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한 그 날은,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평범한 날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죽림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고, 언제나처럼 홀연히 나타난 카구야가 내게 시비를 걸었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적당히 응수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카구야가 나를 공격했고, 언제나처럼 반격을 날렸다. 결국 언제나처럼 죽고 죽이는 싸움을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내 일상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카구야는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평소에는 내가 좀 더 공격적이고, 카구야는 수비적인 태도를 취할 때가 많았다. 다른 패턴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능숙하게 대응하였다.

가장 먼저 나의 왼팔이 날아갔다. 이어진 공격에 왼쪽 눈과 귀까지 손상되었으나, 카구야의 우반신이 너무 깊게 파고들었다. 그 틈을 타 오른손으로 복부를 찔러 안쪽에서 불꽃을 일으켜 내장부터 태워버렸다. 카구야의 오른발이 날아왔으나 내 무릎이 더 빨랐다. 정강이뼈를 부러뜨리자 카구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씨익 웃었다.


“오늘은 내가 이겼군. 배때기에 구멍이 뚫려 있으니 시원하지?”

“응. 통풍이 참 잘 되는 걸.”


카구야도 씨익 웃으며 벌렁 드러누웠다. 가끔 이 녀석의 행동거지를 보면 과거에 공주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뭐, 그런 점에서는 나도 할 말이 없지만. 죽은 아버지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지실 테지.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은 어디 갔느냐, 하고.

슬슬 몸이 재생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왼쪽 눈의 시력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재생이 빠르다고 부러워 할 사람도 있던데 그놈에게 내 간을 입에 쑤셔 박고 싶다. 몸이 망가지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모를 테니까.

문득 미스티아의 장어구이가 먹고 싶어졌다. 그래, 같이 갈 사람도 없는데 카구야나 데리고 갈까. 이 녀석도 슬슬 재생이 끝났을 터.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도 복부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카구야가 보였다. 오늘따라 좀 늦는군.

그런데 카구야의 표정이 이상했다. 웃고 있었으나 평소와는 달랐다. 나와 싸운 뒤의 상쾌한 미소가 아니다. 희열로 가득 찬 저 표정은 묘하게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저 표정,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언제더라?


“모코우.”


나른한 목소리가 나를 자극했다. 이 목소리도 평소와는 다르나, 언젠가 들어본 적 있었다. 카구야가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목소리로 나를 부른 적이 있다고? 대체 언제?


‘네가 후지와라노 모코우, 니?’

“아.”


기억났다. 그래. 분명 저 표정과 저 목소리. 나와 카구야가 처음 만났던 날. 처음 싸운 날. 처음 죽이고 죽였던 그 날. 그때 카구야의 표정. 그때 카구야의 목소리. 틀림없다. 지금 그녀는 그때의 카구야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때로 돌아갔지?


“이런 기분 오랜만이야.”

‘이렇게 격렬한 싸움도 오랜만이네.’


자꾸 그때의 카구야와 겹쳐 보였다. 나와 죽고 죽인 후, 새로운 삶의 쾌감을 찾아 희열을 느끼던 카구야처럼. 그렇다면 지금의 카구야도 무언가 새로운 즐거움을 찾았단 말인가? 대체 무엇을…….

그제야 나는 아직도 카구야의 복부에서 피가 흘러넘친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나는 이미 모든 상처가 아물었거늘 재생은 커녕 지혈조차 되지 않는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그대로 카구야에게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갑다. 얼굴을 보았다. 창백하다.


“카구야!”

“소리 지르지 마. 머리가 울려.”


틀림없다. 이해가 전혀 되지 않지만 카구야는 죽어가고 있었다. 죽지 않는 봉래인이, 머리카락 한 올만 남아도 재생할 수 있는 봉래인이!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이대로 놔두면 카구야는 죽는다.

손을 뻗어 복부를 눌렀다. 손끝에서 일으킨 불로 지져 상처를 지혈했다. 부러진 정강이뼈를 맞추고 다리에 난 상처들을 모조리 태웠다. 약. 약이 필요하다. 당연하게도 나와 카구야는 약 따위는 필요 없는 몸이었기에 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게 너무나도 후회되었다.


“모코우.”


그때 그녀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으나 그녀는 너무나도 기뻐 보였다. 그때처럼.


“이미 늦었어.”

“……왜.”

“나는 죽어.”

“왜!”


나는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희열을 담고 있는 얼굴은 신이 직접 만든 완벽한 조각 같았다. 비단 같은 피부. 앵두를 담은 입술. 맑은 폭포수를 연상시키는 긴 머리. 수많은 남자를 유혹했던 그 자태는 이제 죽음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제 너와 죽고 죽이는 것도 질렸어. 재미를 잃었어. 무언가 새로운 놀이를 찾으려 했지만, 문득 이제 더는 새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그래. 죽음이야. 우리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 최후의 즐거움으로 삼으려고 마지막까지 남겨뒀었는데, 생각해보니 지금이 그 마지막인 것 같아서.”

“…….”

“모코우. 그동안은 즐거웠어. 너와 싸울 때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느꼈어. 그래서 죽는다면 네 손에 죽고 싶었어. 나를 몇 백 년 동안 살게 해 준 너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그딴 걸로 감사하지 마!”


내 감정이 격해지며 몸 전체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내가 잡고 있던 카구야 또한 불에 그슬렸으나 카구야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이미 화상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죽음이 진행되었나?


“아아. 정말 기분 좋구나. 이게 죽음이구나. 후후. 단 한 번밖에 하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울 정도야.”

“개자식이……!”

“표정이 왜 그러니, 모코우? 너는 언제나 날 죽이고 싶어 했잖아. 네 아버지의 원수이기도 하고. 그 소원을 이루었으니,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닥쳐!”


그래. 카구야의 말 대로다. 그녀는 내 아버지의 원수였고, 내가 이런 저주받은 몸을 가지게 된 원흉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와 만난 뒤, 나는 그녀를 몇 번이고 죽였다. 찢어 죽이고, 태워 죽이고, 밟아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그리고 이후 몇 백 년 동안이나 죽였다. 이제는 이유가 있어서 죽이는 게 아니었다. 죽이기 위해 만났다. 그녀를 죽이기 위해 살아왔다. 그런 그녀를 이제 죽일 수 없게 된다고? 그럼 나는? 내 삶은?


“아…… 점점 눈이 감기네……. 나른하고…… 기분 좋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카구야의 눈이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의식이 소멸하여 혼이 육체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안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필사적으로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쿡…….”


그런 나를 보며 카구야는 웃었다. 비웃음일까. 아니면 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대한 순수한 웃음일까. 모르겠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제 나는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손에 힘이 빠졌다. 내 손아귀에서 풀린 카구야의 몸이 서서히 떨어졌다.


“모코우.”


마지막으로 그녀가 손을 뻗으며 나를 불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 나도, 그녀도 손에 힘이 없었기에 스르르 풀리며 맞잡은 손이 떨어졌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기 직전, 그녀는 내게 종말을 고했다.


“안녕.”


툭, 하고 맥없이 그녀의 몸이 땅에 닿았다. 흑단처럼 새까만 눈동자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나의 몸도 그녀처럼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한참 동안 멍청하게 있던 나는 비명을 질렀다. 지옥에 닿을 만큼 크게.


 




“그래. 내가 만들었어. 봉래약을 만든 것도 나니까. 그 반대 역시 만들 수 있었지. 하지만 이제 더는 만들 수 없어. 그 약은 나 혼자 만든 게 아니거든. 봉래약도 그렇지만, 이 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주의 힘이 필요해. 공주의 능력이 있어야 제조할 수 있지. 왜 공주에게 약을 만들어 줬냐고? 공주가 원했으니까. 그것뿐이야. 자, 질문이 끝났으면 좀 비켜줄래? 난 너랑은 달리 바쁜 사람이거든.”

 


“미안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 이미 그녀는 사신의 인도 아래 삼도천을 건너 재판을 받았을 거야. 결과는 보나 마나 지옥이겠지. 지은 죄가 크니. 그녀가 어떻게 죽은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봉래인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너도나도 너를 죽이러 올 테니까.”


 

“뭐야? 봉래인이잖아? 나랑은 상극인 녀석이 웬일이래. 그래도 지금은 근무 중이 아니니까 넘어가자고. 누구? 아하. 달의 공주님 말인가. 그래. 처음엔 깜짝 놀랐지. 절대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영혼이 내 눈 앞에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이었지. 그래서 나는 내가 맡은 임무대로 그녀를 태우고 갔어. 무슨 얘기를 했냐고? 뭐 이것저것. 보통 죽은 영혼은 자신이 죽어서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공포에 젖어 풀이 죽어 있는데 그 공주님은 오히려 매우 유쾌했었어. 죽음을 아주 기뻐하고 있었지. 그래서 기분 좋게 나와 얘기를 나누었어. 나도 모처럼 유쾌한 대화를 나누어 즐거웠고. 그다음의 일은 내게 물을 게 아니라 염마님께 직접 물어야 할 거야.”


 

“평생 이곳에 올 일이 없는 당신이 여기는 무슨 일이죠? 호라이산 카구야? 당신은 그녀가 어디로 갔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래요. 지옥입니다. 당신도 그러하지만, 그녀는 특히 지은 죄가 커요. 수많은 남자를 유혹한 죄. 봉래약을 뿌려 이 세상에 혼란을 일으킨 죄. 에이린으로 하여금 달의 사자들을 죽이게 한 죄. 주어진 능력을 남용하여 시간을 가둔 죄. 밤을 멈춘 죄 등등. 열거하자면 하루 하고도 한나절이 걸릴 겁니다. 수백 년을 살아오며 지은 죄인 만큼 남들보다 더 많은 세월을 지옥에서 보내게 될 겁니다. 이제 됐나요? 그럼 돌아가세요. 후지와라노 모코우.”


 

“어머, 네가 어쩐 일이야. 란이 무슨 헛소리를 하나 했는데 정말이었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뭐? 카구야의 영혼을 지옥에서 빼달라고? 재밌는 농담이구나. 그래. 내 능력이라면 할 수는 있어. 가능하긴 해. 그런데 내가 왜 그걸 해야 하지? 나는 요괴의 현자야. 이 환상향의 균형을 지키는 요괴지. 그런 내게 명계의 규율을 어기라고? 내 친우가 죽어도, 내가 아끼던 무녀가 죽어도 나는 하지 않았어. 내 사리사욕보다는 환상향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니까! 하물며 나와는 별 인연이 없는 카구야를? 웃기지 마. 그런 헛소리는 집에 가서 혼자 하는 게 좋겠다. 그럼.”

 


“확실히 봉래인이 죽지 않은 건 이변이라고도 할 수 있어. 본래 죽지 않아야 할 요괴가 죽은 거니까. 하지만 본인이 원한 죽음이잖아? 죽지 않고 계속 살 수 있었는데, 자신이 원해서 죽은 거니까. 이변을 저지른 요괴는 이제 없으니, 이변은 끝난 거야.”


 

“그야, 슬프죠. 매일 저를 부려먹고 괴롭히긴 했지만, 그래도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하지만 공주님이 원하신 거잖아요? 공주님이 한 번 결심한 일은 영원정에 있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요. 설령 스승님이라 할지라도. 하물며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네 심정은 이해한다만,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어. 누구라도 말릴 수 없었을 테지. 억울하게 죽었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네만, 그녀 스스로 원한 죽음이야. 슬픈 일이지만 그녀를 애도하고 보내주는 수밖에.”


 



“왜!”


손끝에서 강렬한 불꽃이 솟구쳐 요괴의 전신을 태웠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요괴는 곧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나는 재를 발로 밟았다. 재가 하늘로 솟구쳐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거냐고!”


전신에서 일어난 불은 주변에 있던 수많은 시체를 단숨에 태워버렸다. 이미 대지는 나의 분노로 새카매진 지 오래였다.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량한 대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카구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있던 자리를 손으로 쓸어본다. 거친 흙만이 느껴졌다. 이게 아니야.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살결이 있어야 해. 왜 없는 거지? 왜? 어째서? 영원히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왜?

카구야가 죽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처음 며칠간은 환상향 전체가 떠들썩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봉래인이 죽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허나 그것뿐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곧 시들해졌고, 대부분의 요괴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내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일부 요괴들만이 아직도 나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카구야가 죽었다고 해서 나도 죽을 줄 알고.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다. 그래. 봉래인을 죽이는 약을 만든 야고코로 에이린이나 명계를 유지해야하는 사이교우지 유유코, 영혼을 강 건너로 인도해 주는 게 전부인 오노즈카 코마치, 흑백만을 가리는 꽉 막힌 재판관 시키에이키 야마자나두, 머릿속에 환상향밖에 없는 야쿠모 유카리. 그들은 어차피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평등한 레이무도, 카구야를 따르던 레이센도, 심지어는 나의 좋은 이해자라고 생각했던 케이네 조차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카구야를 만나고, 케이네를 알게 되고, 영야이변으로 인해 많은 인요들을 알게 되어 이제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생각했지만, 모두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결국, 예전과 똑같았다. 카구야와 만나기 전의 나. 철저히 혼자였던 나와.


내 유일한 이해자는 이제 없다.

앞으로도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를 알아줄 사람이 없는…… 이 빌어먹을 세계 따윈…….”


필요 없어.


 


몸에서 불꽃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새빨간 불꽃은 서서히 새의 형태로 바뀌었다. 나의 상징과도 같은 불사조는 내 심정을 대변하듯 끝없이 하늘로 올라갔다. 이윽고 요괴의 산 정상이 보일 정도로 올라가자 불사조는 수십 개의 불꽃으로 갈라져 환상향의 전역으로 날아갔다. 나뉜 불꽃 또한 날아가면서 모두 새의 형상으로 변했다.

짐승의 길에도, 무연총에도, 요괴의 산에도, 현무의 계곡에도, 마법의 숲에도. 불사조는 날아갔다. 이제 불사조는 고도를 낮추어 불꽃의 날개에 닿는 모든 것을 불태우겠지. 스스로 태워 환상향 전역을 불로 뒤덮을 것이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딱히 없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태울 뿐이다.


 


“여기 있었구나, 모코우!”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소리는 오랜만에 들은 지라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곧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해냈다. 그래,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지. 고개를 돌려보자 역시나. 하쿠레이 레이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뭐긴, 환상향을 불태우고 있지.”

“이변치고는 너무 심하지 않아?”

“이변? 하!”


레이무의 말에 자연스레 코웃음이 나왔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감이 날카로운 무녀님이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되시나? 아직도 이게 이변 같은 장난으로 보이는 건가? 대답 대신에 불꽃을 날렸다. 재빨리 피한 레이무가 다시 물었다.


“지금 룰을 어기는 거야? 스펠카드 룰을?”

“그런 어린애들 장난을 왜 내가 지켜야 하지?”


서서히 굳어지는 표정을 보니 이제 어느 정도 내 말을 이해한 듯했다. 손에 스펠카드 대신 고헤이와 부적을 꺼내 꽉 쥐었다. 그래, 그래야지. 스펠카드 룰 같은 장난이 아닌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해야지. 그래야 내 분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레이무에게 접근했다. 팔을 흔들어 수십 마리의 불새를 날렸다. 레이무는 당황하지 않고 불새 사이를 능숙하게 피하며 부적을 날렸다. 갖가지 주문이 적힌 부적은 스스로 궤도를 바꾸어 팔방에서 날아들었다. 허나 이쯤은 우습지. 가볍게 불태우고 나니 이번에는 커다란 음양옥이다. 동시에 옆에서는 침이 쇄도해왔다. 과연 레이무. 하쿠레이의 무녀. 요괴퇴치의 천재! 레이무에 비하면 나는 둔재라는 이름조차 아까운 우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인이 몇백 년을 수련하면 천재조차 뛰어넘을 수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우인이 불로불사의 몸이라면 어떨까!

나는 모든 공격을 몸으로 받으면서 전진했다. 음양옥에 맞아 팔이 부러지고, 침이 박혀 전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웬만큼 정신력이 강한 요괴라 해도 이 정도 라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겠지만, 나는 이보다 더한 고통을 매일같이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보다 더한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다.


“큭……!”


레이무가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피탄 당하면 끝인 탄막놀이와는 다르니까. 아니, 내가 봉래인이기 때문에 당황한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탄막놀이와 진짜 싸움은 상당히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보통 요괴라면 이렇게 많은 탄을 맞은 시점에서 이미 끝났다.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봉래인이니까. 언제나 카구야와 죽고 죽이는 게 일상인 나이기 때문에. 항상 평정을 유지하는 레이무가 당황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천하의 레이무다. 저 비상한 두뇌로 언제 묘안을 생각해 낼지 모르니까 빨리 끝을 보는 게 좋다. 나는 온몸에서 영력을 끌어 올려 수백 마리의 불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움직여 레이무의 전 방위를 점했다. 피할 수 없는 탄막을 쏘는 건 스펠카드 룰 위반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단 한 사람에게만 사용했었지.


“끝이다.”

“그래, 끝이야.”


갑자기 끼어든 낯익은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기분 나쁜 보라색 경계를 본 순간, 나는 몸을 틀었으나 이미 늦었다. 순식간에 수십 겹의 결계가 나를 옭아매었다. 몸을 감싸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제기랄!”


온 힘을 다해 결계를 때렸다. 두세 겹 정도가 파괴되었으나, 아직 수많은 결계가 남아 있었다. 게다가 깨진 결계가 자체적으로 수복하는 게 아닌가. 범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결계라니. 과연 빌어먹을 요괴의 현자답군.


“야쿠모 유카리!”


결계를 두들기며 소리쳤다. 어느새 틈새에서 모습을 드러낸 야쿠모 유카리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듯한 차가운 보라색 안광이 나를 비추었다. 그 거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으아아아아아!”


괴성과 함께 내 모든 영력을 끌어모았다. 영력은 거대한 불사조의 형상으로 바뀌었고, 내 분노를 담은 불사조는 자신을 태워 결계에 들이받았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결계들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유카리가 급히 결계를 치기 시작했다. 온통 불에 그슬린 레이무도 옆에 와서 그녀를 도와주었다.

이대로 질 수는 없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 반대로 여기서 이긴다면, 앞으로 나를 방해하는 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요괴의 현자와 하쿠레이의 무녀가 패배하였는데 그 누가 나서겠는가!

이 상황에서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 분노가 내 몸을 증식 한 이후로 단 일 초도 잊은 적 없는 그 얼굴. 카구야. 호라이산 카구야. 내 증오와 분노와 원망과 회한과 슬픔과 애정을 모두 가져간 그녀를 떠올리며, 나는 전신을 불태웠다. 허나 내 감정과는 달리 불사조는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고, 새로운 결계들이 내 몸을 조여들었다. 감각이 하나둘씩 사라졌고 이윽고 의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카, 구……야……!”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요괴의 현자와 하쿠레이의 무녀. 그들이 힘을 합치면 얼마나 강한지는 영야이변 직후에 패배와 함께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도, 그들은 나를 패배자로 만들었다.

아무것도 없다.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고 무언가가 들리지 않았고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 자신의 존재까지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봉래인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허나 서서히 생각조차 마모되고 있었다. 감각이 없는데 생각만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서서히 시시한 잡념들은 사라졌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좀 더 강렬한 생각이 필요했다.

그래서 계속 카구야를 떠올렸다. 그녀와 관련된 생각을 하면 그나마 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 그녀와의 싸움. 그녀에게 처음으로 죽었을 때. 그녀의 심장을 처음 터뜨린 날. 그녀와 처음으로 술을 나누었을 때. 그녀가 사는 영원정에 처음 갔을 때.

돌이켜보면 내가 봉래인이 된 뒤 잃어버린 희노애락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은 그녀였다. 더는 없을 거라 생각했던 감정을 다시 찾아준 사람은 그녀였다. 내 모든 감정을 가져간 사람. 내 인생의 시작. 그리고 이제는 내 인생의 끝.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이미 내 인생은 끝났는데, 나는 무얼 하는 거지? 끝난 생을 붙잡고 있는 내가 너무나도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래. 이곳이라면. 아무리 내가 죽지 않는 봉래인이라 해도 이곳이라면. 편안히 잠들 수 있으리라.


“카. 구. 야.”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름을 되뇐 나는 마침내 카구야에 관한 생각조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팬픽 대회 출품해서 2등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주제는 어... 아마 '라이벌' 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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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

마도카.”

자신의 이름이 불린 그녀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입은 미타키하라 중학교 교복. 허벅지까지 오는 하얀 오버 니 삭스. 깨끗한 갈색 구두. 그리고 붉은 리본으로 멘 분홍색 머리를 가진 소녀였다. 또래의 여자아이보다 체구가 작아 귀여운 인상을 지니고 있는 소녀는 외모에 걸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호무라……?”

이름을 부르는 것치곤 상당히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친하지 않은데 이름을 부르는 사이인 걸까. 하지만 그건 마도카에게만 해당하는 듯했다. 다른 한 사람, 마도카의 이름은 부른 소녀는 거리낌 없이 마도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검은색 머리. 앞머리는 머리띠로 고정을 해 단정하다. 머리와 색을 맞춘 듯 다리에 신은 스타킹은 검은색이었다. 마도카와 같은 미타키하라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귀엽고 순수한 느낌이 드는 마도카와는 달리 아케미 호무라는 어딘지 모르게 어두웠고, 요염했다.

오늘 집에 같이 가지 않을래?”

, 그럴까?”

아직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친한 사람이 없던 마도카는 말을 더듬으며 수락했다. 누가 보면 어쩔 수 없이 수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심 기뻤다. 다만 아직 호무라와 어색한 것뿐. 전학을 온 첫날에 다소 이상한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말을 걸어주며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호무라에게 점점 호감이 생기는 중이었다. 항상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자신을 대할 때는 조금 풀어진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어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호무라를 대할 때면 항상 가슴 한구석이 아련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를 대하는, 아니 연인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다른 옛 친구를 볼 때는 이런 감각이 들지 않았다. 오직 호무라만, 호무라만이 그런 느낌이 들게 했다.

, 그럼 마도카. 슬슬 나가…….”

잠깐, 마도카! 오늘은 나랑 집에 같이 가기로 했잖아!”

교실을 나서려던 그들의 뒤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뚝뚝한 호무라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그러나 옆에 있는 마도카를 의식하고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마도카가 몸을 돌리느라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목소리의 진원지에는 하늘색 머리를 단정히 정돈한 소녀가 있었다. 두 사람과 같은 교복을 입고 회색 니삭스를 입은 소녀는 딱 봐도 활발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앞의 두 사람과는 대조적인 이미지였다.

, 아침에 그랬지?”

그래!”

하늘색 머리의 소녀, 미키 사야카가 웃으며 대답했다. 사야카와 마도카는 소꿉친구로, 마도카가 미국에 가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당연히 마도카에게 있어서 호무라보다는 편한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때 사야카가 고개를 돌려 호무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살짝 혀를 내미는 게 아닌가. 명백한 도발이었다. 호무라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내심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아직 방법은 있다.

너와는 가는 방향이 다를 텐데, 미키 사야카?”

만약 가는 방향이 거의 같았다면, 소꿉친구인 두 사람은 아침마다 같이 오겠지. 허나 호무라가 관측한 바로는 두 사람은 학교 근처에서 접촉하는 경우가 많았다. , 생각보다 길이 많이 겹치지 않는다는 의미다.

중간까지는 같다고! 그러는 너는, 방향이 다르지 않아?”

허점을 찔린 사야카가 소리를 치며 반문했다. 당연히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물론 그에 대한 대비도 철저하다.

거의 같아. 우리 집은 마도카네 집을 지나서 조금 더 가야 있어.”

그런 억지가……!”

내가 사는 곳에 온 적이 없는 네가 어떻게 억지라고 단정할 수 있지?”

역시나, 사야카의 말문이 막혔다. 사야카의 집이 어딘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호무라와는 달리 사야카는 단 한 번도 호무라의 집에 와본 적이 없다. 애초에 정보력에서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났다. 처음부터 사야카에겐 승산이 없었다.

저기……. 그냥 사이좋게 셋이서 가면 안 될까?”

그때 마도카가 조심스레 의견을 꺼냈다. 정말 너무나도 마도카다운 의견이었다. 누구에게나 자애롭고, 누구라도 보듬어주는. 사야카는 친구의 뜻을 존중했고 호무라에겐 거절이라는 선택지조차 없었다.

알았어.”

고마워, 호무라!”

환하게 웃는 마도카를 보며 호무라도 미소 지었다. 그런 호무라를 사야카는 질렸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둘의 상태는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호무라는 매우 진지하게 시간을 5분만 되돌려서 자기 자신을 때리면 어떨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히토미가 말야, 쿄스케가 얼마나 눈치가 없는지 내게 한 시간 동안 연설을 하더라니까?”

아하하. 그래서 어떻게 됐어?”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가서 쿄스케를 실컷 때려줬지!”

사야카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설명을 해 주었다. 마도카는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아직 친하진 않지만, 반 친구들의 이야기가 즐거운 모양이다.

호무라는 뒤에서 표정이 썩은 채로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미키 사야카는 사쿠라 쿄코와 더불어 마법소녀들 중에서 가장 말이 많던 녀석이었다. 토모에 마미와 마도카는 그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자주 했고, 호무라 자신은 그냥 말수가 적었다. 그러니 과거에 시간을 계속 돌릴 무렵에도 마도카를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설득하지 못했지.

그때 사야카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일그러진 호무라의 표정을 보고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게 사야카의 노림수였다. 말주변도 없고 마도카와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 적은 호무라가 사야카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절로 저열한 쾌감이 느껴졌다.

세 사람은 천천히 걷고 있었기에 이대로라면 대략 10분 정도는 더 지속할 터였다. 사야카는 아직 10분이나 남았음에 기뻐했고, 호무라는 10분조차 참지 못할 것 같아 사야카의 입을 막을 방법을 곰곰이 생각했다.

불현듯 재밌는 방법이 호무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도 악의가 철철 넘치는 방법이. 예전의 호무라였다면 절대로 생각 못 할 정도로 사악한 방법이지만, 그녀는 악마다.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살며시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너무 큰 소리가 나지 않게 적절히 조절하여 두 손을 부딪쳤다. . 하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사야카의 말이 끊겼다. 후두부를 강타한 듯한 충격이 그녀를 덮쳤다. 생기가 넘치던 두 눈동자가 흔들리고 밝게 웃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변화에 깜짝 놀란 마도카가 급히 소리쳤다.

사야카! 왜 그래? 괜찮아?”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고 흘러들어오는 강렬한 기억. 마법소녀. 마녀. 큐베. 엔트로피. 토모에 마미. 치즈. 샤를로테. 모모에 나기사. 케이크. 사쿠라 쿄코. 사과. 소울 잼. 영혼. 마녀화. 소원. 동반자살. 카나메 마도카. 멜론. 크림힐트 그레트헨. 엔트로피의 중심점. . 원환의 이치.

아케미 호무라. 호박. 호무릴리. 악마.

머리를 붙잡고 있던 사야카는 금방 고개를 들었다. 다시 웃는 얼굴이었다.

, 괜찮아. 잠깐 현기증이 와서. 별거 아니야.”

정말 괜찮은 거지?”

! 물론이야.”

활기차게 대답하던 사야카가 호무라를 향해 눈을 돌렸다. 순간 웃음이 싹 사라지고 남은 날카로운 눈매가 호무라를 관통했다. 적의와 함께 느껴지는 순수한 분노. 그 눈빛을 받고 있자니 숨이 턱턱 막혀온다. 심리적인 압박이 아니다. 공기 그 자체가 호무라를 압박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어 공기의 흐름을 바꾸었다. 입가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만약 옆에 마도카가 없었다면 주저 없이 물어봤겠지. 기분이 어때?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평범한 소녀에서 세계의 진실을 깨달은 마법소녀가 된 소감이.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칼을 꺼내 나를 찌를 거야? 아니면, 그 마녀의 창으로 나를 꿰뚫을 건가? , 뭐든 좋아. 나를 즐겁게 해 보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마도카가 정말로 없었다면 호무라가 사야카의 기억과 힘을 돌려줄 이유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두 사람이 같이 하교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본말전도다. 호무라는 내심 아쉽게 여겼지만 좋은 표정을 구경한 데에 만족하고 다시 사야카의 기억을 없앨 준비를 했다.

, 나 오늘 일이 있어서 여기서 헤어져야 할 거 같아.”

갑작스레 사야카가 이야기를 꺼냈다. 돌아온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서인지, 되찾은 힘을 가다듬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어쨌든 시간을 벌기 위함이겠지. 호무라는 이쯤에서 끝내기 위해 손을 들었다.

다시 손뼉을 치려고 손을 모으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여기서 사야카의 기억을 지우지 않는다면, 그녀는 어떻게든 호무라를 막으려고 하겠지. 말로? 아니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틀림없이 무력이다. 자신의 양손에 칼을, 마녀의 양손에는 창을 꼬나 쥐고 자신에게로 돌진할 것이다. 설령 승산이 전혀 없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최후에는 절망하겠지.

상상만 해도…….

그래? 아쉽게 되었네.”

손을 내리며 마도카 대신 답변을 해 주었다. 사야카의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호무라는 마도카가 보지 않는 사이 입 모양으로 사야카에게 말했다. ‘그 아이 앞이야.’ 그녀는 눈에서 불꽃이 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부릅떴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계획 없이 호무라에게 덤비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내일 보자!”

! 잘 가!”

사야카는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호무라는 그녀의 뒷모습에 미소를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곧 자신을 즐겁게 해줄 광대를 찬미하는 조소를.

 

 

 

집에 도착한 사야카는 대충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급히 들어왔다. 숨을 고르며 손에 든 가방을 내려놓는데 손에 못 보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아니, 못 보던 반지가 아니다.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잠시 잊어버리고 있던 물건. 아니다. 물건도 아니다. 이걸 어찌 한낱 물건이라고 격하시킬 수 있겠는가.

내 영혼인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호무라의 기억 조작이 있었다고 해도 자신의 영혼을 잊고 있었다니. 텅 빈 몸 대신 자신을 지탱해주는 이 소울 젬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는지.

두 손을 모아 반지를 가볍게 쥐었다. 그러자 반지가 둥근 타원형 구체로 변했다. 금색 금속이 둘러싸고 있는 타원형 구체. 이것이 바로 마법소녀의 영혼이다. 사야카를 비롯한 수많은 마법소녀들의 본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천히 마력을 응용하였다. 그러자 손에 든 소울 젬이 공명하며 폭발적인 마력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머리 색깔과 같은 푸른색 마력은 온몸을 감싸 안았고 다시 빛이 사라졌을 때에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그녀가 있었다. 평범한 교복을 입은 여중생이 아닌, 망토와 칼로 무장한 마법소녀 미키 사야카가.

손에 든 칼을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나쁘지 않다. 손끝에 칼을 다루는 감각이 남아 있다. 며칠만 수련한다면, 예전처럼 다룰 수 있겠지. 마법적인 능력은? 망토를 움직이거나 허공을 걷는 등 기초적인 움직임을 해 보았다. 이것 역시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다음은? 칼을 오른손에 쥐고 왼팔을 향해 내리쳤다. 반쯤 잘린 왼팔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고통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수 초 뒤, 서서히 피가 멎었고 상처조차 없어졌다. 바닥에 웅덩이를 만든 피만이 사야카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치유능력도 괜찮네.”

, 이제 마지막 하나만이 남았다. 가장 중요한 그녀를 움직이는 일이다. 정신을 집중하여 방금 만들어진 피 웅덩이 쪽으로 마력을 흘렸다. 그러자 웅덩이가 일렁거리더니 인어 같은 존재가 일렁거렸다. 두 손에 커다란 칼을 든 연모의 인어. 사야카의 또 다른 모습.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

그 순간, 세계가 잿빛으로 변했다. 색채가 옅은, 무기질적인 세계. 생동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이 세계에서 방문을 열고 나타난 존재가 있었다. 시간을 걸고 소원을 빌었기에 멈춰버린 시간 속을 유일하게 유영할 수 있는 존재. 아케미 호무라가.

그녀는 모처럼 꺼낸 버클러를 쓰다듬었다. 악마가 된 이후로는 딱히 쓸 일이 없었기에 잊고 있었으나, 지금처럼 몰래 염탐을 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도구가 없다. 상대는 자신이 왔다 갔다는 사실조차 모를 테니까.

그녀는 걸음을 멈춘 채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사야카의 손 끝에 걸려 있는 칼과 그녀의 복장, 그리고 피 웅덩이에 어렴풋이 보이는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까지.

내가 시간을 돌릴 때에는 언제나 자신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애송이었는데, 원환의 이치에서 많이 성장한 모양이네.”

일전에 호무릴리가 되어 다른 마법소녀들과 싸울 때도 느꼈지만 미키 사야카는 강해졌다. 자신의 능력과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그것을 활용할 줄 안다. 결계 안에서 잠시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이제 호무라는 사야카를 이길 수 없다. 열 번 싸우는 두어 번 정도 이길 수 있을까. 그 정도로 승률이 낮다.

물론 어디까지나 마법소녀였을 때의 이야기지만. 지금의 호무라는 천 번 싸워서 천 번 모두 이길 자신이 있다.

확인을 끝낸 호무라가 방문을 열다가 문득 실소를 흘렸다. 생각해보면 항상 필요로 사용하던 시간정지인데, 이렇게 시답잖은 이유로 사용하고 있으니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하긴 세계조차 자신의 욕망으로 물들였는데, 이제 와서 고작 능력 하나를 욕망으로 못 쓰겠는가. 쿡쿡거리며 방문을 나갔고, 곧이어 세계는 다시 제 모습을 되찾았다.

물론 사야카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단지 확인을 끝냈기에 더 이상 마력을 낭비하지 않고 모조리 회수하는 작업만 했을 뿐이다. 푸른빛이 사라진 사야카의 방에서는 어떠한 마법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질척거리는 피를 제외하면 말이다.

좋아. 대부분 능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어.”

원환의 이치에 있을 적에 사용하던 능력을 전부 쓸 수 있다는 점은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무뎌진 손만 풀면 그때와 동등한 전투력을 가질 수 있다. 결계 속의 호무릴리를 소탕하던 그때의 힘을.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다.

다만 그와 반대로 마음 한구석에 있던 불안감도 더욱 커졌다. 자신을 기만하려고 하면 기억만 줘도 충분했을 텐데 왜 힘까지 돌려준 것일까? 그것도 사야카 최대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까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사야카는 두 가지 가설로 압축하였다. 첫째. 호무라가 실수를 했다. 철두철미한 호무라지만 그럴 수도 있다. 그녀는 점점 지쳐가고 있다. 처음 악마가 되었을 때랑 비교해보면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다크서클도 짙어졌다. 이 세계를 억지로 유지하는 데에 큰 힘을 사용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마도카도 막아야 하고. 그러다가 자신을 놀려줄 생각으로 내 기억을 돌려주려 했으나 실수로 힘까지 돌려준 것이다. 이 추측이 옳다면 사야카는 호무라를 좀 더 쉽게 제압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생각해도 두 번째 이유가 훨씬 더 가능성이 높았다. 두 번째는……. 사야카가 전력을 다해도 호무라를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에 돌려주었다. 이게 맞다면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만큼 악마가 강하다는 뜻이니까. 첫 번째라고 믿고 싶지만 본능은 두 번째가 맞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야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호무라를 상대해야 한다. 지금 이 세계에서 악마를 막을 수 있는 마법소녀는 사야카 하나뿐이다. 마도카도, 쿄코도, 마미도, 나기사도 지금은 그저 평범한 여자아이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철저하게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사야카가 보기에 지금 호무라는 방심하고 있다. 절대로 질 거라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틀림없이 어딘가에 틈이 생길 거라 보았다. 그 자그마한 틈새에 자신의 칼을 꽂는다. 그리고 이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릴 것이다.

사야카는 자신의 손 위에서 빛나는 소울 젬을 보며 결의를 굳혔다.

 

 

 

며칠 뒤, 하굣길에서 마도카와 헤어진 사야카는 곧바로 호무라가 간 방향으로 뒤쫓아 갔다. 그 날 이후 학교의 기록을 뒤져 그녀의 집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길을 통해 집으로 가는지도 알아내었다. 마법소녀의 신체능력이라면 호무라가 집에 당도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다.

사야카의 예상대로 호무라가 당도하기 전에 먼저 준비한 장소에 도착했다. 대략 2~3분 뒤에 호무라는 이곳에 당도한다. 잠시 벽에 기대어 호흡을 골랐다.

사야카가 세운 계획은 다음과 같다. 우선 가장 먼저 호무라가 지나가는 골목 옆에 숨어 있다가 기습을 감행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거나 지나치게 방심을 했다면 여기서 죽겠지. 그렇게 된다면 사야카의 입장에서는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 실패할 생각을 하고 다음 단계로 돌입한다.

실패할 경우 절망하는 척 연기를 하며 호무라 이목을 집중시킨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더 칼을 들이민다. 그래. 웬만하면 다시 공격을 하는 게 좋다. 그래야 호무라가 더 집중을 할 테니까.

그리고 사야카에게 모든 신경을 쓰고 있는 호무라의 뒤에서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로 기습을 가한다. 일부러 이 거리를 택한 이유가 옥타비아를 쓰기 위해서다. 골목 바로 옆 건물이 공중목욕탕이다. ,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를 소환하는 데 필요한 촉매인 물이 항상 존재한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인어의 마녀를 소환할 수 있을뿐더러 호무라에게 갑작스럽게 기습을 가하기에도 용이하다. 녀석이 미래예지라도 하지 않는 이상, 틀림없이 당할 것이다. 그렇게 믿고 칼을 찔러야 한다.

…….”

긴장감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원환의 이치에서 수많은 싸움을 했지만, 이번만큼 긴장된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마수, 마녀 따위가 아니라 세계의 섭리에 간섭하는 악마다. 신과 같은 마도카의 힘을 가로챘으니 신과 동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하지만 마도카를 위해서라면, 신조차 벤다. 그것이 사야카의 결의였다.

이윽고 호무라의 발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상념에서 깨어난 사야카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칼을 들었다. , 여기서부터 카운트 다운이다. 다섯, , , , 하나!

꺾인 골목에서 호무라의 얼굴이 보였다. 갑작스레 놀란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할 때 이미 칼끝은 얼굴에 닿기까지 불과 10cm 정도를 남겨두었다. 사야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찔러 넣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반응한 호무라는 몸을 비틀었다. 어느새 손목에는 버클러가 달려 있었다. 변신도 하지 않았는데, 굉장한 반응 속도였다. 미리 대비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항상 준비하고 있던 게 틀림없다. 어느 쪽이든 사야카에게 중요한 건 최초의 기습이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호무라가 꺼내 든 저 버클러는 분명 시간을 조종하는 물건. 그렇다면, 사야카에게 남은 방법은 무조건 붙어서 연속적인 공격을 하는 것뿐이다. 시간을 정지하려 할 때, 언제든지 저지할 수 있도록.

사야카에게 있어 정말로 다행인 건 녀석이 마법소녀였을 때와 같은 무장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악마가 되었다고 해서 완전 다른 무언가로 반격할 줄 알았는데 결국 버클러와 총화기. 그렇다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양 손에 든 두 자루의 검을 쉴 새 없이 놀렸다. 호무라는 크게 뒤로 후퇴하며 버클러에서 권총을 꺼냈다. 칼은 총을 이길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중거리 이상에서다. 근접전이라면 칼이 훨씬 유리하다. 상대가 전력을 다하는 토모에 마미라 해도, 근접전에서 순수하게 머스켓만 사용한다면 사야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총과 칼이란 그런 관계니까.

하지만 상대는 몇 십 번이고 시간을 돌려가며 수많은 전장을 누빈 아케미 호무라. 당황하지 않고 칼을 능숙하게 받아내며 때때로 총을 쏘았다. 시간 정지는 사야카에게 저지당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 결국, 사용하는 손은 하나뿐. 그렇다면, 양손을 다 쓰는 사야카가 상대적으로 훨씬 유리했다.

하압!”

기합을 넣고 칼을 크게 휘둘러 권총을 쳐냈다. 저 멀리 날아가는 권총을 뒤로한 채 왼손에 든 검이 목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틀림없이 버클러에서 새로운 총을 꺼내는 것보다 빠르다! 사야카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엇나갔다. 호무라는 버클러에 손을 뻗는 대신 왼손을 들어 사야카의 어깨를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 권총이 튕겨져 나가면서 뒤로 밀린 오른손을 뒤로 당겼다. 동시에 약간 구부러져 있던 오른손을 펼쳤다.

크윽!”

사야카가 그대로 강력한 힘에 밀려 벽에 꽂혔다. 구멍 난 어깨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와 발밑을 적셨다. 마법소녀가 고통을 느낄 정도라니, 얼마나 터무니없는 충격이었는가. 그 실체를 보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호무라의 손에는 보라색 활이 쥐어져 있었다. 사야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젠장, 그래. 녀석에겐 저것도 있었지. 본디 마도카와의 만남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소원을 빌어 마법소녀가 된 호무라의 무장은 시간을 다루는 버클러 하나밖에 없었지만, 마도카가 원환의 이치가 된 뒤로는 그녀가 사용하던 것과 흡사한 활을 다루게 되었다. 활도 가지고 있을 거라 예상했어야 했는데, 방심했다.

하지만 아직 사야카에겐 비장의 한 수가 남았다. 그걸 위해서는 호무라를 방심시킬 필요가 있다. 사야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기억과 힘을 되돌린 건 무슨 속셈이지, 아케미 호무라?”

호무라는 화살 끝을 사야카의 심장을 향해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글쎄, 무엇 때문일까.”

어느새 특유의 무표정을 되찾은 호무라가 무심하게 사야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야카는 그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명백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증거다. 사야카는 잇몸을 꽉 깨물었다.

그나저나 나를 잊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더니, 내가 기억을 돌려주기 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네?”

…….”

네 의지는 그 정도라는 거겠지. 미키 사야카.”

아니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었지만, 벽과 어깨를 관통한 화살은 빠지지 않았다. 더 많은 피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동시에 격통도 더욱 거세졌다. 단순하게 상처가 벌어졌기 때문에 더해진 고통이 아니다. 틀림없이 호무라가 고통을 조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화살에 맞았을 때도 고통을 느꼈던 거군. 사야카가 홀로 중얼거렸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증명해보렴. 네 의지를. 나를 없애고 마도카를 구하고 싶잖아? 그 의지가 내 정신보다 강하다면, 나를 쓰러뜨릴 수 있겠지.”

그렇다면 보여줄게.”

사야카는 서서히 정신을 집중했다. 호무라의 등 뒤, 벽 너머에 있는 물이 느껴졌다.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를 소환하기 위한 매개체, ! 단숨에 마력을 끌어모아 인어의 마녀를 소환한 뒤 곧바로 칼을 찔렀다.

내 의지를!”

요란한 굉음과 함께 벽이 부서지며 그 속에서 커다란 창날이 번뜩였다. 날카롭게 벼려진 마름모 모양의 창날은 호무라의 등을 향해 쇄도했고, 그대로 호무라의 등을, 스쳐 지나가서, 사야카의 배를 관통했다. 방금 느꼈던 통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지만, 그보다는 정신의 혼란이 사야카를 괴롭혔다. ? 어째서? 나의 마녀, 옥타비아 폰 제켄도르프가?

좋은 표정이야.”

그런 사야카에게 호무라가 다가왔다. 이제는 누가 봐도 명백한 비웃음을 띄고 있는 표정을 짓고는, 다가와서 사야카의 얼굴을 가까이하였다. 서로의 눈동자가 무슨 빛을 띠고 있는지 보일 정도의 거리였다.

어떻게? 라니. 너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잊은 모양이구나.”

…………!”

정신에 심각한 충격을 받은 사야카의 입에서 가까스로 두 음절이 새어나왔다. 그 모습이 호무라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래. 악마. 신조차 떨어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악마야. 세계를 개편할 수 있는 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고작 마녀 하나 조종할 수 없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내게 힘을 돌려준 이유는……설마……?”

물론.”

호무라는 잠시 말을 끊고 사야카의 푸른 눈동자를 감상했다. 격렬하게 떨리고 있는 두 눈동자는 한 가지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감정이자 본능적인 감정.

공포로 가득 찬 너의 표정을 감상하기 위해서야.”

사야카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호무라의 보라색 눈동자를 보았다. 전혀 떨림이 없는 두 눈동자는 여러 감정으로 아롱져 있었다. 기쁨, 환희, 즐거움, 행복,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7대 죄악 중 하나이자 궁극의 죄악.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최악의 감정.

……교만……!”

날 즐겁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미키 사야카.”

마지막으로 호무라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럼, 그 애 앞에서는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야지?”

, 하고 언젠가 들어보았던 박수 소리를 들으며 미키 사야카의 의식이 가라앉았다.

 

 

 

마도카.”

오늘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케미 호무라에게 있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일상을 위해 수많은 것을 희생했고 또한 지금도 희생하고 있기에 그녀는 이 일상을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과 마도카의 이러한 일상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라도 용납하지 못했다.

잠깐, 나도 같이 가!”

이를테면 저쪽에서 달려오고 있는 미키 사야카 같은 자들을 말이다. 며칠 전에 따끔하게 혼을 내 줬거늘, 여전히 저 모양이다. 아니, 생각해보면 관련된 기억을 모조리 지웠으니 기억을 못 하고 있겠구나. 혹시라도 그때 느꼈던 공포가 영혼에 각인되지 않았을까, 하고 기대했으나 지금의 사야카를 보아하니 그런 건 전혀 없는 듯했다. 호무라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만간 한 번 더 그녀에게 공포를 새겨줄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다시 한 번 공포로 물들이자.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비열한 쾌감이 올라왔다. 문득 기억을 잃기 전 사야카가 그녀를 불렀던 호칭이 떠올랐다. 교만한 악마. 아아, 확실히 교만에 빠졌을지도. 하지만 나는 악마잖아? 교만하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지.

그녀는 마도카와 사야카의 뒤에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악마만이 지을 수 있는 교만한 미소를.

 

 

 

 



마마마 7대 죄악 합작에서 '교만' 을 주제로 쓴 팬픽입니다.

'팬픽 >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마와 초콜릿  (0) 2015.03.16
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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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 보고서 완성했습니다.”

신입사원이 손에 두툼한 보고서를 들고 부장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부장은 잠시 그를 훑어보더니 이내 보고서를 잡고는 빠르게 넘기기 시작했다. 제대로 보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으나 주위에 있는 누구도 책을 잡지 못했다. 저렇게 봐도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확인하기 때문이다.

.”

. 부장님.”

릭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설마, 또 뭔가 잘못된걸까. 벌써 3번째 수정한 보고서였다. 이제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제발, 이번엔 제발.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이렇게 표가 난잡하면 가독성이 떨어지지 않나. 그리고 옆에 그래프는 이게 뭔가? 이런 도표에선 막대형 그래프보단 원형 그래프가 훨씬 좋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닐테고. 여기 34페이지에 이 자료는 확실하지 않으니 빼고 내가 보내준 6월 조사 결과를 써라고 저번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그건 어디 갔는지 모르겠군.”

……죄송합니다.”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이루어 준다고 누가 말했는데, 릭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인 듯했다. 릭의 어깨가 절로 내려갔다.

고칠 부분들 다 적어 놓았으니 이대로 수정하도록. 쓸데없이 다른 거 건드리지 말고.”

어느새 지적사항들을 다 적어놓은 모양이다. 정말 자기중심적 성격에 재수 없지만 능력 하나는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부장을 하고 있지만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 홀든 부장님.”

“‘홀든부장님?”

, 실례했습니다. 벨져 부장님.”

부장은 이름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굴지의 대기업 홀든 가문의 차남이었다. 그러나 완벽주의자인 벨져에겐 가문조차도 걸림돌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완벽을 증명받길 원하는 사람이었기에 성으로 불리는 걸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평소에도 다른 사원들에게 벨져 부장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보고서가 지적받은 데다 말실수까지 한 릭은 풀이 죽어 자신의 자리에 돌아왔다. 주변에 있던 사원들은 그의 눈치를 보며 하나둘씩 퇴근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릭과 벨져 둘만 야근을 하는 모양이었다.

릭이 투덜거리며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등을 건드렸다. 순간 짜증이 솟구쳐 홱 돌아보다가 딱딱한 무언가에 머리를 부딪쳤다. 머리를 문지르며 자세히 보니 캔커피였다.

회사 내에 있는 자판기에는 싸구려 커피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다.”

벨져가 손에 든 캔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릭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캔커피를 받아 들었다.

우리 부서에 멍청이들 밖에 없어서 그나마 일을 맡길 사람이 자네밖에 없는 걸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그래서 저만 매일 남기신 겁니까?”

릭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벨져가 특히 자신에게만 잔소리를 많이 한다는 걸 릭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 냉정한 부장의 입에서 직접 저런 말을 들으니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 그래도 날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지만.”

, . 여부가 있겠나. 다 이해 하오……. 아차.”

무의식적으로 편하게 말을 했다가 다 뱉고 나서야 눈치를 챈 릭이 벨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벨져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둘만 있을 땐 괜찮다.”

그것 참 다행이오.”

릭도 따라 웃었다.

그렇다고 일 안 해도 되는 건 아니다.”

. 너무 재촉하지 마시오. 알아서 다 할테니.”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이내 서로의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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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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