무슨 빛을 띠고 있는지 보일 정도의 거리였다.

어떻게? 라니. 너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잊은 모양이구나.”

…………!”

정신에 심각한 충격을 받은 사야카의 입에서 가까스로 두 음절이 새어나왔다. 그 모습이 호무라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래. 악마. 신조차 떨어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악마야. 세계를 개편할 수 있는 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고작 마녀 하나 조종할 수 없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내게 힘을 돌려준 이유는……설마……?”

물론.”

호무라는 잠시 말을 끊고 사야카의 푸른 눈동자를 감상했다. 격렬하게 떨리고 있는 두 눈동자는 한 가지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감정이자 본능적인 감정.

공포로 가득 찬 너의 표정을 감상하기 위해서야.”

사야카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호무라의 보라색 눈동자를 보았다. 전혀 떨림이 없는 두 눈동자는 여러 감정으로 아롱져 있었다. 기쁨, 환희, 즐거움, 행복,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7대 죄악 중 하나이자 궁극의 죄악.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최악의 감정.

……교만……!”

날 즐겁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미키 사야카.”

마지막으로 호무라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럼, 그 애 앞에서는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야지?”

, 하고 언젠가 들어보았던 박수 소리를 들으며 미키 사야카의 의식이 가라앉았다.

 

 

 

마도카.”

오늘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케미 호무라에게 있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일상을 위해 수많은 것을 희생했고 또한 지금도 희생하고 있기에 그녀는 이 일상을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과 마도카의 이러한 일상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라도 용납하지 못했다.

잠깐, 나도 같이 가!”

이를테면 저쪽에서 달려오고 있는 미키 사야카 같은 자들을 말이다. 며칠 전에 따끔하게 혼을 내 줬거늘, 여전히 저 모양이다. 아니, 생각해보면 관련된 기억을 모조리 지웠으니 기억을 못 하고 있겠구나. 혹시라도 그때 느꼈던 공포가 영혼에 각인되지 않았을까, 하고 기대했으나 지금의 사야카를 보아하니 그런 건 전혀 없는 듯했다. 호무라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만간 한 번 더 그녀에게 공포를 새겨줄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다시 한 번 공포로 물들이자.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비열한 쾌감이 올라왔다. 문득 기억을 잃기 전 사야카가 그녀를 불렀던 호칭이 떠올랐다. 교만한 악마. 아아, 확실히 교만에 빠졌을지도. 하지만 나는 악마잖아? 교만하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지.

그녀는 마도카와 사야카의 뒤에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악마만이 지을 수 있는 교만한 미소를.

 

 

 

 



마마마 7대 죄악 합작에서 '교만' 을 주제로 쓴 팬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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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

부장님. 보고서 완성했습니다.”

신입사원이 손에 두툼한 보고서를 들고 부장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부장은 잠시 그를 훑어보더니 이내 보고서를 잡고는 빠르게 넘기기 시작했다. 제대로 보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으나 주위에 있는 누구도 책을 잡지 못했다. 저렇게 봐도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확인하기 때문이다.

.”

. 부장님.”

릭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설마, 또 뭔가 잘못된걸까. 벌써 3번째 수정한 보고서였다. 이제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제발, 이번엔 제발.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이렇게 표가 난잡하면 가독성이 떨어지지 않나. 그리고 옆에 그래프는 이게 뭔가? 이런 도표에선 막대형 그래프보단 원형 그래프가 훨씬 좋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닐테고. 여기 34페이지에 이 자료는 확실하지 않으니 빼고 내가 보내준 6월 조사 결과를 써라고 저번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그건 어디 갔는지 모르겠군.”

……죄송합니다.”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이루어 준다고 누가 말했는데, 릭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인 듯했다. 릭의 어깨가 절로 내려갔다.

고칠 부분들 다 적어 놓았으니 이대로 수정하도록. 쓸데없이 다른 거 건드리지 말고.”

어느새 지적사항들을 다 적어놓은 모양이다. 정말 자기중심적 성격에 재수 없지만 능력 하나는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부장을 하고 있지만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 홀든 부장님.”

“‘홀든부장님?”

, 실례했습니다. 벨져 부장님.”

부장은 이름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굴지의 대기업 홀든 가문의 차남이었다. 그러나 완벽주의자인 벨져에겐 가문조차도 걸림돌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완벽을 증명받길 원하는 사람이었기에 성으로 불리는 걸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평소에도 다른 사원들에게 벨져 부장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보고서가 지적받은 데다 말실수까지 한 릭은 풀이 죽어 자신의 자리에 돌아왔다. 주변에 있던 사원들은 그의 눈치를 보며 하나둘씩 퇴근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릭과 벨져 둘만 야근을 하는 모양이었다.

릭이 투덜거리며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등을 건드렸다. 순간 짜증이 솟구쳐 홱 돌아보다가 딱딱한 무언가에 머리를 부딪쳤다. 머리를 문지르며 자세히 보니 캔커피였다.

회사 내에 있는 자판기에는 싸구려 커피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다.”

벨져가 손에 든 캔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릭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캔커피를 받아 들었다.

우리 부서에 멍청이들 밖에 없어서 그나마 일을 맡길 사람이 자네밖에 없는 걸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그래서 저만 매일 남기신 겁니까?”

릭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벨져가 특히 자신에게만 잔소리를 많이 한다는 걸 릭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 냉정한 부장의 입에서 직접 저런 말을 들으니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 그래도 날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지만.”

, . 여부가 있겠나. 다 이해 하오……. 아차.”

무의식적으로 편하게 말을 했다가 다 뱉고 나서야 눈치를 챈 릭이 벨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벨져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둘만 있을 땐 괜찮다.”

그것 참 다행이오.”

릭도 따라 웃었다.

그렇다고 일 안 해도 되는 건 아니다.”

. 너무 재촉하지 마시오. 알아서 다 할테니.”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이내 서로의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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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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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중천에 뜬 야심한 시각. 화려한 건물에서 한 무리의 회사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들 퀭한 몰골에 걸음도 불안정했다. 하루이틀 야근을 한 폼이 아니다. 가장 뒤에서 걷고 있던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회사원의 얼굴에는 다크서클이 짙었다.

문득 앞에 있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덕분에 가장 뒤에서 걷던 회사원은 앞서 걷던 회사원의 등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픈 머리를 매만지며 소리를 치려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회사원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들을 제치고 앞으로 갔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길게 기른 은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서 있는 미남자의 얼굴은 웬만한 여성들이 울고 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강렬한 남성미가 존재했다. 지나가던 여성들은 그 얼굴을 보며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고 남성들은 불타는 질투심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짜증이 폭발한 누군가 달려들 법도 하지만, 범접하기 힘든 날카로운 분위기와 더불어 허리에 차고 있는 두 자루의 칼을 보자 그 누구도 선뜻 나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지루한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다가 앞으로 나온 회사원을 보자 고개를 들고 다가왔다.

.”

자신의 이름이 불린 릭 톰슨은 슬며시 웃었다. 환영의 의미였건만 피곤함에 절여 있는 채로 미소를 짓자 상당히 괴기한 표정이 나왔다. 주변의 회사원들이 숨죽여 웃었지만, 미남자는 웃지 않았다.

아니, 벨져. 여기는 어쩐 일로 왔소.”

변덕이다.”

벨져 홀든이 즉각 대답했다. 릭은 크게 웃었다. 아까보다는 좀 나은 표정이 나왔다.

그나저나 정말 늦게 나오는군. 회사원이라는 직업은 보통 저녁 즈음에 일이 끝난다고 들었는데.”

보통은 그렇지만, 야근이라는 게 있지. 식사는 했소? 여기서 서 있지 말고 뭐라고 먹으러 갑시다.”

주변의 지나친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방금 일을 마친지라 배가 고프기도 한 릭은 벨져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가게로 갔다. 늦은 시간이라 식당 대부분이 문을 닫은 상태였기에 어딜 가는가 궁금했으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늦은 시간까지 영업하는 도넛 전문점이었다.

뭐든 먹고 싶은 걸 고르시오. 멀리서 왔으니 먹을 건 내가 사야지.”

이것저것 도넛을 고르는 릭과는 달리 벨져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저 입구에 서서 무표정으로 도넛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언가 잘못된 줄 안 종업원이 그의 옆에 와서 물었다.

저기, 손님……? 뭐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런 건 아니다.”

벨져가 짧게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말이 없었다. ‘내가 잘못한 건가?’ 옆에 있던 종업원은 자신이 무얼 잘못한 건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그러자 멀리서 보고 사태를 이해한 릭이 그들의 곁에 다가왔다.

신경 쓰지 마시오. 직원분이 실수를 한 건 아니니까.”

, .”

미심쩍은 얼굴로 종업원이 자기 할 일을 하러 가자 릭이 고개를 숙이고 벨져에게 조용히 물었다.

자네, 혹시 도넛 먹는 게 처음인가?”

네가 먹는 건 본 적이 있지만.”

벨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릭이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명문 귀족집의 후예답게 서민들의 음식인 도넛을 먹어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별수 없이 릭이 벨져의 것까지 골라주었다. 벨져의 입맛을 고려하여 최대한 달지 않은 걸로 골랐으나 한 입 베어먹은 벨져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너무 달아.”

하하, 그 맛에 먹는 거지.”

벌써 세 개째 도넛을 먹어치우고도 모자라 다시 손을 뻗는 릭을 보고 벨져도 다시 도넛을 베어 물었다. 벨져의 눈빛이 절로 흐려졌다.

이런 걸 입에 달고 다니는 건가. 이해할 수 없군.”

자네도 먹다 보면 그 이유를 깨닫게 될 걸세. 그리고 머리 쓰는 데에는 당분이 필요하거든.”

릭의 말을 들은 벨져가 도넛을 노려보았다.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는 도넛은 스스로 몸을 빛내며 그를 유혹했다. 이를 꽉 깨문 벨져는 다시 도넛을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여전히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았지만 제법 괜찮은 맛이 느껴졌다. 천천히 도넛을 다 먹는 벨져의 모습을 보며 릭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때, 맛있지 않나?”

그럭저럭 먹을 만하군.”

입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 낸 뒤 옆에 있던 커피로 손을 뻗었다. 당분으로 가득 찬 입안을 쓴 커피로 달래려고 했으나 한 모금 마시는 순간 곧바로 뱉어냈다. 혀가 본능적으로 커피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렇게 맛없는 커피는 처음이군.”

그야 자네가 평소에 먹던 고급품에 비하면……. 어쩔 수 없네.”

릭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직원의 시선을 살피다가 한 손으로 공간을 열어 물 한 잔을 꺼내왔다. 벨져는 릭에게 컵을 받자마자 바로 입에 털어 넣었다. 끔찍해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안타리우스의 클론들이 끊임없이 몰려오던 디시카의 전투 이후 저 표정은 처음 봤다.

문득 릭은 안타리우스와의 전쟁을 떠올렸다. 전쟁. 그래. 이제는 끝난 전쟁. 예전에는 자주 본 여행지의 풍경을 지긋지긋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이제는 같은 풍경을 몇 번이고 봐도 지겹지 않다. 세상 거 어떤 것도 전쟁보다 지긋지긋하지는 않으리라.

요즘 바쁜가?”

그의 상념 너머에서 벨져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 속에서 빠져나온 릭이 벨져를 보았다. 팔짱을 끼고 지그시 바라보는 폼이 심상치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언제나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벨져의 감정을 읽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저 친구, 제법 화가 나 있군.

하하, 미안하네. 벨져. 회사에서 매일 야근에 특근에, 사람을 제대로 부려 먹는 중이야.”

미국에 사는 릭과 오스트리아에 사는 벨져.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제법 멀었기 때문에 항상 공간능력자인 릭이 벨져를 만나러 갔었다. 벨져는 오기 힘들었지만, 릭에게 그 정도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최근엔 일로 바빠서 벨져를 만나러 가지 못한지가 제법 되었다.

그러게 홀든 가에서 일하라니까.”

재빨리 사과의 말을 건네서 그런지 벨져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릭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했지 않나.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났으니 원래의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제발 야근은 좀 줄여줬으면 좋겠지만, 하고 릭이 덧붙였다.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 벨져도 더는 권할 수 없었다. 그들은 뒤이어 좀 더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윗사람 이야기가 나오자 릭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자신의 상사를 욕했고 벨져는 제레온을 떠올리며 연신 찬양을 늘어놓았다.

이윽고 점원이 와서 폐장할 시간이 되었다고 알려주자 릭과 벨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를 걸었다. 사근사근하게 담소를 나누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높은 건물 앞이었다. 걸음을 멈춘 릭이 뒤를 돌아 벨져를 보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좋은 걸 보여주리다.”

릭이 벨져에게 손을 내밀었다. 벨져는 익숙하다는 듯 릭의 손을 잡았다.

눈 감으시오.”

이제는 릭의 공간이동이 익숙했기에 굳이 눈을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벨져는 그의 말에 따라 눈을 감았다. 낯익은 느낌이 전신을 감싸 안았고, 잠시 뒤 주변의 공기가 바뀌었다. 조금 전보다 다소 쌀쌀한 공기가 벨져의 몸을 파고들었다. 살짝 춥다고 느낄 즈음, 귓가에 릭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눈을 떠도 괜찮소.”

벨져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 그를 환영하듯 빛나고 있었다. 수많은 빌딩의 숲이 만들어 낸 화려한 야경. 인간이 만들어 낸 극한의 불빛이 반짝이며 벨져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가 항상 보아오던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과는 다르지만, 분명히 감탄을 토할 가치가 있는 광경이었다. 벨져는 진심으로 이 풍경을 만든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언젠가 전쟁이 끝나면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었소. 마침 기회가 되어서 다행이오.”

……그래. 고맙다. .”

별말씀을.”

벨져가 릭을 보며 웃었다. 릭도 벨져를 보며 웃었다. 반짝이는 야경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to. 나메코님

모든 전쟁이 끝난 뒤에 릭과 벨져의 일상이라는 느낌으로 썼습니다. 그림 선물해줘서 고마워요! 어린이날이 9일이나 지났지만 ㅎㅎ... 늦게나마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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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

똑똑.

고요히 흐르는 정적 속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번. 방문해도 되는지 묻는 정중한 소리다. 노크에 대한 대답이 한참 동안 없었지만, 방문자는 서두르지 않았다. 다시 노크하지도 않고 목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예의가 몸에 밴 솜씨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소리가 들리지 않자 이상함을 느낀 그는 손잡이를 돌렸다. 문을 열고 나타난 방문자는 긴 은발을 휘날리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뭇 여성보다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남성스러운 미가 물씬 풍기는 미남이었다. 그의 얼굴을 본 여자들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고 남자들은 타오르는 질투심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외모를 자랑하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벨져 홀든에게 있어 아름다운 외모는 지극히 당연하였다.

벨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저택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선 채로 눈을 감았다. 모든 신경을 집중한 귀에서 흐릿한 소리를 잡았다. 다시 눈을 떤 벨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걸음을 옮기더니 어느 방에 들어가 거기 있는 벽장문을 열었다.

낡은 벽장 안에는 한 소녀가 주저앉아 있었다. 탐스러운 갈색 머리를 가지런히 묶은 그녀는 어디에서나 빛나는 화려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 어떤 남자라도 그녀가 지나간다면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표정에는 두려움이 가득했고 손과 발은 불안함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것조차도 아름다웠으나, 벨져는 위태로운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다. 리사 스트라우스는 그런 소녀였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벨져가 입을 열었다. 나긋하면서도 위엄이 서려 있는 목소리였다. 벨져 홀든이 아니라면 절대로 낼 수 없는 목소리에 리사는 움찔거렸다. 무어라 대답을 하려는 순간, 창밖에서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벨져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에 온다고 했던가. 벨져는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보며 부하인 바이런 헌터가 멀리서 커다란 태풍이 오고 있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다시 고개를 원래대로 돌리자, 두 귀를 꽉 막고 온몸을 떨고 있는 리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리사 스트라우스?”

싫어…….”

리사의 입에서 얇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무얼까. 무엇이 또 리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벨져가 재차 입을 열려는 순간, 빛보다 늦게 도착한 소리가 대기를 강타했다. 고요한 저택을 가득 채우는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싫어!”

동시에 리사의 비명이 방을 메웠다. 천둥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작은 소리였지만, 곁에 서 있는 벨져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다. 리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는 순식간에 증폭되었고 강한 음파가 되어 벨져를 덮쳤다. 하지만 벨져는 섬광이라는 이명에 어울리는 빠른 동작으로 검을 뽑아 음파를 막았다. 그러나 완전히 막지는 못했는지 옆구리가 조금 베였다.

붉게 물드는 벨져의 옆구리를 본 리사의 동공이 커졌다. 정신이 불안정한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 지금처럼 한 가지 감정에 극도로 시달릴 때, 소리는 리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폭주한다. 리사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막상 그 결과물을 눈앞에 두자 더욱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 ……. …….”

칼을 다시 집어넣은 벨져가 리사에게 다가왔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그녀의 손을 살짝 맞잡았다. 벨져의 표정은 처음 그대로였다.

살짝 스친 정도이니 괜찮다.”

리사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벨져는 무릎을 굽혀 앉아 있는 리사와 눈높이를 맞췄다. 조금은 안정을 되찾았으나 여전히 공포가 가득한 눈동자가 있었다.

번개가 무서운가?”

리사가 다시 움찔거렸다. 벨져는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 소리가…….”

그렇군.”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몸을 움직였다. 조심스레 몸을 굽히더니 리사의 옆에 앉은 것이다. 리사는 잠깐 당황했으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마음을 진정시켰다. 정자세로 앉은 벨져는 앞에 있는 창문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 벨져가 옆에 있으니,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 말을 들은 리사는 멍하니 있다가 이내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지은 미소였다. 그녀는 머리를 눕혀 벨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조용히 읊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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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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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카. 선물이야.”

뜬금없이 마도카의 앞에 나타난 호무라가 잘 포장된 상자를 하나 내려놓았다. 점심시간이라 상당히 혼잡했지만, 대두분의 시선을 끌기엔 충분했다. 그 주인공이 된 마도카는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상자를 집었다.

……. 고마워. 호무라.”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포장을 풀자 보기만 해도 달콤함이 흘러나오는 새까만 초콜릿이 있었다. 마도카의 얼굴이 꽤 밝아졌다. 호무라는 감정이 없는 표정을 유지한 채로 말했다.

오늘이 발렌타인 데이잖아. 그래서 준비해 봤어.”

그러고 보니 오늘은 214, 발렌타인 데이였다. 아침부터 일부 여학생들이 좋아하는 남학생에게 초콜릿을 준다고 수선을 떨었다. 아직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마도카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지만.

, 우정 초콜릿이라는 거구나? 정말 고마워. 호무라. 직접 만든 거야?”

물론.”

포장 상태와 초콜릿의 모양을 보아하니 틀림없는 수제였다. 이런 건 본인 앞에서 하나 정도는 먹어줘야 예의라고 생각한 마도카는 안에 남은 포장을 마저 뜯고 초콜릿을 하나 집어 들었다. 초콜릿은 마치 보석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럼.”

한 입 베어 먹자 진한 초콜릿의 향이 배어 나왔다. 동시에 안쪽에서 무언가가 쏟아져 나왔다. 초콜릿과는 또 다른 달콤함이 마도카의 혀를 자극했다. 반쯤 베어 문 초콜릿을 보자 안쪽에 분홍색을 띠고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백년초를 조금 넣어봤어.”

백년초?”

다소 생소한 식물 이름이었다. 마도카뿐만 아니라 이 나이대의 학생이라면 쉽게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리라. 어리둥절한 마도카에게 호무라가 친절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물론 표정은 여전히 없었다.

민간약으로 쓰는 약초야. 여러 가지 영양분이 많이 들어 있고 몸에도 좋지. 물론 이렇게 만들면 맛도 괜찮고.”

그렇구나.”

마도카는 다시 한 번 초콜릿을 보았다. 보석 형태를 띤 검은 초콜릿. 안에는 분홍색의 달콤함. 순간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일까. 좀 더 전에, 내가 지금의 내가 되기 직전에 어디선가…….

마도카.”

호무라의 손이 마도카의 손을 잡았다. 내밀어 진 그녀의 손등에는 기묘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그 안에 소중한 것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듯이, 호무라는 손등의 무늬를 항상 애지중지했다.

맛있지?”

처음으로 호무라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살포시 미소를 지은 것이다. 그러나 그 미소는 환하게 웃는 미소도 아니었고 누군가를 비웃는 조소도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모른다.

, 으응.”

마도카가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만족한 듯 나머지 한 손을 뻗어 자신이 만든 초콜릿을 집었다. 그러더니 한입에 초콜릿을 털어 넣었다. 입안에서 극상의 달콤함을 맛보며 그녀는 잠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입안에 들어 있는 게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마도카. 백년초의 꽃말이 뭔지 아니?”

……. 그게, 잘 모르겠는데.”

뜬금없는 질문에 마도카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호무라는 살짝 고개를 숙여 자신의 입을 마도카의 귀에 갖다 댔다. 이유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떨고 있는 마도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불타는 마음이야. 마도카.”

다시 고개를 들은 호무라는 마도카에게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마도카는 마치 돌이라도 된 듯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2015. 03. 16. 


늦은 발렌타인 데이 호무마도.

 

 

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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